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청파공동체 옆에 있는 성서한국공동체? 2010년 05월 08일
작성자 06년 공개논쟁
비합리성과 모순 속에서도 기독교를 지키는 이유
류상태 목사 글에 대한 비판
입력 : 2006년 03월 16일 (목) 18:21:55 [조회수 : 6792] 구교형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초등학생 그 철없던 시절에도 저는 모든 종교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종교가 있어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는커녕 서로 옳다고 싸우며 오히려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대학시절 철학을 전공하면서 저는 신이 결코 全知? 全能? 全善한 분이 아니라는 철학자들의 논증을 배웠습니다. ‘만약 신이 모든 것을 안다면(全知), 그는 인간의 타락을 알았을 것인데 타락을 못 막은 걸 보니 전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하다면 그는 전능(全能)하지 않다. 타락을 알면서도 막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지하고 전능하다면 그는 알면서도, 그리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인간의 타락을 막지 않았기에 결코 선한(全善) 분이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 생각들은 논리적이고 명쾌하긴 했지만 말의 장난처럼만 느껴졌습니다.

그 후 위대한 휴머니스트 버트란트 러셀이 쓴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나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 같은 글들을 접했을 때도 똑같이 피타고라스 정리를 완성한 듯 논리적으로 명쾌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2%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글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사이에 먼저 분명히 할 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생각, 판단, 느낌, 경험 등 모든 것이 중요하고 존중되어야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명백한 한계가 있어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통해야만 하고,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석된 성경의 이해 속에 있다고 믿는데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믿음 속에는 그것을 좇아 사는 삶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저는 류상태 목사님의 글을 접할 때마다 (다소의 성경관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우선 계시를 판단의 기초로 삼기보다는 “내가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또는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겠느냐?”는 자기 판단이 늘 앞서고 그 판단에 따라 성경구절을 대입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한때는 저도 류 목사님과 같은 ‘상식적인 하나님’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엄연한 인격이시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존재하는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출발이 같았다고 같은 결론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류상태 목사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다 같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부터 출발했고,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으나 훌륭한 선지자로는 존중하니 큰 차이가 없는데 유독 기독교만 다른 종교를 나쁘게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면 결코 그런 주장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슬람교도 유일신 여호와(알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하나로 본다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다른 선지자들이나 마호메트 같은 위대한 스승 중 하나로 믿는 게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차이일까요?

또 기독교도 유대교와 한 뿌리에서 나왔고, 유대교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같은 히브리 성경을 갖고 있다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히브리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국 한편은 그리스도로 믿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아둔한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단아로 여겨 처단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주장까지 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꼭 죽이려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빌라도도 그저 적당히 때려서 놓으려고 했을 뿐이니까요. 그러나 40세도 채 안된 새파란 젊은이가 아브라함을 만났다는 둥,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둥 하나님을 자칭하는 참람한 말들을 내뱉을 때 더 이상 살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선생님이나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 아니라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마 16:13~20) 그러므로 그 분을 야훼라 부르든, 여호와라 부르든, 알라라 부르든, 한울님으로 부르든 예수님을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현현)로 인정하지 않는 신관은 결코 같은 신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들의 차이가 단지 부르는 이름(명칭) 만의 차이였다면 처음부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고대인들은 머리가 덜 깨어서 그 사실을 몰라 서로 싸웠으나 현대인들은 그걸 깨우쳤으니 모두가 자기 방식대로 신을 섬겨도 좋다는 식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명칭이야 뭐라고 부르든 복음이 가르치는 “그런 하나님은 있습니다.” 구약은 같은데, 신약에서 틀려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을 다르게 믿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는 인정해 주십시오.

죽었다 깨나도 다른 것은 다른 것입니다.

다만 다르다고 해서 서로 물리력이나 강제적 힘으로 자신의 신앙을 강요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건 진리 그 자체의 성격이 아니며, 진리의 수준(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야만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심지어 복음 전한다는 그 어떤 명목으로도) 전쟁과 물리적 폭력이나 정치권력을 통한 종교적 강요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류 목사님이 대광고에서 보여주셨던 행동을 대부분 지지합니다. 다른 것을 다르다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폭력으로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되고, 복음을 복음답게 진리의 싸움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분명히 묻고 싶습니다.

류 목사님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과 폭력을 고발하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자체가 싫으신 겁니까? 전자라면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후자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신다면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요즘 한다하는 지성인들이 앞장서서 화해를 부르짖으며 종교 간의 경계를 허물어간 소식들을 아름다운 미담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너무 기독교적 우월주의에 근거한 배타성이 폭력을 불러왔기에 그 필요성은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노파심에서 두려운 것은 너무 서둘러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싶어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차이를 억지로 없애고 무조건 “하나다”, “똑같다”라고 외친다고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성인 남자들에게 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민주주의요, 가족 이기주의가 없어지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는 있습니다.

성경은 초월자 하나님의 마음을 피조물인 인간에게 전하기 위해 주신 눈높이 교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피조물인 사람이 아무리 용을 쓴들 존재가 다른 하나님의 심정(하늘의 비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눈(雪)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열대지역 사람에게 눈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같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가피하게 하늘의 언어가 아닌 사람의 언어(히브리어, 헬라어)로 당신의 심정을 표현하게 하셨으니,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언어방식으로 본다면 오류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우리를 배려하신 ‘하나님의 의도적 오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라고 해도 맞고, 사람의 책이라고 해도 맞는 것이지요.

