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성서학당 10 - 시간 중심의 하나님 2009년 11월 24일
작성자 성서학당

성서학당 열 번째 강의의 핵심어는 시간 중심의 하나님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장소에 계시는 장소 중심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어디를 가든 함께 하시는 시간 중심의 하나님임을 성서를 통해 돌아보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일상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야 하신다고 멋지게 마무리해 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이 60만명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부풀려 진것입니다.

그 때 당시 이집트에 있던 사람들이 60만명도 안되었습니다.

법궤 이전에 하나님을 상징하는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법궤가 등장하면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사라집니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의 하나님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등장하면서 하신일은 억압당하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출애굽에서 중요한것은 제국의 압제와 싸워 이기는 승리자의 하나님입니다. 10가지 재앙 이야기는 바로가 지배한 전제정치로부터 평등한 삶을 지향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볼수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아말렉 전투.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냥 그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아말렉이 허락을 안합니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지지요. 모세는 두팔을 들고 있습니다. 아론과 훌이 받치고 있고요. 손은 깃발을 의미합니다. 야훼의 기를 상징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고대에서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전쟁 때마다 법궤를 들고 다녔습니다.

주전 1050년에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깁니다.

 

종교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통합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한것은 시내산에서입니다. 민족으로서의 계약은 시내산에서입니다. 시내산 계약에 하나님의 일방적 계약이 아닌 백성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양한 인종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야훼 하나님입니다.

다윗의 권력 기반은 남쪽 지파입니다. 불안정했지요.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것은 하나로 묶는 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모셔오기로 결정을 합니다. 다윗이 종교를 권력으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누가 종교를 장악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종교가 한곳에 집중되어서 잘 되었나요?

지방 성소들이 폐소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로 가는 사람들이 불편해집니다. 예루살렘까지 가야 하니깐요. 권력이 예루살렘으로 집중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체제

1. 지방성소 폐쇄

2. 권력(종교가 있는 곳에 권력 있음)

 

옛날에 성소는 다듬지 않는 돌로 하라고 합니다.

인위를 가하지 말라는 뜻보다도 그들의 기억속에 이집트때 강제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노동력을 들여서 만들것 없습니다. 신물나는 노동체험이 반영되어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축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돌로 만든 건축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성전 밖에는 없습니다.

돌하나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성전을 만들면서 우상을 만든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대해서는 좋게 여기는 사람, 나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7: 1~6

주님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에게서 다윗왕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으므로 왕은 이제 자기의 왕궁에서 살게 되었다. 하루는 왕이 예언자 나단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항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안에 있습니다.” 나단이 왕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슨일이든지 계획하신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바로 그날 밤에 주님께서 나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주가 말한다. 내가 살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나단이 더 이상 하나님께 안 물어 봅니다.

왕의 뜻대로 하라고 합니다. 누가 내 집 지어달라고 했어.. 두가지 상반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입장들이 있었습니다.

 

왕조 신학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맺은 언약은 노아와 맺은 언약입니다.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약속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여기에는 피조세계도 포함이 됩니다.

두 번째로 맺은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에게 미칠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피조세계가 빠져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시내산에서 모세와 맺은 언약입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 하나님이 축소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말입니다.

 

사무엘하 7: 11절

내가 너를 너의 모든 원수로부터 보호하여서 평안히 살게 하겠다. 그뿐만 아니라 나 주가 너의 집안을 한 왕조로 만들겠다는 것을 이제 나 주가 너에게 선언한다.

 

사무엘하 7;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사무엘하 7;15

내가 사울에게서 나의 총애를 거두어 나의 앞에서 물러가게 하였지만 너의 자손에게서는 총애를 거두지 아니하겠다.

 

그러면서 왕조 신학이 세워지게 됩니다. 타락이 심화되는 과정이지요.

왕이 잘못해도 뒤집어 엎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깐요...

이것이 반영된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과 갈등이 심할 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환경에 놓이자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종을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

합니다. 이것이 왕조 신학이 반영된 것입니다.

 

제일 나쁜 신앙은 겁을 주어 옴짝달짝 못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종교 교육할 때 가부장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셔..’ 라고 겁주는 것입니다.

 

왕조 신학이 세워지면서 뿌리가 되는 것이 법궤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바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어여삐 여기시고 복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화 속에서는 교회를 지어 바치는 모습이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을 마음을 가져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복을 주셨다는것이 성경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이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전 신앙은 장소 중심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장소... 장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만날려면 그곳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큰 돌밑에서 했지요. 신성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백성과 함께 가십니다. 이것이 야훼 신앙의 독특성입니다.‘내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지요. 출애굽의 하나님은 함께 가시고, 앞장 서서 가시고, 이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분이십니다. 시간 중심의 하나님이신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장소로 회막을 칩니다. 다윗 왕조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성전으로 집중됩니다. 성전 옆에는 왕궁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죠. ‘ 내가 대대손손 잘되게 해주겠다.’ 왕들에게 부속된 것입니다. 왕궁을 예루살렘으로 종교가 귀속되면서 퇴화하게 됩니다. 예언자들도 등장합니다. 왕의 뜻대로 이야기 해주는 예언자 이지요.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사야.... 에스겔등이 그랬습니다.

왕들은 듣지 않습니다. 종교가 권력과 결탁될 때 어떠한 일이 벌여질지 보여줍니다.

종교와 권력이 손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타락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신학은 왕실에 부속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남북 왕조로 나뉩니다. 북왕국은 쿠데타가 9번이나 일어납니다.

북왕국은 북방의 강자들 때문에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반대로 남왕국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왕조 신학때문입니다. 왕을 함부로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이야기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성전 신학이 되다보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야훼 신앙의 본래적 가치가 사라졌습니다. 성전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 야훼 신앙의 가치입니다.

 

이사야 1;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이사야 1장 전체가 외식하는 종교 행위가 번성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행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6;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최승기 씨가 교회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동 세탁기‘ 라고..

죄짓고 교회 와서 깨끗이 빨아 입고...

종교가 장소에 집중되면서 일상 속에서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상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일상 속에서 구현하며 사는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뭘까요? 방하착(放下着)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시행착오도 겪지요. 자기속에 있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건강함은 야단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종교가 정치의 관계에서 좋은 것은 종교가 정치에 대해 야단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상생의 관계의 자리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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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지기(09 11-27 06:11)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에 성서학당을 갈 수 없어 많이 안타까웠는데 매주 자세하게
올려주신 글때문에 그곳에 가서 듣는 듯 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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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준(09 11-27 11:11)
직장인들은 참여하기 어려운 학당을 이렇게 지상 중계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마치 강의에 들어가 있는 듯 자세한 내용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성서학당을 통해서 성경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성경을 읽는 또하나의 시각을 얻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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