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토머스 머튼의 관상 사상의 발달 2010년 05월 02일
작성자 박운양
 <토마스 머튼의 관상 사상의 발달> 

 

 

        

        요즘 한국에서 토마스 머턴에 대한 관심이 점점 증폭되는 듯하다.  그의 저서들이 속 속 번역되어 10여종에 이르고 있다.  데이비드 트레이시 (David Tracy)는 머턴에 대해 말하길, “20세기 미국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근거가 머턴의 관상 이해와 그로 인한 그의 영향력으로 기인한다고 본다.  머턴의 주장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희망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기도의 가장 순수한 형태인 관상 기도를 하여야 하며,  이 기도는 개인적인 영역의 관상뿐만 아니라 외부적 행동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머턴의 관상기도의 핵심을 요약하는 말로서 머턴의 본 명제를 이 논단에서 고찰코자 한다.

 

        머턴은 어린 나이 6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몇 년 되지 않아 아버지 마저 사별하게 되자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영국에서 공부하다가 미국에서 공부하며 영문학으로 문학박사 취득하게 된다.  성 보나벤투라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그 전부터 생각해온 수도원에서 자신의 생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마침내 1942년 12월 10일 켄터키주의 겟세마니에 있는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시토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문학을 공부한데다, 글쓰는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수도원 지도층의 협조로 많은 글을 쓰게 된다.  그 중에서도 1947년에 펴낸 <칠층산>이란 자서전의 예상치 못한 호평으로 머턴을 일약 세계적인 영성대가의 위치로 올려놓는다.  이 책은 머턴의 어릴 적과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내적 영혼의 갈등과 사상적 순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머턴은 자신의 자서전이 일반 대중의 엄청난 호평과 많은 독자들의 편지를 받으면서, 수도원 밖의 세계와 사람들에 대해 그의 관심이 넓어지게 되었다.  많은 편지의 사연을 통해 수도원 밖의 사람들도 수도원 사람들처럼 영적인 갈증을 느끼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머턴의 저작을 살펴보면, 수도원에 들어간 후 첫 10년간에 쓰여진 글은 세상을 등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1942년 수도원에 들어 간 후부터 1952년사이에 머턴의 영성의 중심에는 세상을 포기하는 삶과 글을 주로 썼다.1)  머턴은 모든 영성적인 거룩의 중심에는 세상의 것에 대한 “포기, 분리 (detachment), 자기 부정에 있다“고 하였다.2)  세상의 삶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이에 대한 참여보다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관상의 불 가마 속에서 그리스도와 융합되어 하나의 영“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보았던 것이다.3)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세상을 등지고 보다 깊이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 수도원으로 그것도 가장 규율이 엄하다는 봉쇄 수도원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면 머턴의 관상기도 이해 변천의 과정을 살펴보자.


1) 초창기 관상의 이해.

 

         초창기 수도원 생활 기간에 머턴은 관상을 수도사들에게 국한된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관상은 경건한 수도단체의 구성원으로서 공식적인 관상생활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국한된 비밀스런 실재로 여겼다.  <관상이란?> (1948)에서 머턴은 세례받은 자는 관상의 생활에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기독교신자들은 지상에서 순수한 관상가가 결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4)  이런 견해는 서구의 전통적 관상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데,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관상이란 오직 한가지의 관상, 즉 “주부적” (infused, 나의 의지적 노력이 없이 외부에서 주입된) 또는 “순수한” 관상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상은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이들에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둘째 유형인 적극적 (active) 관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이 둘째 유형은 모든 사람이 의지적으로 기도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이 관상은 어떤 특정한 경험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적극적 관상은 기도자에게 내면 생활의 기쁨에로 초대하고,  하나님 임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머턴은 주부적 관상 만이 “관상”이란 용어의 참된 의미에 부합된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주부적 “관상” 만이 기도자가 하나님 속에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턴에게 있어서 적극적 관상은 오직 유비 (類比)로서만 관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5)

 

