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성서학당 9 - 내려놓음 2009년 11월 13일
작성자 성서학당

성서학당 아홉 번째 강의의 핵심어는 내려놓음 입니다.

지도자들(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여로보암)의 욕망으로 희생된 민중들의 피폐해진 삶을 성경을 통해 돌아보고,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내려놓지 않으면 같은 일들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게되는 값진 교훈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무엘 하 8: 1-22

위의 장에는 다윗이 주변 나라를 정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을 참조하십시오. 여기서는 말하고자 하는 내용만 뽑아서 메모하겠습니다.

 

삼하8;2

다윗은 또 모압을 쳤다. 그는 모압 포로들을 줄을 지어 세운 다음에 그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매 석줄중에 두줄은 죽이고, 한줄은 살려주었다. 모압 사람들은 다윗의 종이 되어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삼하8;6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주둔군을 두니, 시리아도 다윗의종이 되어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삼하 8;13~14

다윗은 돌아오는길에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사람 만 팔천명을 쳐 죽이고 이름을 떨쳤다. 그때에 다윗이 에돔에 주둔군을 두기 시작하여서 온 에돔에 주둔군을 두니 마침내 온 에돔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었다. 다윗이 어느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사무엘하 8장에 드러난 다윗은 어떠합니까?

모압사람 이었다면.... 에돔 사람이었다면....

주님께서 승리를 안겨 주었다는것이 그릇된 것입니다.

예수님이었다면 이렇게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성군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였다. ~죽였다... 모압을 죽이는 모습은 끔찍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석줄로 세우고 두줄은 죽이고 한줄은 살려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시켰을까요?

열왕기상하, 역대상하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주변사람들을 어떻게 했는지 나옵니다.

다윗은 주변 세계와 많은 충돌을 합니다.

 

다윗은 대국을 이루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에 엎드리게 해서 석줄로 세워 두줄은 죽이고...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매치가 안됩니다.

이것이 부족적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못할 짓하면서 하나님은 우리편이야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릇된 신앙입니다.

다윗은 가는곳마다 이방 민족을 학살했습니다. 에돔 사람 1800명을 죽이고 남자의 씨란 씨 다 죽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잡혀갈 때 에돔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가족들이 흘린 피의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에돔에게나 모압에게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일까요?

다윗왕이 정복전쟁을 열심히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왜 그렇게 전쟁을 벌인것일까요?

그것은 영토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에서 땅은 사고 팔수 없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땅을 얻으려면 정복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왕실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재정 충족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주변나라들이 다윗 왕조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다윗왕조는 내부에서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두 번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는 압살롬입니다. 세력을 곤고히 하기 위해 정략 결혼을 한것이 배다른 자식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하지요. 그 이면에는 왕자들 사이에 치열한 겨루기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압살롬은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북쪽 지파(사울지파)에 갑니다. 압살롬 외가는 북쪽 지파에 살고 있었습니다. 북쪽 지파 사람은 압살롬에 대해 동향인 같은 의식을 갖게 됩니다.

압살롬이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다윗편에 선 사람이 다윗의 용병부대를 제외하고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왕조에 대해 미화하고 있지만, 민중들은 대단히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윗주변에는 용병부대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에 강한 것은 용병부대입니다. 용병부대가 압살롬을 제거합니다. 그때도 다윗은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말립니다. 부정적인 모습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미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은 다윗은 외적으로는 치적을 이루었지만 민중들에게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바의 반란입니다.

삼하 20;1-2

그 즈음에 불량배 한사람이 그곳에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세바였다. 그는 비그리의 아들로서 베냐민 사람이었다. 그는 나팔을 불면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얻을 몫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이새의 아들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아 모두들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자!”

 

베냐민 지파는 사울지파입니다.

세바를 지칭하는 말이 불량배입니다. 반란을 일으켰으니 역사가 이렇게 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다 다윗을 버리고 세바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세바의 선동이 먹혀든것은 세바와 심정이 똑같았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에게 남은 것은 유다 지파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던 그 당시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 즉, ’로마의 평화시대‘ 라고 했습니다. pax는 peace와 같습니다.

