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너 자신을 알라 2012년 03월 13일
작성자 늘 종

 

 

스펙이라는 허황된 신화

 

얼마 전 우리 사회는 신정아라는 한 큐레이터로 인해 한동안 시끄러웠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일들이 모두가 부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가짜학력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 우리 사회가 정화되기도 했고, 학력지상주의에 매달리는 우리 사회의 헛점이 드러나기도 하고,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가진 자들의 탐욕의 모습 또한 다시 한 번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지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신정아씨는 한 대기업의 화랑을 맡은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대학 교수가 되기도 하고, 광주 비엔날레라는 국제행사에 예술 감독으로 초빙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대단한 실력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의 마음에는 자신의 실력이 유수한 대학의 박사학위 소지자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늘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는 그런 자신의 실력을 자신이 생각하는만큼 인정해주지 않기에 가짜 학력을 위조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스펙 없이 그냥 실력 있는 사람도 스펙을 가진 사람만큼 실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만일 그런 사실을 사회가 인정한다면 스펙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힘은 훼손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과도하게 스펙에 집착하는 사회입니다. 스펙이라는 허황된 신화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KS, SKY대 출신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아무리 학력 제한 철폐를 외쳐대도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요원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건은 또 다른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더 치명적인 스펙

 

그 사건이 사람들에게 여러 교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그 사건을 통해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배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것은 스펙이 가지고 있는 해악을 사람들이 여전히 보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펙은 분명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인류에게 가장 해로운 존재는 바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우리 사회에 계층이 생기고 과도한 경쟁이 인간관계를 파괴하기에 이르게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훈훈한 인정이 사라지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펙은 특별히 영적으로는 더더욱 치명적입니다. 바른 종교라면 어떤 종교이건 자아의 확장이나 자기실현을 목표로 삼는 경우란 없습니다.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자기의 한계를 직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세를 낮추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스펙은 극복해야 할 걸림돌입니다.

 

한 가지 신정아씨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특이한 현상은 다른 사회의 가짜 학력 소지자들은 양심고백을 하거나 스스로 물러났고, 강화된 검증에 의해 가짜임이 드러나 쫓겨나기도 했는데 정작 가장 정직해야 할 기독교 사회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가짜 박사가 많은 곳도 기독교 사회이고, 가짜가 아니더라도 실제로 거의 아무런 노력 없이 돈만 내면 자동으로 박사학위(특히 목회학박사의 경우)를 취득할 수 있는 곳이 기독교 사회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어쩌면 그 사건을 통해 영원히 정화될 수 없는 기독교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기에 그런 것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어느 사회보다도 가짜가 판을 치는 사회, 그러면서도 새로운 목회자를 청빙하는데 스펙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곳이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스펙은 필연적으로 교만한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교만한 인간들이 경영하는 기독교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과 연관 자체가 없는 곳이 되는 것 역시 필연입니다. 지각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스펙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마지막 영역이 되어야 할 기독교 사회가 다른 어떤 사회보다 스펙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가슴아파해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스펙이 지배하는 사회에 교훈을 주는 사람으로 소크라테스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기원전 399)는 붓다, 예수, 공자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사 전체를 '소크라테스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눌 정도로 일종의 분기점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를 두고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린 사상가"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서구 철학의 기초를 형성한 사람으로서 플라톤과 그 이후 그리스철학자들뿐 아니라 서양 사상사 전체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및 아리스터텔레스의 관계를 공자와 맹자, 순자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35~40세 정도 였을 때 그의 친구 하나가 "아테네에서 제일가는 현자는 소크라테스이다"라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소크라테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당시 아테네에 사는 유명 인사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도 역시 무지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기는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아테네의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차이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자기의 무지를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아테네에서 제일가는 현자로 칭해짐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라는 식으로 자기의 무지를 아는 것을 중세철학자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docta igrantia)라 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을 그의 철학적 삶을 이끄는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이 말은 사실 소크라테스 자신의 말이 아니라 델포이 신전의 신탁으로 그 신전의 비명이었습니다. 그는 이 말처럼 아테네 사람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 소크라테스가 취한 방법 중 하나는 '대화'였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지만 특히 소크라테스는 대화야말로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모르는 사람이 질문을 하고 아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처럼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일방통행식으로 지식을 주입시키는 통상적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대화를 통해 서로 일깨움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대화할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론이나 논리를 전개해서 상대방을 가르치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질문하고 상대방의 대답 자체에 모순이 있음을 보여주어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의 무지를 깨닫고 앎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입니다. 산파는 아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아기가 산모의 몸 밖으로 나오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인 것처럼, 서로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진리의 씨앗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스로를 아테네 사람들을 괴롭히는 '쇠파리'라 했습니다. 안이한 생각과 지적 자만에 빠진 아테네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여 아테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기들의 참나를 발견하도록 애썼다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소크라테스이지만 귀찮은 '쇠파리'를 쫓거나 죽이지 않았던 아테네 사람들 역시 존경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소크라테스이지만 그는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또한 책 한 권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에 의해 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참된 삶이었고, 그러한 삶은 결코 책을 통해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그런 자기의 스승을 가리켜 "당대의 모든 사람 중 가장 사려 깊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소크라테스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칭송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스펙을 추구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배부른 돼지'로 살면서 '가난한 소크라테스'의 칭송도 함께 받으려는 모순된 길을 걷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사도 바울

 

참된 자아의 발견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였고,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펙이 보여주는 자아는 과장되고, 포장된 자아이며 실체없는 자아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의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에도 뒤지지 않을 스펙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자신의 스펙에 이끌려 살아갈 때 그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의 참자아가 어떤 자아인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라고 하기도 하고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15:8)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힘으로는 영원히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자기 존재의 한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곤고한 사람"(롬7:24)이라는 말에 담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참자아를 보고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스펙의 허망함을 보고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이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참자아를 발견하자 자신이 그때까지 자랑으로 여기던 모든 것들, 다시 말해 스펙이라는 것이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는 길을 막고 있는 방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방해물을 제거하자 그때서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크자누스가 말한 자신을 아는 '박학한 무지'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의 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펙을 쌓고, 스펙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자기 자신을 알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아무리 은혜를 말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꿰어 보배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진리와는 반대의 길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그러한 모순된 현상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때까지 자기가 쌓아놓은 스펙을 버리거나 허물 수가 없습니다. 스펙이란 그렇게 영적으로 치명적인 해악입니다.

 

그래서 깊은 영적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언제나 무명이거나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인들의 도서목록의 상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주인공인 로렌스 수사는 구두를 수선하고 부엌일을 하는 평수사였습니다. <영혼의 성>이라는 걸작을 남긴 아빌라의 테레사 역시 배운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대담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깊은 영적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영성가인 헨리 나우엔 역시 그것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상과 견해와  개념과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은 좋은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귀 기울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을 잘 받은 성직자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선악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어떻게 가는지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속에서 그 날의 여러 사건 속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의 경험을 담은 여러 책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생각의 가난입니다."

 

"자신의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 말은 반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의 스펙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스펙을 쌓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펙의 허망함을 보고 스펙을 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펙을 넘어 자신의 참자아를 보고 발견하고, 스펙을 넘어 인간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는 사람들일까요? 우리 곁에 소크라테스는 없지만 우리들 스스로 자신에게 끊임없이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는 내면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도 소크라테스처럼 현자가 되고, 사도 바울처럼 오로지 그리스도를 향해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스펙 추구하기를 멈추고, 모든 스펙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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