        머턴의 기독교인의 분류에 이런 수동적인 기도의 주부적 관상 우위 사고가 드러난다.  그는 기독교인의 내면 생활의 종류를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집단은, 피상적 (surface)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의 영성 생활은 몇가지 정규적 경건의 실천과 의무로서 참여하는 예배의 외적 행동들에 국한되어 있다.6)  둘째 집단은 類似 관상가들로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들의 생활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도생활은 관상의 가시덤불로 인도되기에 관상의 꽃을 피울 수 없다.  머턴은 셋째집단을 “참 관상가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노력없이도 쏟아 부어주시는 주부적 관상의 은혜를 소유하고 있다.  참관상가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들 삶의 전반적인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머턴은 이처럼 초창기 수도원생활 10여년 동안 주부적 관상을 활동 관상보다 우위에 놓았다. 그래서 진정으로 관상생활을 원하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려는 사람은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속 속의 신도들은 그들이 아무리 신앙심이 깊고 사랑의 삶을 살며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다고 해도 주부적 관상의 은혜 속에 사는 것과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관상 이해의 일상성 회복기: 십년 이후의 기간.

 

        머턴에게 있어서 행동적 국면이 의미를 갖는 관상 이해는 그의 수도원 생활의 두번째 십년기에 나타난다.  수도 생활 후반기의 글들에서,  머턴의 관상에 대한 사상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1959년 7월 4일, 머턴은 테레사 렌트포우어 (Therese Lentfoer) 수녀에게 쓴 편지에서 말하기를,  “그 책 [1948년에 관상에 대해 쓴 책인 <관상이란 무엇인가?>]은 나에게 매우 불만족스럽습니다.  당시에 나는 너무 피상적이었고, 너무 머리의 수준에 머물렀던 같습니다.  또한 삶의 전체성과 통전성을 경시하고,  관상을 이해하는 면에도 일종의 천사주의 (angelism)에 맞췄던 것같습니다.“7)  이 글은 자신의 관상이해가 편협하고 일방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으며 엘리트 위주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관상의 의미에 대해 길고도 체계적인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959년에 쓴 글 "내적 체험: 관상에 대한 고찰“ (The Inner Experience: Notes on Contemplation)로 자신의 결심을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자신이 1948년에 쓴 <관상이란 무엇인가?>을 수정하고져 하는 의도였다.  왜냐면 머턴 자신이 쓴 영성적 글들이 수도원 밖의 세속 속의 신자들뿐 아니라 비신자들에게까지 큰 호응을 받는 것에서, 이들 속에 하나님을 찾는 영적 갈급과 간절함이 있으며, 이들의 심령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순수한’ 즉 주부적 관상은 수도원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수정하게 되었다.

 

        머턴의 새로운 관상 이해에 의하면, 참 관상가의 조건에 행동과 관상을 구분하지 않는다.  관상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필수적이라고 보지도 않았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상적 (regular) 생활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수도원적 훈련은 외부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완전주의적인 관심에서 해방시켜주는 한에서만 분명한 유익이 된다.”8)  외부적인 자극이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수도원 밖이든 안이든 누구나 관상가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세상 속의 일상적 삶에 대한 적극적 긍정이 담겨있는 것이다.

 

        머턴의 이같은 관상이해는 무엇보다도 인간 생명의 원천에 대한 각성이 돋보이고 있다.  관상은 우리의 생명과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으나 풍부한 원천에서 유래되고 있는 실재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9)  이 원천은 인간 이성의 영역으로 따져 이해될 차원을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에 가까운 앎의 상태이다.  그래서 머턴은 관상이란 인간의 지성뿐만 아니라 영성 생활의 최고로 높은 표현으로 보았다. 

 

        머턴에게 있어서 관상을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체험”으로 본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비한 어둠 속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유사(類似) 체험적 지식인데, 이를 통해 심령 깊은 곳의 자기 (the self)에게 빛이 비추이는 것이다.  관상을 체험이라고 해서, 즐거움, 쾌락, 평화, 행복같은 경험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영적 사랑에서 나오는 자유한 가운데 경험하는 실재와 진리에 대한 초월 체험”이 중요하다.10)  감정적인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인 초월적 실재에 대한 기도자의 주관적 인식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또한 기도의 경험에서 기도 뒤에 오는 가슴으로 느껴지는 감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으로 느끼는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관상에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머턴은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만족함 (gratification)이나 쉼 (rest)과 같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깨달음 (awareness), 생명, 창조성, 자유함”같은 정신적인 것이 고귀하다고 말한다.11)  자유함, 충만한 생명력, 함양된 창조성,  실재에 대한 각성 등은 높은 정신적인 활동태로서 성령의 활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관상을 통해 실제적으로 신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가장 역동적 확증인 것이다. 

