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성서학당2- 평등공동체를 꿈꾸며... 2009년 09월 17일
작성자 목요성서학당

목요성서 학당에서 알게 된 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메모했던 내용들을

정리합니다. 제가 정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혼자 알고 있기가 아쉬워서요...

주의 은혜는 나눌수록 풍성해지잖아요...

그러면서 저의 머릿속에서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마음에 담아두려고 합니다.

 

이번 성서학당을 배우면서 화딱지가 난것은 이렇게 좋은 내용들을 찔끔찔끔 매주목요일에 2시간씩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욕심 같아서는 합숙훈련 받으며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거든요.

 

이번 두 번째 강의의 핵심어는 평등 공동체=나눔입니다.

평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에 대한 성경의 예화와 더불어 지금 현재의 삶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강요가 아닌 감동으로 마무리 해주셨습니다....

 

애굽에서 하비루(=히브리,민족개념이 아닌 하층계층을 뜻함) 들이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들은 민족 정체성이 없어서 구심점이 없었는데 야훼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탈출합니다.

그들이 꿈꾸웠던 것은 왕이 없는 세상이지요.

애굽에서 그들은 할당량과 강제 노역에 시달렸지요.

야훼 하나님께서는 하비루들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졌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그들의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백성을 도우시겠다고 하시지요.

밑바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살 권리를 회복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족이 나중에 국가를 이루고 그 국가가 나중에는 제국이 된다고 합니다.

국가에서 제국으로 갈수록 폭력이 증가.

반대로 제국에서 부족으로 갈수록 협동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꿈꾸웠던 것은 국가를 이루는 것이 아닌 국가를 부정하고 부족주의 형태 즉 평등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것이지요. (사사시대)

그때 당시 사사는 왕과같은 계급이 아니기 때문에 세습을 하지 않았지요.

사사는 일을 마치고는 평상시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대요.

기드온 이야기는 생략하구요...

 

정말 평등공동체가 가능한 것인가?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것을 꿈꿨어요.

평등 공동체를 깨뜨린 것이 욕심과 탐욕이라고 합니다.

예화로 든것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이신일.

(만나-광야에 자라는 관목들에 벌레들이 내놓는 진해가 새벽이 되면 기온이 낮아지면서 응고가 되는 것. 맛이 달콤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한사람이 한 호멜씩 일정한 분량이상을 거두어 들이지 말라고 이야기 하시지요.

만나를 거두어 들일때에 그날,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 들이라고...

굶주린 사람은 더 거두어 들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만나를 쌓아두면 다 상해서 먹지를 못하지요.

여기서 만나 이야기가 후손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것이 나누어 먹는 이야기.

나눔의 기적이랍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훈련시킨것이 많이 거두어도 남지 않게. 모자라게 거두어도 모자라지 않게... 서로 나누어 먹으니깐요...

나눔의 기적. 이것이 평등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지요...

엿새 날에는 이틀 분을 거두어 들이라고 하지요. 안식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안식이라는 단어가 세계 어느나라 말로도 번역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종교적인 모든 언어는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이 가능한데 안식은 오직 히브리어 뿐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은 안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시간속의 성소”

성소는 공간적 개념인데, 안식일은 수평적 역사 끝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날들에 영향을 주는 날이라고 합니다.

안식일(히브리어;사바트?제대로 쓴건가용??) 은 하나님을 생각하는날..

안식한다는 것은 우리 생의 근본이 무엇인지 돌아보는것이래요.

내 삶이 올바른 삶으로서의 소리를 내기 위해 하나님을 기준음으로 삼고 조율하는것이 안식이다.라고 하십니다.

결국 나눔은 하나님의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신앙에 대해, 믿음과 신뢰의 차이에 대해 말씀해 주셨어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진실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예)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심...

둘중의 하나는 예수님이니깐 걸으셨음이라고.. 회의론자는 말도 안돼..

오병이어도 예수님이시니깐 가능해라고...

사실에 대한 전달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전승해 온 사람들의 그 진실성, 진정성이 중요.

사실의 언어로만 바라보게 될 때 전승되어 내려오는 진실과 의미를 찾을수가 없게됨.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알려주고 있느냐로 접근해야 함.

신앙은 고백이고 해석이지 사실관계가 중요한 것은 아님.

만나 이야기에서도 중요한것은 나눌 수 있다는 것.

나눌수 있다는 것은 내일에 대해 염려 하지 않을 때 나눌 수 있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배울수 있음.

 

믿음은 내가 믿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내가 성령님을 믿습니다.

신뢰는 하나님은 나를 어려움속에 홀로 버려두시지 않을 거야. 라는 확신

신뢰의 바탕은 확신.. 신뢰하기에 그분에게 나를 맡길 수 있음.

