친교실

제목 방 빼!!! 2000년 01월 01일
작성자 권혁순
방금 전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물론 영어로 되어있는 것인데, 짧게 요약하자면 '방 빼'입니다.

저는 지난 3월부터 이 곳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있습니다. 대학 측에서 연구실과 전화와 컴퓨터를 제공해 주어서 잘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9월 5일부터 갑자기 전화가 불통이 되었습니다. 뭔가 고장이 났나보다 하였는데, 하루가 지나도 고쳐지지 않아서 대학의 전화 시설관리하는 곳에 알아보니 대학 행정실의 직원이 요청하여 끊었다는 것입니다. 당사자에게 가서 말했더니만 잘 모르는 일이라며 발 뺌을 하며 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3주가 지나도록 전화는 여전히 불통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어제는 정통한 소식통으로부터 방을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전화가 안되냐는 주위 사람들의 문의에 농담삼아 한국에서 집주인이 세입자를 내 쫓을 때 수도 끊고, 전기 끊고, 전화 끊듯이 방 빼라는 의미가 아니겠냐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농담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제는 정말 화가 나더군요. 사전에 당사자와 한마디 상의하지도 않고 이럴 수가 있는가? 하필이면 내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초청 교수가 휴가를 간 동안에 일을 저지른 것을 보면 치밀한 사전 계획을 가지고 나를 희롱하려는 것이다. 분이 나서 어떻게 화풀이를 해야할 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지네들 전화선도 한 번 예고없이 끊겨보는 고통을 겪게 해 볼까? 등등 차마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 갔지요. 참, 공상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보기 위해 동산 위에서 기다리던 요나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박 넝쿨이 자라서 그 아래 그늘에서 시원히 있다가 넝쿨이 말라 죽자 불평을 하던 모습 말입니다. 이 곳 연구실의 전화, 컴퓨터 등 많은 것을 오하이오 주립 대학으로부터 지원 받아 제가 이 곳에서 생활하고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돈 한 푼 내지도 않고서 말이죠. 그러다가 대학 측의 필요에 의하여 다른 연구실을 사용하라는 것인데, 제가 왜 화를 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죠. 어디까지나 학교에서 저에게 호의를 베푼 것인데 저는 그 것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고, 그리고 그 변화의 방식에 대하여 불평을 하였던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미국 사람들 말이 이곳 대학 당국은 언제나 그런식으로 일방적인 통보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교수도 이런 식의 대접을 받고 연구실을 옮기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요나와 박 넝쿨을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 앉더군요. 오늘 아침, 그러니까 방금 전에 학과장이 제게 직접 와서는 미안하지만 사무실을 옮겨야 한다고 하더군요. 편지까지 써 가지고 와서 말이죠. 아마도 어제 제가 한 불평을 전해 듣고 준비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제 마음은 이제 정해졌거든요. 학과장에게 했던 제 답변은 그저 '아이씨, 땡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땅에서 살아가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정말 충분한 것들이지요. 물론, 때로는 햇볕을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를 주시기도 하지요. 저에게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제가 납득하기 힘든 일일지라도,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며, 제게 유익한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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