 

        머턴은 관상 속에는 하나님이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관상은 어둡고 일상적인 만족 속에서 나타나는 단순히 졸립고 온순하고 안식적인 존재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무를 뚫고 들어오는 신적 존재의 번갯불이 번쩍이는 섬광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이거나 추상적이지도 않으면서 역설적이게도 구체적이고 독특하고 실존적이다.  관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대면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악을 대면한 것과 같다.  그러기에 관상은 인간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깨우는 것이며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는 것이다.  관상은 깊은 심층의 자기 속에 어둠과 악을 이기고 신적 자유와 진리가 승리하여 자리 잡게 하는 일이다.

 

        이상과 같이 머턴의 수도원 생활의 10년이 지나면서부터 『새 관상의 씨』와 「내적 체험」의 글들에서 보는 것처럼,  ‘순수’ 또는 주부 관상의 제한된 엘리트주의적 이해로부터 세상 속의 일상성 회복과 균형을 이루고져 하였다.  그럼으로 세상적 삶의 요소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성숙한 관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3) 세상 속의 관상 생활

 

        머턴은 주부 관상과 활동 관상 둘 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적 체험」에서 수도원적 관상을 먼저 언급한 후, 평신도 관상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것을 중심으로 다룬다.

 

        머턴은 고독과 침묵이 관상생활에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당시 고도로 사치적인 것이 되어 오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한계급인 부자들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머턴 자신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머턴은 대다수의 일반 대중은 각각 자신의 상황에 따라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적응하면서도, 이 정황을 잘 이용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자신의 삶의 정황을 잘 파악하여 그 속에서 영적인 면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머턴의 이 권고는 수도원 안에서나 밖의 세속 생활에서도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특별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사업과 영성적인 것, 둘 다 중요시해야 한다. 그래서 머턴은 관상생활을 원하는 성도는 수도사나 세상 속의 사람들에게든 다음의 2가지를 꼭 지키도록 조언하였다. 


        첫째, 세속적인 일과 세상과의 접촉을 끊어서 가능하면 자신의 삶에서 갈등과 불만을 줄이라.  이것은 쾌락과 위로, 여가, 특권과  성공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줄이고 영성적 가난과 분리의 생활을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자신의 기분을 흔들어놓는 소음,  짜증남, 북적거림, 시간이 모자라게 하는 불가피한 갈등은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수도원 안에서조차도 존재하는 순전히 세속적  정신과의 갈등을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12) 


        먼저 불만과 갈등을 줄이도록 노력하라는 권면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에나 갈등이 일어날 수 있기에 불가피한 경우는 참고 인내가 필요하다는 현실적 조언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불가피한 현실적 삶을 인내하며 살라’는 권면은 머턴을 현상 유지적 경향의 사상가로 분류될 위험을 안고 있다.  영적 면을 강조하다 보면 그런 위험은 항상 따라다니게 된다.   

 