결론적으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배운것은

1. 나눔. 2. 하나님 신뢰- 오늘을 살아가는 것

사람들은 내일이 불안하기 때문에 불안의 대용물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

 

 

이런 평등 공동체를 배신하는 일이 생김.

이스라엘이 8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여리고성 무너뜨린후 아이성 우습게 여기고 무너뜨릴려고 하다가 패배함. 이유는 아간이 전리품을 챙겨서...

진멸해야 하는 것을 전리품으로 사유화한 것임.

신에게 바치는 방법은 불태워 없애는 방법- 아간이 사유화함.

그 전리품이라는 것이 시날산 털외투, 500세겔의 은, 금을 숨김.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평등 공동체에서 함께 나누어야 하는데 사유화함으로써 평등공동체의 꿈을 깨뜨림.

사유화는 평등 공동체가 산산조각 나는것.

초대교회 역사에도 그대로 반복. 아나니아와 삽비라.

거짓이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면 혼란.... 엄중히 경고하는 의미...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이루는데 개인의 탐욕이 문제임.

 

 

 

늘 구약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이 전쟁시 적군들을 다 진멸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한영혼도 귀히 여기시는 분이 이렇게나 잔인하게...

왤까? 그것의 의문도 오늘 풀렸다.

아간을 말씀하시면서.. 그때 상황을....

그때는 전쟁시 진멸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당시에는 합리적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라와 나라간에 전쟁이 그 나라를 섬기는 신들의 전쟁과 같았기 때문이다. 두 나라간의 싸움이지만 그당시에는 신과 신의 싸움이었다고 한다. 이긴 신이 승리를 거두면 싹~ 죽여야 했다고 한다.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스라엘 축제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사람들이 축제 동참함으로 정체성을 확인한다고 한다.

이스라엘에는 3번의 순례 축제가 있다.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 장막절)

세가지 중 초막절에 대해 말씀해 주심...

초막절이 되면 수카라(숙곳)이라 하는 곳에 초막을 지음.

팔레스타인에서 구할 수 있는 나뭇잎으로 허술하게.. 누우면 하늘이 보일정도로...

일주일 동안 초막에 머물면서 옛날 선조들이 겪었던 이야기를 회상함.

옛 조상들이 평등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는지등.. -민족 대 수양회임.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역사적 연속성의 틀로 아이들에게 각인되는 계기가 됨.

후손들은 조상들의 신산스런 삶을 생각할 뿐 아니라 편안함과 안락함에 길들여져 있는 개인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축제에 동참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속한 것임을 깨닫게 해줌.

 

 

이스라엘은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망함.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세울때까지는 1900년동안 떠돔.

바로 초막절의 경험이 민족의 정체성을 깨우치게 하는 계기가 됨.

 

이스라엘이 부유해 졌을 때 이 꿈이 깨어짐.

여로보암 2세, 웃시야때.

제국을 향해 가는것은 인간의 욕망때문.

신앙은 그 반대임.

 

장❍❍(이름을 미처 메모못함)는 진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함.

‘보듬어 안는 능력이 큰 것이 진보다’

역사도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을 다 품어 안을 때 진보다.

 

 

아래의 시에 대해 감상하면서 헨리 나우웬의 경험담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마지막 책을 쓰고나서인가? 아버지와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나우웬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굉장히 불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여행에서는 불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우웬이 자각한것은 아버지가 나를 고치려 하지 않고 나도 아버지를 고치려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덧붙여 말씀해 주시기를 인간관계에서 가장 나쁜것은 사람을 내 방법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 그것이 상대방을 더욱 방어적으로 만듬. 내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태도 때문에 문제가 발생함.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때 모든 관계속에서 평화한다고함.

 

 

성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시를 읽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들을 서로 나눈다.

시인이신 목사님과 함께 시에 푹~~ 빠지는 시간이다...

 

 

느티나무와 민들레 (최두석)

간혹 부러 찾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

민들레 꽃씨가

앙증맞게 낙하산을 펼치고

바람 타고 나는 걸 보며

나는 얼마나 느티나무를 열망하고

민들레에 소홀하였나 생각한다.

꿀벌의 겨울 잠 깨우던 꽃이

연둣빛 느티나무 잎새 아래

어느 새 꽃씨로 변해 나는

민들레의 일생을 조망하며

사람이 사는데 과연

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

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 찾아본다.

느티나무 그늘이 짙어지기 전에

재빨리 꽃 피우고 떠나는

민들레 꽃씨의 비상과

민들레 꽃 필때

짙은 그늘 드리우지 않는 느티나무를 보며

가벼운 미소가 무거운 고뇌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 떠올린다.

 

감상) 큰것에만 관심을 가졌고,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것을 돌아봄.

