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청파에 계신 형제와 자매님들과 함께 2010년 07월 05일
작성자 최태선

우연히 김기석 목사님의 책들을 읽고 감동을 받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향린교회에 다녀오신 김목사님이 그곳 교회 성도들의 의식이 참 높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청파 교회 성도님들은 신앙이 참 좋을 것이라고 기대해봅니다.

 

얼마전 이곳 인사글 남기기 란에 간단한 글을 올렸습니다. 김목사님께서 제 손을 잡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만나 가슴을 한 번 부딪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의 기독교와 교회들이 참 안타까운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청파교회 형제와 자매님들에게 작년 연말 쯤 써보았던 글 하나를 올립니다. 함께 기도하고 싶은 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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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얼마전 전국 도보 순례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신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출발에서부터 귀환까지의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분이 받으셨던 은혜와 깨달음을 그대로 전달받기 위해 약간의 추임새와 고개끄덕임으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소 늘 한 번 가고 싶었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조국에서도 가능함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듣기만 하지 못하고 토를 달았던 부분이 꼭 한 부분 있었습니다. 도보 순례를 하는 기간 내내 주일 예배 시간이면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도 잘 드리고 점심 한 끼를 공짜로 잘 얻어 잡수셨다고 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 부분은 간증거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지를 못하고 한 마디 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 한 사진 작가가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풍경화를 찍을 곳이 없다고 한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분은 들어보신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어디에 사진기를 들이대도 화면에 십자가가 안 들어가는 곳이 없어서 더 이상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한 풍경화를 찍을 수 없다고 한탄하던 사진작가의 말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 이야기 후로는 저녁시간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울리기까지 그분의 말씀을 잘 경청하였습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우리나라에 다방 보다 십자가가 많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말씀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예수 잘 믿기 때문이라는 해설과 함께 똑같은 한 반도인데 북쪽은 재해가 많고 그렇게 못살고 남쪽은 상대적으로 재해도 적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지랖이 넓은 분들은 불교나 힌두교를 믿는 동남아와 못 사는 남미(엘도라도)이야기까지 들먹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조용히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상의 나라 일본이 우리보다 잘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저는 항상 불길한 것만을 말하는 구약시대의 선지자가 되고 맙니다.

 

십자가는 축복이라는 우상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이라는 승리의 극적 효과를 더해주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세속 진리의 확증일 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십자가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상실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가 증명해 보였듯이, 이 세상은 진리 앞에서,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적대감을 드러낸다. 타협하지 않는 증언은 결국 세상의 증오심과 부딪히게 된다. 십자가는 교회가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고통당하고 묵묵히 굴종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런 세력들을 물리치시고 거둔 승리에 교회가 온몸으로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인간이 당하는 총체적인 고난과 억압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다. 반대로, 십자가는 우리가 카이사르의 현실 인식보다 하나님의 현실 인식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긍정이자, 죽음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부정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자신의 수단에만 맡겨두시지 않겠다는 놀라운 결정을 뜻한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몬  -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여러 생각들이 오갔습니다.

 

먼저는 이 짧은 내용에 표현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과 같은 응축됨이 돋보입니다. 십자가는 진리를 사는 복음의 사람이 될 때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세상의 저항입니다. 구원하는 도구로서의 '폭력'과 희생양을 양산해 내는 '지배체제'의 허무함을 드러내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완벽함과 그 소망을 밝게 보여준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또한 그것은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식을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희생의 대가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가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셨으며, 더 이상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향한 헛된 시도를 하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어쩌면 이렇게 우리의 현실이 이 글의 내용과 정반대인가 하는 애통함입니다. 진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냄으로 세상의 적대감과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잣대로도 징계를 받아야 마땅할 정도로 극도의 부패와 타락을 보이고, 타협하지 않는 증언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찢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춘 잘 포장된 상품을 파는 기업이 되었으며, 세상의 증오심이 아니라, 세상의 이해와 동정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이 다 십자가이며, 그것도 카이사르의 성공과 권세를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로 인식되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 때문에 대가를 지불하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하는 애물단지이며,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나 실패에 대한 변명이며, '자기의'의 가치를 높여주는 장신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미 치른 완전한 대가이기에 우리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사랑의 완성이며, 우리가 어떤 수단을 구하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것을 지지하시고 이루게 하신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천국(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며 그 복음의 핵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가 왜곡되거나 변질된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이제는 그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기독교 관련 싸이트에서 본 내용입니다. 수지에서 자리를 잡고 크게 성공한 S교회가 새롭게 개발되는 지역인 동탄 지역에 예배처소를 마련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자리잡고 있는 교회들이 모임인 동기연에서 S교회에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S교회의 s목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동기연이 힘을 합쳐 이단을 방지하고 신천지나 이슬람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지 아군끼리 소모전을 하면 되는가"라고 되묻고 "각자의 구역에서 경쟁력을 갖추어 맞는 전략을 세워야지 텃새를 부리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군끼리의 소모전'이라는 s목사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런 현상이 애시당초 아군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을까요? 참으로 대단한 '개그'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 개혁에 생사를 건 인기 절정의 교회 가운데 한 교회인 N교회가 교회 개혁의 일환으로(?) 교회를 4개로 분립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수지에 있는 상가 건물을 임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교회들에게서 위의 내용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N교회 측에서는 자신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으니 계획대로 그곳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그들이 교회에 높이 달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십자가가 정녕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인 하나님 나라임을 표시할 수 있겠습니까? 벗어나도 너무 멀리 벗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불충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도 어떻게 하실 수 있는 방도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말을 맞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더욱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십자가들을 바라봅니다. 그 십자가들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그리스도인의 고민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3) 지금은 사도 바울의 이 마음을 가지고 모두가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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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교회 성도님들이 이 시대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로 세상에 빛을 비쳐주는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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