팍스 로마나의 뿌리는 이렇습니다.

그들에게 종교가 있습니다. 그들의 신이 있지요. 신에게 치성을 받칩니다. 그들이 신에게 구하고자 하는것은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합니다. 승리는 곧 정복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는 처음에 종교와 마지막의 평화는 똑같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샬롬이 오는 것입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과정이 달라집니다.

한눈에 볼 수있게 정리해 보면,

팍스 로마나(Pax Romana) - 종교-승리- 정복- 평화

←승리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종교 - 섬김 - 일치(하나님 나라 경험)- 평화

 

옥타비아 누스가 승리하고 정복하고 주변세계를 복종시켰습니다.

‘비아 에그나시아’ 이것이 로마길이다는 뜻입니다. 모든길이 로마로 통한다,

로마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줍니다.

이것은 전천후 도로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지 않는 도로입니다.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 도로를 만든 이유는 순종하지 않는 나라에 군대를 보내기 위해, 식민지로부터 걷어 들인 물건들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000천년 로마는, 산과 계곡을 뚫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역사를 바라보며 압도적인 힘이 있음을 주변나라에서는 보았습니다. 자연까지도 굴복시키는 나라다 라고...

제국의 왕들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볼때,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때 당시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해방자라는 용어는 아우구스투스에게만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그 시대에 황제에게 사용하던 용어를 그리스도에게 사용한 것이지요. 대단히 위험한 집단인 셈이지요. 그래서 로마의 체제아래에서는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받는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목숨 걸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제국의 담론을 해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가 하나님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성서가 얼마나 급진적인 언어를 쓰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성경은 그 당시에는 무서운 텍스트였습니다.

그 때는 목숨 걸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아멘합니다. 이것이 부족적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족만 사랑하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부족적 신앙은 우주적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문자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신이 들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다윗에서 솔로몬시대로 왕위가 계승됩니다. 솔로몬은 문화적 치적이 높았습니다. 솔로몬이 토목 공사를 벌려서 배불렀던 것은 일부 특권층이 누렸습니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 여로보암과 민중들이 르호보암을 찾아옵니다. (삼하12;3)

찾아와서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합니다. 르호보암은 생각해 보겠다고.. 사흘후에 다시 오라고 합니다. 르호보암은 민중들의 말을 들으라는 원로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무거운 멍에를 메우라는 젊은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르호보암은 백성들을 더 쥐어 짜야 한다는 말을 좋게 듣게 됩니다.

평등공동체는 완전히 망가지게 됩니다.

내 귀에 달게 느껴지는게 우리에겐 멸망을 재촉할 수도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독립을 선언합니다. 남북왕조가 분리되지요.

이것은 사울이 죽은 후부터 안팎으로 곪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쟁의 세금, 성전 짓는 조세부담, 피폐한 삶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단됩니다. 그 씨는 다윗과 솔로몬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의 골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의 위대한 업적을 만든다는것이 민중들의 피폐한 삶의 희생이라고 할때는 씁쓸합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으면 평등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로보암도 왕이 되자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한동안 말을 잃고 계시던 목사님께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내려놓는 연습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공감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요...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서 고통을 당한 민중들의 삶을 들었었더라면...

그렇지만 여로보암도 강한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분단이 되었지만 종교적으로는 분단이 되지 않았기에 북쪽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려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습니다. 자꾸 드나들다 보면 남쪽으로 갈것 같으니깐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도 성소를 만듭니다. 그것을 통해 부족 신앙으로 더욱 확고하게 갑니다.

자기가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여로보암이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부족적 신앙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족적 존재로 만들면 안됩니다. 여로보암이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면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생각이 예루살렘이 권력이 되어 독점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내려놓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종교가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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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지기(09 11-16 12:11)
요약 정리해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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