많은 감상을 말씀해 주셨는데... 기록이 없슴.. 시를 메모하느라 목사님의 시평을 메모못했슴돠...

 

 

순결하고 결백한 마음으로

 

주님,

하늘의 별처럼 빛나라고

저를 파견하신 당신께 말씀드립니다.

순결하고 결백한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게 해주십시오.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소박한 마음을 주십시오.

바쁘다고 서둘러대며 사람보다 일을 중요하게 여기던

저의 나날을 뉘우치며 비오니

당신이 지니셨던 그 마음을 제게 주십시오.

가던 길을 멈추시고

아들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과부를 측은히 보시고

그의 아들을 살려내신 주님,

배고픈 이들의 심정ㅇ르 알아주시고

굶주림을 채워주신 주님,

진실한 가르침에 목말라하며 당신을 따라다니던 이들의 약함에

눈물 흘리시던 주님,

저의 돌같이 차가운 심장을 꺼내 주십시오.

저를 귀찮게 하는 답답한 이들에게

핀잔을 주기보다 인내로이 들어주는 여유를 갖게 해주십시오.

고집스러움으로 화나게 만드는 이들에게 분노로 대하기보다

고집 아래 숨어 있는

그의 부드러움을 꺼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무엇보다 당신이 지니셨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의 마음을 저도 지니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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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성서학당(09 09-18 01:09)
중요한 내용이 빠져서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평등공동체에게 훈련시키시려고 했던것이 욕심을 조절하는 훈련이었다라는 것-만나...
삭제
목요성서학당(09 09-19 02:09)
'창세기'를 '출애굽기'로 정정합니다. 요즘 제가 왜이러지요??
기억력이 오락가락하면서..가장 기본적인 것도 실수하네요.. 나이 먹은 증거인가요??
메모를 잘해야 하는데요.. 목사님께 누가 안되도록요...
삭제
윤성희(09 09-21 10:09)
훈련시켜서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만드시기위해 쉽게 갈수있는 거리를 돌고돌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나봅니다. 감사합니다.
삭제
이재우(09 11-05 05:11)
오늘 교회에 가입한 초신자인데요. 물론 하나님을 믿은 년도는 24년째입니다.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셨네요.
성경의 말씀이 진짜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게 왜 안 중요합니까?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그런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가장한 거짓말장이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까? 성경의 교리대로 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성령님의 그런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니면 기독교는 세상의 흔한 철학밖에 안 됩니다.
단순히 착하게만 사는 것이 목적이면 기독교가 왜 있다는 말입니까?
기독교는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을 모두 한 하나님으로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그렇게 하면 최후에 영광스럽게 부활하게 되고 또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 아닙니까? 단순히 착하게만 사는 목적이라면 기독교는 왜
그렇게 필요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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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09 11-05 05:11)

