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서학당 詩 감상 | 2009년 10월 0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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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장혜숙 | |||
작은 불씨- 고진하 초는 제 몸을 태워 어두운 방안을 환하게 밝히지만, 제 몸을 불사른다는 의식도 그 환한 빛을 남에게 비춘다는 생각도 없다. 그을음조차 없이 만물에 빛을 던져 만물을 양육하는 태양 또한 그러하니, 옛 사람들이 태양을 어버이처럼 떠받든 그 뜻을 알만 하지 않은가.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생의 진액(津液)을 다 쏟으신 이의 행위를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것을 스스로 사랑이라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 눈부신 사랑의 빛살 앞에서 사사로움에 붙잡혔던 나의 허물을 사르고 말없이 번져온 사랑의 들불, 그 작은 불씨 하나 가만히 내 가슴에 품어보는 것이다. 목사님 말씀; 신앙의 큰 적은 자기 의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노자 –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일로서 처리하며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이 거기에서 일어나지만 지배하지 않고,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성스러운 삶의 방식 – 功成以不居 (공성이불거) 나의 감상; 오랜 친구와 연애에 빠졌을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사랑은 하는 것이고, 정은 흐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흐르는 것은 막지 못한다는 생각.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정든 사람이 더 좋다. 나이를 먹다보니 사랑하는 것은 귀찮아질 때도 있는데 정은 점점 더 깊어진다. 사랑이나 정이나 구별할 필요없이 같은 말이기도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가끔 이 두 단어를 구분하게 된다. ‘사랑해야지’하는 결심은 하는데 ‘정들어야지’는 결심으로 되지 않으니 말이다. 사랑은 의식할 수 있는데 정은 무의식중에도 마구 제멋대로 흐른다. 어느 날, 내가 참 예수 정신을 온전히 따르게 되는 날,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웃과 정이 듬뿍 든 사람으로 살리라! 의식하지 않아도 정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되고싶다. 항상 희생의 상징으로 초를 노래하지만, 산소의 역할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산소는 제 몸을 나눠준다는 의식 없이 아낌없이 다 주고 있건만. 초를 태워줄 뿐 아니라, 우리를 살려주기도 하고. 산소 같은 사람, 초 같은 사람이 돼야지.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 - 고진하 불에 타면 한 줌의 재요 땅에 묻히면 썩어 한 줌의 흙인 것을 뭘 그리도 움켜잡으려 하십니까. 움켜쥔 주먹을 풀어 돌리면 낙원이 꽃피고, 지구 표피에서 얻은 것을 함께 나누면 훗날 그리로 귀환할 때 우주와 함께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값진 보화도 쌓이면 썩고, 재화에 눈 먼 이는 죽음이 다가와 그것을 털려 할 때 뼈아픈 후회밖에 없을 것입니다. 울면서 온 생을 웃으면서 가볍게 떠나고 싶습니까. 좀벌레가 쏠거나 도둑도 넘보지 못할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드십시오. ----- 나의 감상 ;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움켜쥐고 욕심내는 것을 재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돈, 금은보화, 이런 현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자기가 추구하는 것들 – 지식, 문화, 건강, 예술 등등 –을 집요하게 움켜쥐고 욕심내는 사람도 참 많은데, 이들이 기독교인이라면 단지 물욕이 없다는 것으로 옳바른 삶을 살고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배운 자는 사회를 위해서 지식인답게 살아야 하고, 건강한 자는 노동의 봉사를 열심히 해야하고, 천부적인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적재적소에 필요에 따라 그 달란트를 사용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는 자들은 그 시간의 일부를 사회에 내놓아야 한다. 세상에 물질에 욕심없이 청렴한 지식인들도 재주꾼들도 참 많다. 그런데 물질 외의 것은 전혀 내놓지 않으면서 자기자신은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았다고, 욕심없다고 할 수 있을까? 무덤에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돈이나 금은보화 만이 아니다. 몸도, 지식도, 재주도, 시간도, 그 무엇도 가지고 갈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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