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시인 이생진 2011년 11월 13일
작성자 시사랑

말이 길어질 때

이생진

 

긴 시를 쓰지 않겠다

길수록 거짓말이 섞이니까

내 말이 길어지거든

두말 말고 일어서라

 

 

우리 저 등대까지 갈까

-우도에 가십니까9

 

가도가도 멀어지는 길

"우리 저 등대까지 갈까?"

"미쳤어"

그래 미치지 않고

이 더위에 미치지 않고

칠십 고령인데 미치지 않고

미쳐서 걸어가는 동심아

미쳐야 일곱살이 된다

 

 

깊어가는 가을밤

이생진

 

허무는 일이 한창이다

인사동은 옛집을 헐고

먼 섬은 벼랑을 헐고

뭘 믿고 헐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인사동은 모래에 돌을 섞어 철근을 박고

섬은 허리를 잘라 바람을 막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바람을 쫓아다니며 막는다

사람의 힘으로 바람이 막아질까

세워놓은 제방이 사람과 한꺼번에 무너진다

오늘만 살고 말 것인지

이쪽에서 헐물고 저쪽에서 허무는 바람에

내일이 견디지 못한다

내일이 없는 시를 귀뚜라미가 읽는다

귀뚜라미는 슬픈 시만 골라서 읽는다

깊어가는 가을밤

휴지통 옆에서 시 읽는 소리

내일이 없어도 시를 읽는다

 

 

상혼

이생진

 

뭐니 뭐니 해도 인사동의 혼은 상혼이다

그것을 시혼으로 밀어내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시혼이 상혼에게 혼을 빼앗긴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시인들은

귀뚜라미 걱정을 한다

말복까지만 해도 입을 열지 않던 귀뚜라미가

초가을 밤부터 쉴 새 없이 우는 것을 보면

귀뚜라미도 갈 곳이 없나 보다

귀뚜라미의 감성과 시인의 감성이 동일 선상에서

겨울을 나야 하는 안타까움

호떡장사도 한자리에서 몇만 원씩 버는데

저 정도의 음색이면 토요일 하루만 울어도

일주일은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몰라서 못하는 건지

딱딱한 시멘트 틈새에서 시를 읆겠다는 발상이

이 가을을 서럽게 한다

제발 시를 가지고 울지 마라

 

 

시를 피해 가는 사람들

이생진

 

시는 죽어라 하고 안 읽으면서

간판은 시만 골라 내걸던 인사동

그것이 고마워서 시골 시인 넥타이를 매고

빈소에 들어서듯 찻집에 들어서네

 

'구름에 달 가듯이

낮에 나온 반달

술 익는 마을

귀천

시인학교

시인과 화가

바람 부는 섬

무릉도원

가는 나그네'

 

이렇게라도 도시 한복판에 시가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

이 기회에 시인도 돈을 벌어 잘 살아야지 했는데

시인의 간판은 하나 둘 내려놓고

돈 냄새 나는 것으로 바뀌네

도시 한복판에서 시를 몰아내니

쫓겨난 시 갈 곳이 없어

하나는 산으로 가고

하나는 섬으로 가네

 

 

인사동에서 시 읽기

이생진

 

밥 먹고 살려거든 시 하는 척하지 마라

시를 내걸고 장사한다는 건 위험한 짓이다

인사동 시인학교가 그렇게 망하고 말았다

박희진 시인과 내가 그곳에서 한동안 시를 읽었지만

리모델링 바람에 쫓겨나고 말았다

시는 리모델링이 어려우니까

시인학교 교장은 연금도 없이

어디서 뭘 먹고 사는지

시는 마누라도 미워한다

시라는 간판을 내걸고는 장가들기 어렵다

이런 때

'시인'이라는 명암을 내미는 사람을 보면 다시 보게

된다

시인에겐 서러운 일이 많지만

그래도 서러운 체 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해 뜰 날이 있겠지 하고 속아가며 살기 때문이다

 

 

시는 별로야

이생진

 

어딜 가나 고령지대

종로에 있는 종묘공원으로 간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수도

한국의 소크라테스들이 모인 가난한 김나지움

여기저기 나무그늘에 앉아 김밥을 먹는 시간

그런 인권도 없이

신문지를 깔고 앉아 맥없는 신문지를 읽고 있는 옆에

나도 앉아 신문지를 읽다가 아직 나는 나의 기력을 믿고

교보로 오면 그래도 젊은 세대들은 활기가 넘친다

 

우유에

치즈에

치킨에

커피에

음식이 남아도는 비만

나는 쓸쓸한 시집 진열대 앞에 서서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

창비

랜덤하우스중앙의 메뉴를 고른다

요즘은 랜덤하우스중앙에서도 시집이 잘 나온다

그래도 마음이 끌리는 시집이 없어

누군가가 골라주기를 바라는데

지나가던 여학생이

'시는 별루야'한다

읽던 시집을 던져 버릴까 하다가

나도 머리를 끄덕였다

'시는 별루야' 하는 소리에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왜 그런지 그 소리가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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