성경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입니까? 동의합니다. 그러나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우리에게 주기 위한 교훈만을 목적으로 지어진 상상이나 교훈집이 아니라 사실(역사)을 바탕으로 쓰인 피와 살을 담은 책입니다. 물론 이 말도 쓰인 그대로 사실성과 꼭 부합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의 사실은 당시의 시대적 언어풍습, 과장, 비유 등 앞서 말한 의도적 오류를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모든 경전들을 성경과 비교해 살펴보십시오. 전자는 역사적 사실성 자체가 그 교훈을 이해하는데 직결된 필연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석가모니께서 “모든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생각하고 바라밀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大品般若 習應品)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러한 교훈은 꼭 누가, 언제, 어디서 말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용 자체와 누가, 언제, 어디서, 왜 그렇게 말하고 행했는지의 사실성이 필연적으로 중요한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것은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얼핏 보면 모순투성이고, 때로는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기에 충분한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모순들을 논리적으로 없애버리고 깔끔하게 편집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더 역동적이고,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어울리는 서술방식이 아닐까요? 얼마나 멋집니까? 다른 경전들이 더 품위 있고 고고해 보이기는 하지만 인간적이지는 않습니다. 동양의 경전들이 철학의 언어라면, 성경은 역사의 언어, 시장의 언어입니다. 성경은 죄인인 인간의 상태를 그렇게 품위 있고, 고고하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이 그려진 것이로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한 시대의 역사를 바탕으로 쓰인 것이기에 우리는 모든 시대마다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그저 문자대로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류상태 목사님도 하나님이 성경의 문자 속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철학과 논리 속에 갇혀 그 논리에 따라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과연 무엇일까?

류상태 목사님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구원관(전통적인 기독교의 구원관)을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진실하고 착하게 살아도 단지 예수 믿지 않았다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이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요, 예수님의 교훈이겠느냐?”고 항변합니다.

심정적으로는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저 역시 나면서부터 굶주리다가 한 번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숨져가는 서부 아프리카의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창백해 보이는 구원관과 예정교리를 얼마나 부인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며, 그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알게 되겠지요.”(고전 13:9~12)라고 기꺼이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성경이 결코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에, 성경의 단순화요 요약화인 교리 자체도 당연히 하나님의 총체적 비밀 가운데 담지 못하는 오류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내가 잘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런 교리는 틀린 것이다”라고 간단히 해 치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이나 교리와는 상관없이 제 스스로 알고 있는 확실한 한 가지의 사실이 있다면,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의로 구원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른바 ‘교회개혁’이라는 걸 외치며 사람 같지 않은 목사들을 앞장서 욕하는 사람 중 하나이지만, 양심껏 고백하건대 그들과 제 사이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도 없습니다. (제가 감히 양심자를 대변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제법 저도 한다고는 하는 사람인데) 그러므로 저는 사람이 선행이라는 것(착하다는 것)을 통해 구원받아 마땅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믿지 않습니다. (롬 3:9~18) ‘선행이나 어떤 인간적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 얻는 구원’을 저는 교리 이전에 제 삶으로 인정하게 되는 성경의 진리가 되었습니다.

또 목사님은 “아무리 진실하게, 착하게, 사랑하며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것 때문엡”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표현은 예수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마치 ‘그까이꺼’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 해 치워버릴 수 있는 내 능력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성경은 참 대단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어떤 생각, 어떤 이론도 뽑아낼 수 있고, 그걸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분리정책도, 이슬람세계를 초토화하려는 부시의 패권정책도 모두 성경에서 그 정당성을 찾아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성경 속에서 율법박사로 돌변한 엉뚱한 예수를 그려내듯이, 흔히 말하는 자유주의자들도 성경을 통해 인간 스스로 하나님도 결정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무조건적 해방자 예수를 만들어 내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우주와 역사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창 2:16, 17↔3:4~6, 22)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의 문자주의의 폐해는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보수주의자’들이 마치 자기들만 하나님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성경 몇 구절과 교리를 근거로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하려는 것이 망령된 일인 것과 똑같이,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이 제 멋대로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고 규정짓는 것도 주제넘은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들일만한 내용만 자애로운 하나님의 말씀이요, 뭔가 이해하기 어렵고 껄끄러운 내용들은 다 사도들이 조작한 것이거나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문제를 제거하는 방식은 옳지 못합니다. 믿을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 복음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건 아마 호랑이는 갖고 싶은데 위험하니 이빨과 손톱 다 빼고 잘 길들여 덩치 큰 고양이로 만들어 기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한 종교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복음(진리) 자체와 꼭 일치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종교나 사상에도 분명히 참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놀라운 그림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참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가장 잘 담아낸(예수를 우리가 의지해야할 구원의 근거, 그리스도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종교가 또한 기독교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온갖 불합리함과 모순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떠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신앙고백입니다.

(이 글은 <당당뉴스>와 <에큐메니안>에도 기고했습니다.)

구교형 (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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