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나의 대통령을 기억하며~ 2009년 05월 26일
작성자 곽상준
 

권혁신 형제는 아버지와 예수님에 그를 비유했다.

 

여러모로 동의가 가는 이야기다.

 

갑작스런 고통의 서거가 나에게 다가오는 아픔은, 많은 이들을 슬픔에 빠지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의 하나가 없어진 절망이 들어닥쳤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의 죽음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의 업무 수행 과정의 여러 논란을 뒤로 하고 인간 존재로서의 그의 모습에 서서 생각해 보면 그는 무척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심이 깊은 분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것이나 미래의 편안한 앞날이 보장된 세무변호사의 직을 버리고 인권변호사가 것이나, 국회의원이 것이나, 그리하여 세번을 내리 부산에서 낙방했던 모두가 그의 타자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된 인간적 발로였다고 느껴진다.

 

지금 악마의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이런 그의 마음 속을 속속히 꿰뚫어보고 일을 진행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진정한 악마라 표현할 있을 것이다. 사람 속을 꿰뚫어 보려는 능력은 그저 능력이라 표현하기엔 적당치 않지 않은가? 하늘 권세 잡은 자들과 손잡지 않고서 어찌 그게 가능하겠는가?

 

 

타자에 대한 그의 배려로 그는 자신의 패배가 보이는 곳에 자신을 던졌고 자신을 요청한다고 청하는 곳에 자신을 던졌고 이번엔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끊기 위해 자신을 던진 것이다.

 

부분이 사람들의 마음을 때린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돈벌이에 떠밀려 마음 귀중한 양심을 미루어 놓고 살던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양심에 가한 채찍질이었다.

 

김기석 목사님께서 표현하신 것처럼 학벌, 재력, 권력, 배경이 판을 치는 사회에 틈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던 였기에 그의 죽음은 일반인들도 열심히 살면 성공할 있다는 희망의 절연이었기에 비참함으로 다가온다. 사회의 주류가 과연 무엇이고 그들이 비주류에게 어떠한 행동을 있는지를 우리는 사건을 통해서 맛보게 되었고 드높고 강고한 벽의 실체를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게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절망의 심연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하시기 이전 3일의 시간동안 음부에 계셨다는 것을 감안하면 절망을 인식케 그의 죽음은, 절망으로 던져진 그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과 예수가 음부에 들어간 것과 비교될 있을 것이다. 결국 그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이 그랬듯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것이다. 이번 사건이 전국민적인 트라우마라고 표현된다는데 동의한다. 십자가도 못자국의 흔적이 있었고 실상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안에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는 전국민에게 트라우마로 남는 십자가를 던졌다. 이제 십자가를 안고 부활하는 세대가 나올차례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나의 대통령' 잃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은 생전에는, 아마도 향후 역사 속에서 그와 같은 '나의 대통령'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그래서 그에게 고맙고 또한 부채감을 가지게 만든다) 그의 죽음은 그의 마음을 들여다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전직 대통령이었지만 언젠가 한번은 찾아가서 함께 식사한번 있는 그런 분이었다는 것을 그의 마음 속에서 읽을 있었다. 세상에 이런 대통령을 가질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될까? 국민적 아픔의 하나가 바로 '나의 대통령' 잃었다는 것을 그들의 영혼이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보수든 진보든, 우파든 좌파든 과거에 그랬고 앞으로 나올 대통령은 그들이나 저들 또는 우리들의 대통령은 있어도 나의 대통령은 없다. 그만큼 우리에게 서민으로 와서 서민으로 대통령이 있을까? 부분은 분노해도 충분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얻을 있는 기회를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기회를 도난 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우리의 기회를 빼앗아 갔다. 기회를 주지도 않을 그들이 말이다. 창고에 먹을 것을 가득 쌓은 부자가 과부의 한덩이를 빼앗아 것이다. 낙타와 양과 염소를 가득히 가지고 있는 부자가 자신의 잔치를 위해서 가난한 집에 하나밖에 없는 그래서 양이 아닌 가족이 양을 빼앗아 자신의 잔치를 차린 부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우리에겐 나단은 없는걸까?) '나의 대통령' 빼앗긴 우리는 울어도 것이다. 양을 빼앗긴 가난한 가족의 모든 이가 울었을 것이듯이…

 

 

기득, 그들은, 말할 자격이 없는 그들의 말은 여전히 음험하기 짝이없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하늘권세 잡은 자의 냄새가 난다.

 세력화되지 않아 여전히 이론 위에 있는 진보는 너무나 건조하다. 오랜 가뭄으로 갈라진 땅처럼 건조에서는 생명이 보이질 않는다. 의사가 수술 부위에 따라 다른 메스를 들고 수술을 하는데 그대들은 오직 한자루로 세상의 모든 환자를 수술 하려고 하는가? 과연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찾아 들어올 것인가?

 

예수는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 인자로 표현했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왔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올리우셨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 생애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가장 인간적인 대통령으로 그를 만났고 철저한 인간의 고뇌 속에서 순수한 인간으로 떠나는 모습을 우리 생애에서 경험했다. 순수함은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거추장스러운 무엇으로 만든 것이다.

 

생생한 인간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그의 모습 속에서 인자로 와서 인자로 예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의 대통령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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