그냥 철학책들만 읽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 그렇지는 안겠지만 진보 개신교는
이 땅에서 자신들이 정의롭게 살고 또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우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만을 중요시해서 정작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이 한 하나님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위해 3일만에 살아나시고 승천하시고 마지막 때에 전 인류를 심판하러 오시고
하나님 성 삼위일체를 믿고 의롭게 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서
하나는 영생에 하나는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교리가
아닙니까? 성경은 절대 단순한 철학이나 윤리책이 아닙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정말 죄송하지만 성경의 사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또 믿지 않고
단순히 자신이 착하게 살고 세상의 불의가 맞서 싸우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에만
중점을 둔다면 그 기독교 교파나 교회나 성당은 이미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라는
가면만 쓴 사이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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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신(09 11-05 09:11)
위에 글 남기신 분께.
제가 주제 넘게 나서기는 좀 어렵습니다만^^
저도 고민하던 문제여서요.
성서의 사실이 다 진실이다라면...
성서 속 수많은 오류와 모순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저는 그것이 상당히 궁금하고 헷갈렸습니다.
어떤 오류가 있냐고 물으시면 수도 없는 예를 들 수가 있죠.
당장 인터넷에서 검색한 거만 보여드리면...
http://iooo.org/veritas/Christianity_c_genealogy.html
이런 글이 있네요.
뭐 이 정도가 아닙니다. 찾아보면 수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두고 4대복음 내에서도 서로 다른 기록이 나옵니다.
연대가 오래된 구약으로 가면 끝도 없고요. 성서 속의 연대대로 하면 인류의 역사는 6000년인가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잖습니까?
그래서 전 그렇게 가르침을 받고 또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서란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을 체험한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또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되고 번역되면서 내용이 바뀌기도 하고 누락되거나 첨가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란 절대자가 존재하고 그 분의 독생자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기록하고 편집해온 성서이기에 사실과 다른 부분, 당시의 가치관으로 봤을 때는 있을 수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환상적인 부분도 있다. 그런 것을 감안하며 성서를 읽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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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09 11-05 11:11)
권혁신님. 저라고 그 사실을 왜 모르겠습니까? 저도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명백한 사례를 많이 압니다.
당장 창세기만 하더라도 해보다 식물이 먼저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납득이 가겠습니까? 식물의 나이가 해보다 더 많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또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떠도는 사람이 되었지만
곧 어떤 다른 여자를 만나서 정착하고 사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이 그때는
아담과 하와,가인,아벨. 또 성경의 관례는 특별히 중요한 경우가 아니면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딸도
있었겠지요. 그 당시라면 제가 위에서 말한 사람밖에 없는데 어디에 사람이
많아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리는 벌 이야기를 듣고 가인이 제가 떠돌이
신세가 되어서 떠돌면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서 성경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어디 하나,둘이겠습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100% 하나님이 쓰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쓴 것도 많다라고 하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악한 사람이 성경이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다는 구실을 내세워서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제멋대로
왜곡하고 날조할 가능성이 매우 많지 않습니까?예를 들어서 성경에 오류가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을 반드시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가 있냐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의롭게만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왜곡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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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09 11-05 11:11)
수 있고 또 다른 식으로 이상하게 멋대로 왜곡할 확률이 많지요.
그러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사람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가짜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기 정식 게시판에 이미 썼는데요. 도대체 왜 기독교인들은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도대체 아무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목사님과 신부님등이
하는 설교나 이야기를 믿는지 모르겠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성직자님이나
신학자님도 문제가 많고 말이죠. 님 말씀대로 성경에 오류가 많은 것이 사실이고
또 제가 중요시여기는 하나님이 절대 의로우시다는 것을 지금의 저는 납득을
못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같은 문제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오류,잘못을
지적하는 모양새가 되니 말이죠. 이런 문제들이 수두룩한데 지금까지 대다수의
기독교인 성직자님,신학자님이나 일반 교인이나 할 것 없이 과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서 성경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불만스러운 사항을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또 자기 자신이 열심히 생각해서 해결할 생각은 거의 안 하고 앉아서
무조건 성경은 절대 오류가 없고 하나님은 무조건 절대 의로우시다는 것만
강요만 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만 기독교인이 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님이나 저같이 성경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삭제
이재우(09 11-05 11:11)
또 논리적으로 확실하게 따져서 결국 이해가 되는 응답이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해야되는데 이것을 무조건 쓸데없는 무의미한 짓이라는
식으로 막아버리는 대다수의 기독교 성직자,신학자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때문에 시험이 들어서 교회나 성당을 떠나는 교인도 많을 것이고
또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하는데도 분명히 장애사항이 됩니다. 요즘의 비신자나
안티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바보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개 말이죠. 오히려 어떨때는 기독교인보다도 더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은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단순히 하나님,예수님,성령님. 성 3위일체가
한 하나님이고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믿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강요만
하는 기독교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런 쪽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기도를 하는 기독교 성직자나
신학자가 많이 나와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면 어쩌면 님이나
저나 이렇게 고민을 안 해도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제가 지금 말한 이런 식의 기독교 성직자나 신학자님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 수나 비중이 너무 적지요.
그런 것을 금기시하는 잘못된 문화때문에 말이죠. 물론 베드로서의 말대로
성경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이해가 되게 풀려다가 결국 잘못 믿거나
(예를 들어서 하나님만 신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그냥 단순히 사람일 뿐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또 아예 안 믿게 되어서 멸망에 처해지는 사람이 많겠지요.
그래서 과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서
삭제
이재우(09 11-05 11:11)
철저하게 따질 땐 따지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억지로 단정을 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고 베드로서의 말대로 멸망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일단 남겨두면서 계속해서 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자기 스스로 열심히 생각해서 해답을 내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진짜로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은 안다고 하는 것이다라는 말 말이죠. 이 태도가 님이나 저같은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에게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분노와 의문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대로 억지로 단정은 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제게 답변을 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물론 나름대로 기도와 저 자신의 노력이나 다른 기독교 신학자나
신학자님의 뛰어난 이야기도 잘 읽어야겠고 말이죠.
이 태도가 지금 님이나 저나 또 님이나 저같은 다른 기독교인의 경우에도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상으로 마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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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신(09 11-06 01:11)
네 저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도 님의 말씀에 동의하고요. 담임목사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라입니다. 판단은 하되 결론을 내리면 안 되고 계속 열린 자세로 공부를 해야겠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청파교회를 다니고 보다 많은 활동을 하려 합니다. 말씀 감사하고, 서로의 신학관은 다를 수 있으나 결국은 하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반대로 귀결되지 않아도 되고요. 교회에서나 이 게시판에서 자주 뵜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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