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생각의 꼬리잡기 놀이 2008년 03월 15일
작성자 장혜숙
화창한 날이다. 마당 구석구석에 핀 꽃들이 모처럼 제 색깔로 빛난다. 곱게 빛나는 진주홍색의 튤립이 유난히 시선을 끈다. 어제도 그 자리에 있었던 꽃이 오늘 특별히 빛남은 웬일일까. 꽃보다는 색깔에 마음이 머문다. 색깔이라, 빛깔이라…. 색깔은 수동적인 운명을 지녔다. 제가 지닌 색깔을 자기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수동적인 운명. 누군가가 비춰줘야만 나타날 수 있는 슬픈. 마당의 튤립은 어제보다 한결 진한 색깔로 빛나고 있다. 화창한 날씨 때문이리라. 정원을 서성거리다가 나는 예기치 않았던 복병, 색깔에 붙들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미로를 헤맨다. . 색깔은 원래 무슨 색깔일까, 이런 말은 궤변이려나? 색깔은 도대체 원래의 제 빛이 어떤 것일까? 달빛에 비추인 색깔, 햇빛에 비추인 색깔, 형광등에 비추인 색깔, 백열등에 비추인 색깔… 어느 것이 제 색깔일까? 꽃은 우중충한 어제보다 햇빛이 화려한 오늘 더 크게 벌어졌다. 함초롬하던 송이가 부끄럼 없이 활짝 벌어져 오히려 바깥쪽으로 꽃잎이 젖혀지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수업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더 넓어지고 커졌으니 색깔은 약간 더 흐려져야 한다. 그러나 어제 주황색이던 꽃이 오늘은 진주홍 색으로 선명해졌다. 빛 때문이리라. 우리 가까이 바짝 다가온 햇빛 때문이리라. 그럼 원래의 색깔은 무슨 빛이었을까? 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서 짓누르면 그 협박에 숨죽이고, 햇빛이 따사롭게 보듬어주면 그 사랑에 기고만장하여 뽐내고. 그럼 원래의 색깔은 무슨 빛이었을까. 색깔에 사로잡혀 출구없는 미로를 헤매노라 한나절이 그냥 지나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생각하는 것이 일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한나절을 보낸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일이라면 한나절동안에 너무너무 많은 일을 한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게으르고 느리다고 어머니께 혼나고 산다. 혼나는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싫지만 게으른 건 사실이기 때문에 억울할 것도 없다. 내가 아이일 때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른들은 왜 몸을 움직여 일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게으르다고 야단을 할까? 나는 일손을 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는 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멍청히 있는 시간이 좋다. 하릴없이 논다고 혼날 때 마다 나는 참 답답했다. 어른들이 팔 걷어붙히고 여럿이 달라붙어 일년 내내 지어도 못 짓는 집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눈 몇 번 끔벅끔벅하면 멋지게 지을 수 있는데. 버스를 타고 차멀리로 토하면서 다섯 시간을 가야 갈 수 있는 서울을 나는 잠시 눈만 감고 있어도 삽시간에 갈 수 있는데. 빨리 빨리 크라고 밥 많이 먹이고 키워도 억지로 건널 수 없는 나이를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그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어른이 되어 선생님도 되고 그러는데. 나는 늘 게으른 천덕꾸러기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그 때, 우리 아이들은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어도 게으르다고 혼내지 않겠다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설겆이를 하고,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주 큰 일인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다. 일 안하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 아이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끊임없이 바스락대며 무언가를 한다. 눈과 귀, 손과 발, 잠시도 가만히 놔두질 않고 움직인다. 한꺼번에 몇 가지 일을 동시에 부지런히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컴퓨터를 하며 tv를 보고, 설겆이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빨래를 돌리며 전화를 하고, 이런 식으로 잠시도 가만 있는 걸 볼 수가 없다. 나는 다 이해해 줄 수 있는데. 저희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게 일 안하고 게으른 것이 아니고,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중일 거라고 다 이해하려고 작정을 했는데...... 우리 애들은 끊임없이 바스락 대고, 잠시도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일이 없으니 걱정이다. 지금 나는 우리 어머니가 하던 걱정하고는 반대되는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는 내가 안 움직이고 생각만 하고 있다고 걱정하셨는데, 그래서 나는 그것이 억울해서 나중에 내 아이들이 생각하고 일 안 해도 야단 안치려고 다짐하며 살았는데, 지금도 나는 몸 안 움직인다고, 게으르다고 어머니께 혼나고, 애들은 내가 게으름을 용서해 줄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우리 아이들은 마음 속으로 이런 다짐을 하고 있으려나? 나는 이 담에 어른이 되면 애들이 한꺼번에 이것저것 떠벌리며 수선을 떨어도 가만히 있으라고 성화대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 햇빛은 지금도 황홀하게 빛난다. 꽃 색깔을 더욱 선명하게 빛내준다. 그러나 뽑아 버려야 할 잡초까지도, 털어버려야 할 먼지까지도 아주 섬세하게 비춰준다. 이제 더 이상 생각의 꼬리잡기 놀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몸을 움직여야한다고 나를 부추긴다. 애들은 생각의 꼬리같은 건 잡으려고 쫓아다니지 않는다. 굴러가는 축구공을 쫓아 벌써 저만큼 가있다. 아, 화창한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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