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독서모임 9 - 호치민 평전(1) 2008년 01월 14일
작성자 박어진
-1월 12일: 윌리엄 J.듀이커 <<호치민 평전>>(푸른숲, 2003) <<호치민 평전>>은, 1960년대 미국 역사학자 윌리엄 J.듀이커가 사이공의(현 호치민시) 미국대사관에서 일하던 중 호치민(胡志明)이라는 인물에 매료당해 이후 30여년을 연구에 바쳐 얻은 방대하고 치밀한 자료로 호치민의 전 생애를 복원한 작품이다. 1. 베트남의 역사: 기원전 3~20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베트남의 고대왕국은 기원전 2세기 부터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원후 10세기(939년)부터 약 900여년간은 '대월'(大越, 다이 비엣)이란 이름으로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로써 베트남은 중국의 동화정책으로 인해 '유교화된' 베트남이면서 동시에 민족의 생존과 정체성 확보를 위해선 무력도 마다하지 않는 끈질긴 저항력을 지닌 베트남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1858년 프랑스 첫 침입('다낭' 공격)을 시작으로 1887년엔 완전히 프랑스 통치 하(*1)에 있게 된다.(*2)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인도차이나(*3)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도 물러가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후 세계 질서 개편이 이루어질 때 프랑스는 베트남에 다시 개입했고, 1954년 베트남은 이를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지만(제1차 베트남 전쟁), 제네바극동평화회의 선언에 의해 남(민주주의)과 북(공산주의)으로 나눠지게 된다. 이후, 남베트남에서의 부패는 더욱 심화되고 베트남 내에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1960년 부터 남/북 베트남 간의 갈등은 고조되어 제2차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다. 1973년 사이공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미국내 요인들로 약화되었고, 1975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에 대해 벌인 총 공세에서 북베트남이 4월 30일 사이공('호치민시'로 개칭) 함락에 성공하면서 미국을 몰아내고 그들의 승리로 전쟁은 종식된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7월에 남북이 통일되어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정착기인 1975~79년을 거친 후 베트남은 중국식 실용주의(등소평의 '흑묘백묘론')에 영향을 받아 1986년 도이모이정책을 채택해 시장 경제체제 도입을 선언한다. 이후로도 베트남은 정치부문 개혁은 통제하면서도 경제부문의 개혁은 과감히 추진해오고 있다. *1-현재 베트남의 세계적인 수출품으로 알려진 커피와 고무는 각각 프랑스인의 기호충족을 위해, 자국(프랑스)을 위한 경제 정책을 위해 식민지 시기에 심기 시작한 커피나무와 고무나무 정책에서 비롯한 프랑스 식민지 시기의 유산이다. *2-본격적인 식민지 시기와 맞물려 1890년(5월 19일)에 태어난 호치민은 1969년(9월 3일) 심장병으로 사망하기 까지 베트남 혁명사를 온 생애로 살아낸 인물이다. *3-인도차이나(Indochina)는 일반적으로 옛 프랑스령 식민지인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3개국을 가리키나, 크게는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대륙부의 총칭이다. 2. 1장 빼앗긴 땅에서(1890-1911): 1장에서 저자는 호치민(*1)을 키워낸 베트남의 역사, 기후풍토 조건, 가족들의 지향/전통, 여러 만남과 당시의 세계적 상황을 서술한다. 천년간 지속된 중국의 통치로 흘러들어온 유교는 전통적으로 농업사회인 베트남에서 근본적으로 중시하던 근면, 개인의 욕구를 집단의 요구에 종속시키는 태도, 안정적인 사회, 정치적 위계에 필요한 유사덕목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의 정신적 기둥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런 순응성과는 대조적으로 독립국가로 존재하기 위해 애써온 베트남인들의 기질에는 동시에, 저항정신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프랑스 식민 하에서 호치민이 민족의식을 키워갈 수 있었던 못자리는 베트남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일종의 마을학교인 서당인 듯 보인다. 호치민의 아버지인 응우옌 신 삭이 가르치기도 했던 당시의 서당은 출세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 아닌 사람을 만드는 학교였다. 후에 프랑스의 공교육과정 정책으로 서당은 각 마을에서 급격히 사라졌고 이로써 베트남 교육의 황폐화가 가속되었다.(*2)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전 생애를 걸쳐있으며, 이것은 '국제주의'를 지향한 사회주의와 충돌/갈등을 빚었음에도 계속 되었다. 이런 성향은 잔인한 공공노역 징발로 프랑스인들에게 학대받는 농민들을 보면서(p58), 넉넉치 않은 가정형편으로 인해 읽고 싶은 책조차 사서 읽을 수 없었던 여건으로 인해(p57), 태풍속에서 죽어가는 베트남인들을 보고 웃으며 좋아하는 유럽인들을 보며(p78) 더 깊이 뿌리 내려갔던 것 같다. 서당교육이나 이런 시대적 상황들 외에도, 호치민은 특히 유학자이면서 반골기질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 일본에 기대어 폭력 저항을 옹호하는 판 보이 차우, 프랑스와 협력해 개혁주의적 방식을 옹호하는 판 추 친, 그리고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國學, 쿠옥 혹)에서 만난 한문 선생 호앙 통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 국학시절의 그는 외국어에 능하고 질문을 잘하는, 주체적으로 공부하던 학생이었던 것 같다. 1908년 세금 인상, 강제 노역, 관리의 부패로 지식인에서 농민에까지 불만의 소리가 확대되고 마침내 항세(抗稅) 운동이 발발했다. 그 최초의 시위에 호치민은 농민들을 지지하기 위해 통역을 자처하여 개입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학교를 떠나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이는 행동하는 사람으로 호치민이 자신을 바꾸기 시작한 출발점(moment)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학교를 떠난 후 판 티엣에서 그는 교사로 일하는데, 그가 학생들을 대하는 방식에서는 학생을 사유하는 주체로 세우고자 하는 교육자적 열망이 엿보인다. 