        머턴은 세상 속의 하나님 백성들의 활동은 “가면을 쓴 관상” (masked contemplation)이라고 했다.  가면을 쓴 관상가들은 일시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에서 해방받은 이들로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뜻에 내맡김으로써 “거룩한 무관심”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이다.13)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머턴은 세상 사람들이 ‘가면을 쓴 관상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시나 마을에 살면서도 영원과 연결되는 내적 갱신의 시간을 갖고,  주일을 지키며,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고,  결혼을 성스럽고 상징이 담긴 행동으로 여겨 영성적으로 생각하고 살아 감으로,  외모는 세상 사람과 같은 탈을 썼으나 내면은 관상가의 삶을 살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겸손과 순종, 자기 불신, 신중, 무엇보다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는 가운데 성령의 임재에 의하여 인도받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가 된다.14)  이와같은 가면 쓴 관상가의 겸손과 믿음의 영성적 삶을 살려는 노력 가운데서 영성적으로 중요한 두 국면인 관상과 행동 양쪽이 균형을 이루는 통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15)  이웃 사랑과 같은 외적 활동은 내적 생활을 위한 자극제로서 필요한 요소이지 결코 위험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머턴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있는 관상생활은 주변의 일반 대중들과 함께 사는 남녀의 소집단 속에서 찾고 있다.16) 이들은  60년대 당시 가난한 빈민촌에 들어가 세상 속에서의 삶과 가난을 관상의 중심에 두었다.  이들이 지향하고져 하는 고귀한 정신과 희생은 모든 이의 영성적 삶에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 일 선상에서 막스 사상을 해석하고 있다.  대학 시절에 마르크스 사상에 한동안 심취했던 머턴은 막스주의자의 기독교 비판에 약간의 타당한 면이 있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역사관에는 수동적인 면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머턴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주관성과 개인주의에로 숨어버린 관상은 부르조아 영성의 부산물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반대하여 단순한 행동주의로 반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17)  ‘단순한 행동주의’에 대한 머턴의 이해는 눈 앞의 현상적 일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의미로 보는 듯하다.  행동은 목전의 현상에도 적절성을 가져야할 뿐 만 아니라 그 행동이 지향하는 궁극과도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머턴의 입장에 타당성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행동주의 일변도로 치닫는다고 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머턴의 노파심은 일면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필자가 서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머턴을 바라 볼 때,  머턴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원론적인 타당성을 인정하다고 해도 그가 삶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소박하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의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인 핵과 공해,  자원고갈, 인구문제와 기아,  세계화로 인한 빈부 고착화의 심화 등 어느 문제 하나 간단하지 않은 매우 복잡하다는 데 있다. 한국과 같이 제1세계에 속한 나라들로부터 제반 압력을 받아야 하는 3세계에 속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당면한 우리와 세계의 문제에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복합성과 그리고 그 실재 뒤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손길에 인간이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정교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적절하고 현실감있는 관상이론이 요청된다. 

 

        이런 의미에서 1960년대에 우리에게 보여준 머턴의 영성적 가르침은  전통적 관상 이론에서 진일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이란 상황적 시점에서 다시 한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4. 나가는 말

 

        머턴의 관상 사상은 그의 수도원생활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성숙했다.  이런 변화는 현실의 세속 세계에 대한 시각을 더욱 넓게 한 데서 기인한다.  그 결과로 그의 관상 이해는 세상으로부터 도피와 분리보다는 세상 속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포용하게 되었다.

 

        머턴은 관상을 인간의 삶에 핵심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관상은 인간을 존재케 하는 근원의 실재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이런 체험은 인간 삶에 지향성을 갖게 하고, 삶을 풍요롭고 의미를 제공한다. 

 

        머턴의 관상은 이웃, 세계, 그리고 인간 사회의 악으로부터의 자신을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행동은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과 자발적인 공동적 협력을 도모하는 것이다.  오늘을 위한 기독교 관상은 인간과 정의를 위한 비이기적인 동기로서 인간의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머턴의 관상이론인 기도론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원칙적 태도 위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복합적 성격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관상이해가 절실히 요청된다.  왜냐면,  하나님과의 일치적 임재의 관상이 우리의 삶의 근본적 토대가 되지만,  실제 삶에서의 부닥치는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는 문제의 구체성에 대한 포괄적 인식과 적극적 대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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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냥전도사(10 05-02 11:05)
김기석목사님의 세속성자이 강좌중에서 토머스 머튼이 들어 있었던 것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검색을 하다가 만난 자료입니다. 현재 제가 보고 있는 인싸이트를 받고 있는 토머스머튼은 칠층산을 벗어 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 실존의 한계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소중한 글이어서 업로드합니다. 차한잔 음미하시면서 읽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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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구냥전도사(10 05-02 11:05)
존 밀턴과 토머스 머튼을 문학적으로 기독교신학적으로 비교하면서 연구하는 작업이 제 동창이 연구하고 있는 영국의 에딘버러에서는 엄청활성화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다석 유영모선생님에 대한 영문연구가 가장 폭넓고 깊게 이뤄지고 있는 곳이 에딘버러 대학교다 보니, 저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서야 20세기의 천재들에게서 인싸이트를 빌리자는 자기고백이 터져나오고 있는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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