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가을의 시(詩) 2010년 09월 27일
작성자 나눔

그 눈앞에

김후란

 

나는 외람스럽게도 예수의 그윽한 눈을 사랑한다 신념이 있고 예언할

수 있고 인간을 볼 수 있는 이 그런 이만이 가진 속 깊은 눈을 사랑한다

 

그 눈앞에 내 어둠을 죽이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건 슬픔을 누르고 미소짓는 것 미소 너머로 세상을 보는 것

오 그런 이만이 가진 뜨거운 눈물을 사랑한다

 

그 눈물로 씻기우고 싶다.

 

 

가을바람

김지향

 

가을 바람은

불씨를 갖고 있다

바람이 건드리는 풀잎마다

불이 켜지고

풀잎을 따는 가슴마다

불에 덴다

가을 바람은 머리가 없고

가슴만 돋아져 있어

가을 가슴에 우리 가슴이 얹힐 때

우리는 없어져 버린다

세상은 온통 불덩이로 떠오르고.

 

 

가을 그리고 풀꽃

김지향

 

도심지에서는

몸이 재가 되어 날리는 햇빛

변두리에 와서 성한 몸이 된다

 

뜨겁게 살아도

재가 되지 않는 법을

뜨겁게 배우는 변두리의 풀꽃들

 

약하고 작은 변두리의 풀꽃 속에

살고 있는 굵은 힘줄을

불붙이는 법을

가을의 햇빛에게 배운 풀꽃은

죽도록 떠나지 않는 가을을 갖고 싶어

늙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김후란

 

이제 남은 한 시간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가슴을 열기로 하자

 

잠든 아기의

잠을 깨우지 않는 손길로

부드럽게 정겹게

서로의 손을 잡기로 하자

 

헤어지는 연습

떠나가는 연습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흰 머리칼 하나 발견하듯

 

이해의 강을

유순히 따라가며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자

 

그리하면

들릴 것이다

 

깊어 가는 겨울밤

세계의 어딘가에서 울고 있는

풀꽃처럼 작은 목숨

나를 지켜보며

조용히 부르는 소리가.

 

 

아가3

박현령

 

비로소

침착해진 가을나무여!

 

너는 네 조락을

다함없는 헌신으로

너는 네 종말을

후회없는 소멸로

 

온낮과 온밤을

율동으로 미치며

온낮과 온밤을

신명으로 병들며

 

살을 말려왔는가

살을 깎아왔는가

가을나무여!

 

비로소

말라버린 가을나무여!

배신을 추었던가

망각을 추었던가

꽃이파리 무성하게

꽃이파리 무참하게

내던지면서

 

사랑의 변이를

사랑의 소멸을

뜨겁게 뜨겁게

앓고 앓다가

 

비로서

침착해진 가을나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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