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글라디올러스 | 2000년 01월 01일 |
---|---|---|
작성자 | 김기석 | |
지난 봄, 시골 고향집에 다녀올 때 마을 아주머니에게 글라디올러스 두 뿌리를 얻어왔습니다. 빈 화분에다 심어놓고 물을 주며 기다렸지만, 싹은 좀처럼 나오지 않더군요. 기다림에 지쳐 포기할 무렵 작은 싹이 고개를 내밀더군요. 기다릴려면 끝끝내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배웁니다. '어, 너 살아 있었구나.'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안 주던 물도 정성스럽게 주었지요. 글라디올러스는 날이 갈수록 크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잎은 참 볼품없더군요. 난초 같기도 하고, 붓꽃 잎 같기도 한 것이 키만 훌쩍 컸어요. 구근을 심어서 별로 재미를 본 기억이 없어서, 나는 지레 기대를 버렸어요. 마른 장마가 지나가고,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화분을 내려다보니까 그 큰 키가 구부정하게 휘어 있더군요. 저녁에 집에 와보니 아내가 글라디올로스를 보았냐고 물어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바람에 휘어진 녀석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더래요. 그래서 끈으로 조심스럽게 묶어주고, 물을 주었다나요. 며칠이 지난 후 보니까, 아 이 녀석이 꽃줄기를 내밀고 있는 거예요. "꽃이 피긴 필 모양이네." 대견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잊고 말았어요. 피어보았자 별게 있겠나 싶었던 거지요. 어제 아침, 집에서 나오다가 슬그머니 뒤꼍 감나무 아래에 있는 화분을 내려다 보았겠지요. 아, 그곳에는 환한 꽃등 세 개가 밝혀져 있었어요. 깔대기 모양의 꽃이 어찌나 예쁜지 나는 소리쳐 아내를 불렀어요. "여보, 얘들 좀 봐." 밖으로 나온 아내도 탄성을 올렸지요. "어머, 너희들 언제 나왔니?" 그러면서 혼잣소리로 그러더군요. "가을이 되면 구근을 거두어 두어야겠네." 가만히 눈치를 보아하니 아내는 하루에도 두어 번쯤 감나무 아래로 외출을 하는 것 같아요.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 오는지는 모르지요. 마당가에 있는 수도에서 물도 한 바가지씩 가지고 가더군요. 어쩌면 녀석은 이럴지도 몰라요. '사람들의 호들갑이라니. 꽃이 피긴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하지만 글라디올러스 꽃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한번 보러 오지 않을래요? 언제 질는지 모르겠지만. |
||
목록편집삭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