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이해인 수녀님의 시 2009년 10월 09일
작성자 권혁신

 

 

 

딱 17일 다닌 회사에서 했던 업무 중에 하나가

'낭송하기 좋은 한국시 100편'의 시인들에게 게재 동의서를 받는 거였는데요.

그중에 이해인 수녀님과 안도현 시인님이 있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직접 쓰신 편지가 왔는데 생각보다 글씨가... ㅎㅎㅎ

그 편지에 동봉되어 있던 시 한 편을 함께 나눌까 하여 올려봅니다.

 

 

 

오늘을 위한 기도

 

기도로 마음을 여는 이들에게

신록의 숲이 되어 오시는 주님

제가 살아 있음으로 살아 있는

또 한 번의 새날을 맞아

오늘은 어떤 기도를 바쳐야 할까요?

 

제 작은 머릿속에 들어찬

수천 갈래의 생각들도

저의 작은 가슴속에

풀잎처럼 돋아나는 느낌들도

오늘은 더욱 새롭고

제가 서 있는 이 자리도

함께 살아가는 이들도

오늘은 더욱

가깝게 살아옵니다.

 

지금껏 제가 만나 왔던 사람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을 통해

만남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삶의 지혜를 깨우쳐 주심에

거듭 갑사드립니다.

 

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제가 더러는 오해를 받고

가장 믿었떤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쓸쓸함에

눈물 흘리게 되더라도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가는

인내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제게 맡겨진 시간의 옷감들을

자투리까지 아껴 쓰는

알뜰한 재단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할 일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슬기를 주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밖에는 없는 것처럼 투신하는

아름다운 열정이 제 안에 항상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제가 다른 이에 대한 말을 할 때는

'사랑의 거울' 앞에 저를다시

비추어 보게 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남과 비교하느라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오늘을 묶어 두지 않게 하소서.

 

몹시 바쁜 때일수록

잠깐이라도 비켜서서 하늘을 보게 하시고

고독의 층계를 높이 올라

내면이 더욱 자유롭고 풍요로운

흰 옷의 구도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극히 조그만 것이라도 다 기억하되

제가 남에게 베푼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것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건망증을 허락하소서.

 

오늘 하루의 숲 속에서

제가 원치 않아도

어느새 돋아나는 우울의 이끼

욕심의 곰팡이, 교만의 넝쿨들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하오나 주님

이러한 제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가는

꿋꿋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소서.

 

어제의 열매이며

내일의 씨앗인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는

어느 날 닥칠 저의 죽음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겸허함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나직이 외우는 저의 기도가

하얀 치자꽃 향기로

오늘의 저의 잠을 덮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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