이후에도 그의 가르치는 행위는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며 이는 그가 가진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호치민은 더 큰 세계를 보기 위해 주방보조로 배를 타고 인도차이나 땅을 떠나 유럽으로 향한다. *1-호치민은 1942년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처음엔 응우옌 신 쿵이란 이름을 받고, 베트남 전통에 따라 11살 사춘기부터는 응우옌 탓 타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1919년부터는 응우옌 아이 쿠옥(阮愛國, 애국자 응우옌)이라는 가명을 30년 동안 사용한다. 이외에도 호치민은 여러 가명들을 썼는데, 여기서는 편의상 구분없이 '호치민'으로 통일해 적는다. *2-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하게, 구한말에 독립적인 배움의 장소이던 사숙(私塾, 한문을 사사로이 가르치던 곳)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이 교육법을 재정하면서 사숙을 없애고 교육을 획일화 시켜나갔다. 3. 2장 성난 말(1911-1923): 1905년 러시아에서는 첫번째 혁명이 일어났고, 레닌의 사고에 매력을 느낀 유럽의 지식인들은 '세계주의'의 가능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호치민의 20대 초반~30대 초반과 맞물린 또 다른 (세계)사건은 1차 세계대전과 그 후의 세계 재편 과정이다. 그가 유럽에 당도한 이때는 식민지 시대였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를 수탈했고, 수많은 노동력을 유럽사회로 끌어들였다. 이곳에서 호치민은 망명자가 되어 여러 허드렛일을 하며 세계변혁을 꿈꾸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유럽을 보게 된다. 그러던 중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만난 프랑스인과 인도차이나에서 만났던 프랑스인이 다르다는 자각을 하게되고 이에 충격을 받는다. 이는 '식민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며, 식민주의는 식민치하의 사람들 뿐 아니라 억압자들까지도 비인간화 시킴을 깨닫게 된다(p112). 따라서 식민상황에서 민족을 해방하는 것은 베트남인들 뿐 아니라 프랑스인에게도 좋은 일임을 확신한다. 그 방법을 찾던 호치민은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외노동자연합의 구성원이 되어 현장에 나가다가 칼 마르크스를 접하게 된다. 만남의 폭을 넓혀가면서도 그는 틈나는대로 도서관에 다녔다. 그가 주로 읽던 책들은(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빅토로 위고, 에밀 졸라, 레프 톨스토이, 루 쉰, 바르뷔스)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들 저서이며, 인생에서 사람과의 만남 만큼이나 어떤 책과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프랑스에 살고있는 베트남 공동체를 인식한 그는 그들을 동력화하는데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과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하면서 혁명가로서의 삶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14개조' 선언에 기대를 품은 그는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조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 이곳저곳에 청원서를 배달/배포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원하는 응답을 얻지 못한 그는 급진적 길로 방향을 전환한다. 당시에 새로운 길이라 함은 서구자본개인주의 혹은 마르크스 철학이었는데, 호치민은 후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는 유교적 이상과 사회주의 이상에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p115). 1920년 레닌이 제출한 '민족과 신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가지고 프랑스에서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다. 제2와 제3 인터내셔널의 차이는 사회주의 이상을 향한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층의 주도적 역할을 요하는 단계를 거칠 것인가(제2차) 아니면 부르주아를 빼고 노동자로 넘어가야 할 것인가(제3차)이다. 호치민은 서구의 공산당들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 지역의 민족 운동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그리고 국제주의를 지향하며 민족주의를 하등시한 서구 공산당에 대해 끝없이 도전하며, 유교적 사회주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이 믿고 확신하는 것을 재정난과 노동에 쫓기는 일상 속에서도 기사,소설,희곡 같은 글을 써 계속 발표, 배포했다.(사회주의 활동에서 문화선전대 활동을 매우 중요하다.) 그는 통계를 자주 사용하는 등 사실인용에 탁월했고, 지식인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노동자, 농민, 병사, 사무원)의 수준에 맞춰 단순하고 단조로운 글쓰기로 그들을 이해시키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렇게 프랑스에서 급진운동을 이끄는 인물로 점점 유명해진 호치민은 혁명의 고향인 소련으로 떠난다. 이는 판 보이 차우나 판 추 친과 결별하고 레닌의 혁명적 대의를 붙잡고자 한 상징적 행위로 봐도 좋을 것이다. 4. 느낀 점: 호치민의 계속 주제로 끌어들이는 민족해방은 식민지 확장으로 삶의 기반을 이루고 유지하고 있는 유럽인들에게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하고 싶은 문제였던 것 같다. 어느 청년은 이를 지적하면서 과연 자신은 자신의 생계를 위협하는 불의적 기반에 대해 얼마나 정직할 수 있을지, 자신 안에 큰 방향 전환에 대한 용기가 있는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어느 분은 이런저런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깨지는 호치민의 삶을 보며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만번 이상을 손질해서 속을 비워내는 목탁을 연상했으며, 하나님이 그를 그처럼 깎고 다듬으셨다는 느낌을 받았단다. 동시에 자신도 속을 비워내야겠다고 비워내고 싶다고 한다. 5. 다음 모임은 1월 19일(토) 오후 2시에 있으며, 3장부터 6장까지를 중국,베트남의 혁명역사 연대표를 참고해 훑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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