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그곳에 가고싶다-나무에 대한 기억 2009년 11월 13일
작성자 장혜숙

나무에 대한 기억

 

 지금은 입산 금지된 계룡산 속 숲에 파묻힌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숱한 나무들과 친구하며 놀았는데 나무에게 이름을 묻지도 않았고, 이름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나무 곁을 떠나 도시에서 사는 동안 옛 친구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주 어려서,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까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다.

나무를 껴안고 맴돌던 기억이 난다.

나무를 안았는데 두 손을 맞잡을 수 없었다. 손을 맞잡기 위해, 왼 손으로 나무를 꼭 안고 오른 손을 벌려 왼쪽으로 마구 돌았다. 두 손은 만나지 않았다.

다시 반대로 오른 손을 만나기 위해 왼손을 벌려 오른 쪽으로 돌았다. 아무리 돌아도 왼손과 오른손은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무를 껴안고 맴돌며 지내는 날들이 많았다. 그 때 한 아름이 넘던 나무들을 지금도 나는 품을 수 없다. 내 품보다 나무는 더 많이 자랐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 번 쯤은 그 곳을 찾아가지만 입산금지 팻말이 가로막아 살던 집에는 갈 수 없다. 집이 그대로 폐허가 된 채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주 오래 전에 폐가가 되어 흉물스럽다고 헐어버렸을 것 같다.

 

하루 종일 친구가 되어 놀아주던 나무들도 지금은 어느 나무들인지 알아볼 수 없다.

산으로 들어오는 긴 길을 따라 벚나무들이 주욱 늘어서있고, 절간엔 감나무가 많다. 껴안고 맴돌았던 나무들은 아마 벚나무들이었을 것이다.

내가 나무에게 들려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가 들어준 나의 숱한 이야기들은 나이테 속에 파묻혀 새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들을 수 없다. 다만 내 친구가 되었던 나무만이 나의 이야기를 듬직한 기둥 안에 품고 있다.

그 친구를 찾고자 기웃기웃 한창 서성이며 나무들 곁을 맴돌면 그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켜켜이 덮인 나이테 속에서 옛 이야기들을 꺼내어 들려준다.

그 이야기라는 것이 제대로 된 말도 아니고, 토막토막 끊어진 외마디 말들이지만 내겐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이다.

세상에 떠도는 기교 넘치는 환락의 언어들에 신물이 날 즈음, 친구가 꺼내 준 말도 안 되는 나의 유아어들은 나에게 몽환적인 행복을 선물해준다.

 

몽환적인 행복 -그것은 참 신비로운 꿈이다.

시간여행이 자유로운 꿈이다. 옛날과 지금의 분별이 없는 시간여행. 그 여행 중에는 미래도 살짝 끼어든다. 길고 짧음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시간여행. 눈 깜짝할 찰나에 수 십 년이 흐르고, 수 십 년이 흘렀는데 겨우 한 순간이 지났을 뿐인 그런 시간여행의 꿈이다.

꿈을 꾸는 동안 친구는 싱싱한 수액을 내게 수혈해주고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깨어난다. 덕지덕지 낀 세상의 때가 벗어진 몸, 무겁게 달고 다니던 욕심 보따리를 내려놓은 가벼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희망, 그렇게 나는 다시 태어난다.

내 친구 나무의 도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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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준(09 11-14 10:11)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도시에서 게임을 하며 유년을 자란 요즘 친구들은 과연 무슨 추억을 되내일까? 그리고 그 추억이 얼마나 아름답고 여운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유년이 더 아름다울 거 같다는 것은 저만의 편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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