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호수 저쪽 2009년 04월 21일
작성자 윤석철

호수 저쪽

 

독일, 스위스, 영국 세 나라의 손님이 오늘 아침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모두 같은 회사의 사장, 부사장, 이사인데 세 사람 국적이 모두 다릅니다.

서울에서 아침 7시 첫 비행기 타고 내려와 독일 뮨헨에서 루프트한자

항공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손님들을 영접했습니다.

 

오후 회의떄까지 잠시 시간이 있어 교회 홈페이지에 접속했습니다.

 

홈페이지 해킹, 그리고 홈 페이지의 개편에 대해 여러분이 올린 글을 읽었습니다.

아쉬운 마음도 안타까운 마음도 그대로 전달돼 오더군요.

그동안 게을렀던 스스로를 뒤 돌아보며 오즈음 제가 생각하고 있는 몇가지

일들을 교우님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 부활주일 대표기도에도 포함시켰던 내용입니다만, 갈리리 그 척박하고

가난했던 지방에서 예수님 따라 나섰던 제자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선뜻 생업을 내던지고 처음보는 젊은이 <예수>를 따라 나서게 했을까요? 하기야 그때의 평균나이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지금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장년을 넘어선 나이이시기는 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치열한 고민도 없이, 생명의 위협도 없이,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그 당시의 성전체제에서) 완전히 쫒겨날 위험도 없이, 입으로 <주님, 우리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서를 통하여 잘 짜여진 예수님에 관한 일대기를 배우고, 고난 받으시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참으로 놀랄만한 얘기를 수백번 수천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일점 의혹도 없이 잘 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복음서대로라면 예수님이 직접 가려 뽑으셨다는 열두제자와 일행을 시중들며 따르던 몇명의 여자 제자들을 포함하여 열 댓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이 동네 저동네 갈리리 마을을 돌아다녔습니다.  병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함께 어울려 식사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예수님이 무언가 신나는 일, 장미 빛 미래를 약속하셨을까요?

그래서 그 제자들이 사업상 예수님을 선택하고 따라 나섰던가요?

매일 매일 근사한 식탁을 차리고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대접했던가요?

그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집 좋은 방에 예수님 일행 주무시도록 모셨을까요?

시골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어떻게 맞이했을까요?

 

지금 시대라도 느닺 없이 찾아 오는 열 댓명의 어른들을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대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손님들을 맞이하여 잠잘 곳을 마련해드리는 것도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들이 섞여 있는 낯선 사람들인데...

 

그 예수가 누구인지, 무슨 짓을 하려는 사람인지, 그 일행과 어울려 다니다 내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그 일행을 집에 받아 들인다는 것이 무슨 나쁜일과 연관될지

아무도 내일 일을 모르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회당의 지도자들, 성전의 존경받는 어른들, 신앙을 지도하는 선생들이 예수를 아주 나쁘게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복음서에 써 있는 것처럼 몇 천명 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들로 산으로 휩쓸고 다녔다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민란(?) 수준이지요. 어린아이와 여자 빼고 오천명이면 실제로는 만명이 넘었겠지요.)

 

그런데 몇 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일을 알 수 없는 그 흐름에, 예수님이 주장하시는 그 운동에 사람들이 따라 나섰다는 점이 저에게는 참 중요합니다.

영악하기만 한 21세기의 기독교인에게서는 전혀 상상도 기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아마 지금 기독교인들은 이땅에 예수님 오셔서 그때 하시던 그 말씀하시면

그 때 하시던 그 일 하시면 교회에서 쫒아내고 교단에서 파문하고  머리 가로 저어 흔들며 상종도 안하겠지요.

 

요즈음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와 예수님을 만나보기 위해 들로 산으로 찾아가던 사람들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그 것이 정리되면 언젠가 다시 한번 글을 올리겠습니다.

 

또하나,

 

예수님이 갈리리 호수를 건너 저쪽에도 가셨다는 점을 많이 생각합니다.

 

<호수 저쪽>은 저에게는 <밀려난 사람들>입니다.

중심,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늘 주변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호수 이쪽>으로 올 방법이 전혀 없지요. 그들은 이쪽으로 올 힘이 없고 설사 온다해도 받아 들여지지 않지요.

 

시골에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하고 앞 뒤 잘 살펴가며 살아왔지만 저는 늘 저 자신을 <저쪽>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세계가 좁다고 휘젓고 이나라 저나라 돌아 다니고, 여러나라 사람들과 친구되어 잘 지내지만 저는 <저쪽>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자신 이쪽 사람들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으니, 이쪽 사람들 또한 저에 대해 그러했겠지요. 호수 건너 불 환하게 밝힌 집 뜰에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길 때, 저는 건널 수 없는 호수를 바라보기만 했지요.  

 

이 땅의 기독교는 <호수 이쪽>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파하는 마음을 잃어버린지 오래지요. 저쪽 사람들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하고, 이쪽에서 우아(?)하게 파티를 즐기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쪽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려고 <저쪽에 오셨>습니다.

(참 말이 안되네요. 이쪽에 <온다>고 하다가 <저쪽에 오셨>다고 글을 쓰는 것은

저의 관점이 이쪽 저쪽 왔다갔다 하는 증거입니다.  오는 것은 이쪽이고 가는 것은 저쪽이라고 해야 말이 되는데 자꾸 뒤 섞입니다)

 

고맙게도 저쪽에 오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이 생각도 좀 더 정리되면 다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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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s(09 04-21 01:04)
홈페이지에 글올리러 왔다가 깜짝! 그럼 우리는 같은 시간에 글을 쓰고 있었다는건가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호수 저쪽과 이쪽의 구분은 간단해요. 내가 속하면 이쪽이고 내가 속하지 않은 곳은 저쪽이죠. 그런데 예수님에게 이쪽과 저쪽은 절대적인 것이겠죠. 어쨋든 이쪽 저쪽에 헷갈릴 필요는 없고요 무조건 예수님이 계신 쪽에 서면 되겠네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쪽에 있다는, 있을 거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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