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나의 불치병 2009년 05월 17일
작성자 장혜숙

 

나는 백퍼센트 음치다.
음치로서 요즘의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역인지 누가 그 고통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엘레베이터 없는 계단 앞에 선 지체부자유 장애자처럼 노래 불러야할 자리에 낀 나는 앞이 막막하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사람들 심리가 이상하다. 장애자에겐 손을 내밀어 도와주면서, 음치에겐 결사적으로 노래를 재촉하는 가혹행위를 서슴치않는다. 특히 짖꿎은 가해자는 노래시키는 것에 역사적 사명감이라도 느끼는 듯 결사적이다. 마치 끈질긴 승부근성을 드러내듯 못한다는 사람에게 노래를 시키기 위해서 갖은 수단방법을 다 동원한다. 이쯤하면 독자들은 눈앞에 활동사진을 보듯이 그 장면을 그려내리라. 장애자에게 빨리 뛰라고 몰아부치지 않는 사람들이 왜 음치에게는 그리도 가혹하게 채찍질로 몰아부치는지 모르겠다. 음치에게 노래부르기를 강권하는 것은 분명히 가혹행위이다.
옛날에는 노래 못부르는 나도 그럭저럭 살만 했었다. 노래부를 일이 그리 흔치도 않았고, 아무나 다 노래를 불러야하는 것도 아니었다. 봄 가을 소풍가서, 학급 오락시간에, 교생실습이 끝난 후의 송별회에서, 직장의 야유회에서 그럴 때나 노래들을 불렀는데 그도 잘하는 사람이나 나서서 부르면 그만이었지, 내 차례를 피하느라고 진땀을 빼지 않아도 되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기 괴로운 세상이 되었다. 사람구실도 사람행세도 못하고 주눅들어 짜브라져 있어야한다. 특히, 모든 즐거운 자리들에서 타인들의 즐거움이 커질수록 음치의 괴로움은 더욱 크기만하다.
아무 준비없이 툭하면 벌어지는 노래판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하다. 차라리 노래판을 벌이려면 어마어마한 준비가 필요해서 판을 벌리기가 쉽지 않다면 음치에겐 좀 숨통이 트일텐데…

 

세상에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태내에서부터 어머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고자란 우리들이 아닌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소리로 시작한 우리들의 삶에 그 소리를 마음대로 빚어내는 것은 본능처럼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견디기 괴로운 괴성도 만들어지지만, 우리가 취하는 소리는 우리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고 마음을 아름답게 해주는 소리들이다.
나도 음악을 좋아하고 늘 음악소리를 들으며 생활하고 있다. 콘서트도 오페라도 가끔 감상하고, 명곡 감상책도 열심히 읽으며 음악의 겉핥기는 하고있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음악을 듣기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노래를 불러야하는 것이다.
우리 아들들도 겨우 음치를 면한 신세지만, 아주 많은 노래들을 작사 작곡했고, 매일 전자 기타 연주로 지붕이 들썩들썩한다.
"한다"고 말할 정도가 되는지 알 수 없으나, 큰 애는 트럼펫을 작은 애는 드럼을 밴드에서 연주해왔고, 딸은 키보드를 연주하기도 한다. 남편도 클래식에 미친 사람이고보니 우리는 음악가족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단지 노래를 못부르는 그것 때문에 나는 마치 음악과는 관계가 먼 사람처럼 되고말았다.
아, 어찌하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노래 잘하는 사람이 정말 부럽다.
숲속 새들의 지저귐, 도란도란 흐르는 계곡물 소리, 산사의 그윽한 풍경소리, 이런 아름다운 소리들 속에서 살면서도 음감을 키우지 못한 나는 그야말로 선천적인 음치환자임에 틀림없다. 아니, 음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발성을 못할 뿐이지, 내 귀는 잠결에도 문풍지 떠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는 노래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었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입산금지 구역이 돼버린 계룡산 깊숙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정말 노래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멀리 동네 어귀 나무위에 높이 스피커가 매달린 것도 내가 그곳을 떠난 한참 후의 일이었다. 1학년에 입학하여 노래를 배웠고, 내가 처음 부른 노래에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 후로 나는 아예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음악소리에 빠져들었고, 내 자신이 음치임을 알게 된 후로도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뚱뚱한 축전지를 고무줄로 칭칭 붙들어맨 트랜지스터의 단음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함께 살았다. 클라식연주는 별로 듣지 못했었다. 읍내 문화원에서 스피커를 통해 아침이면 <콰이강의 다리> <페르시아 시장>을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게 틀어줬다. 지금도 나는 청소할 때 창문 활짝 열어젖히고  음악을 집밖으로 넘쳐흐르도록 큼직하게 틀어두고 청소를 하면 몸이 경쾌하게 저절로 움직여진다.

