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2013년 04월 29일
작성자 나눔

윤동주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으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윈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고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고 또 이고 돌아가오.

 

 

트루게네프의 언덕

윤동주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간즈메통,쇳조각,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때 아이도 그러하였다

세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찢어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시계,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가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불러 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세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초 한 대

윤동주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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