읍내 두 군데 극장에선 서로 경쟁하듯 볼륨을 높여 째지는 소리로 <검은 장갑 낀 손>이나 <베사메무쵸>같은 노래를 틀어줬다. 저녁먹고 난 후의 한가한 시간에 어둑한 읍내를 극장의 노래들이 장악했다. 밤 12시쯤이던가, 새벽녁이던가엔 학교 뒷산에서 누군가가 트럼펫소리를 하늘로 올려보내곤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온 후에나 <르네상스>라는 음악감상실에서 클라식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무렵부터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제법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을 수 있게 됐고, 비록 노래는 못하지만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된 것이 참 행복했다.
결혼 후, 아이에게 악기를 가르칠 재주는 없었지만, 애들의 피아노 연주에 적극적으로 간섭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워털루 전쟁"이라는 피아노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그 아이에게 워털루 전쟁에 대해 실감나게 얘기를 해주었더니 그 뒤로는 연주 소리가 달라졌다. 기계적으로 악보를 읽던 아이가 자기의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애들 셋을 다 모여놓고 비발디의 "사계"를 들려주며 그림을 그리도록 시키니 아이들은 멋진 그림을 그려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음악 듣기, 음악 읽기, 음악 보기, 음악 그리기 놀이를 자주 하며 지냈다.

이제 두 아들들이 연주하는 전자기타 소리에 귀가 멍멍해진 나. 아직도 음치이지만, 앞으로도 고쳐질 수 없는 불치병 음치이지만, 그래도 나는 음악을 사랑하고, 늘 음악과 더불어 살고있다. 억지로 노래를 시키는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나는 늘 행복하리. 음악의 날개위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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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숙(09 05-17 04:05)
아직도 여기 글올리기에 익숙치 않네요. 글자가 어째서 이렇게 다르게 나오는지... 워드에 쓴 것을 복사해다가 여기에 붙여놓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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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09 05-18 01:05)
선생님이 음치라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같은 음치끼리 대예배 합창 한번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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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호(09 05-18 02:05)
쉽게 해결하시려면 중간에 "워드패드"창을 열어서 갖다 붙이신 후 다시 복사하셔서 붙이시면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시작 - 모든 프로그램 - 보조 프로그램 - 워드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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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순(09 05-19 05:05)
저도 음치인데, 학생 성가대부터 시작하여 성가대에 오래 있었더니, 조금 소리를 내는 듯 했으나, 역시 음치인지라, 어쩔 수 없더군요. 그렇지만, 노래 부르는 자리에서 기죽지 않고 노래 부른답니다. 일부러 틀린 척하면서 부르면 다들 재미있어 하지요. 사실은 제대로 부르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만, 사람들은 잘 부르는 것보다 재미있게 부르는 것을 더 좋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함께 즐기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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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걸(09 05-25 09:05)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는 얼마나 자기 존재를 그 안에 담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해요. 음악적으로 아무리 완벽한 노래라 해도 그 속에 그 '존재'가 담겨있지 않으면 절대 감동은 없거든요. 처음 학생 성가대에 섰던 중학교 3학년 때 까지 까만 줄 다섯 개는 오선지고 그 위에 널린 콩나물 머리들은 음표... 가 제가 아는 전부였답니다. 당연히 제대로 소리도 낼 줄 몰랐고 악보에 대해서, 노래에 대해서 문맹, 까막눈이었죠. 자꾸 하다 보니까 눈이 떠지더라구요. 기준 음에 제 소리를 맞출 줄도 알게 되고. 개발할 기회를 못 만나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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