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이런 식의 글쓰기는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습니다 2008년 01월 13일
작성자 박운양
zu ? 님께 님께서 자신과 글 제목을 모두 ? 로 표시 하셨기 때문에 저로선 어떻게 호칭할 방법이 없어서 난감합니다. 무슨 유령에게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식의 글쓰기는 정말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지나칠 수 없어서 몇자 적어 봅니다 이건 어디까지 추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짐작은 해 봅니다. 청파교회는 한국교회에서 아주 '특별한 교회'임에 틀림 없습니다. 기존의 교회들과 분명히 다른 지향점을 속도감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꾸준하게 실천하는 아주 드문교회입니다. 그렇다고, 기존의 교회의 틀을 부정한 대안교회 형식의 교회도 아 닙니다. 그래서 아주 다양한 분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제가 2002년 본격적으로 청파교회에서 뿌리내리 전에 저 또한 그러한 그리스도인 중 한명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등록은 안했지만, 청파교회 예배에 지속적이든, 간헐적이든 청파교회의 긍정적인 영향력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마 님도 그런 분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성신자들 중에 교회를 쑈핑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대안교회를 찾는 중?이라는 목적으로 교회공동체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들도 제 주위 를 보면 적지 않습니다. 아니면, 제가 완전히 착각했는지도 모르겠 습니다. 청파교회 교인으로 오랜동안 계신 분이 실 가능성도 배재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식의 글쓰기는 저로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물론 님께 서 그 직접적인 피해자였다면 저로선 깊은 위로의 말씀을 먼저 드립 니다. 하지만, 개인에게 있어서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을 어떻 게 받아 들여야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자기 입장이 있어야 책임있는 자세라고 봅니다. 여기에 대한 올바른 입장이 스스로 정리되지 못하면서, 우리는 쉽게 죄인으로 타인을 규정하고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간에게 있어서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에 대한 님의 견해와 제 생각이 많이 다른 것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 의견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정리하자면 세가지 입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개인에게 있어서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은 엄연히 분리되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현재 이 부분은 법적으로도 어느 정도 보장을 받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사고를 철저히 하는 분들은 특히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간통죄논란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폐지적인 입장에 서있다고 보여 집니다. 이것은 미국과 유럽의 선진사회들의 개인의 인권에 대한 발전적 흐름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견해에 대한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만일 그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나, 실용적인 입장에서 받아 들인다면, 스스로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사상으로 자신의 의식의 틀을 계속해서 규정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제 언급은 거의 사족에 해당할 겁니다. 둘째로, 개인에게 있어서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식논리에 있어서는 그럴듯 하지만, 실제적인 상황을 현실적으로 놓고 보면,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을 분리할 수 있는 범주 자체가 불확실한데다가, 인간이라는 존 재 자체가 결코 연극배우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닌 이상, 엄밀한 의미에서 사생활은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제가 주위에서 만나 본 사람들을 나름대로 면밀히 살펴보면, 이 분들 중에는 신앙적으로 근본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분들인 경우가 꽤 많은 편입 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시선을 감시카메라의 시선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이 입장을 따릅니다. 그리고 은밀하게 부정을 저지르고 그리고 끝까지 발뺌합니다. 제가 보기론 이런 분들의 신앙은 어쩔 수 없이 가식적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 리고 그가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게 되면, 그 교회에 막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까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이들의 정신상태는 도착된 정신상태에 가깝습니다. 셋째로, 좀 드물거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이들이 많지만 이 세번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기에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입장도 그렇고, 먼저 예수님의 입장이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현대 역사 속에서는 간디의 입장이 그렇고, 우리 역사 속에서는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입장이 세번째 입장이라고 봅니다. 제가 개인의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말씀드리면서, 간통죄로 비약한 부분이 있지만, 님께서 올리신 글의 핵심 내용도 그렇고 저도 근거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 아는 분을 통해서 예수마실 교회에서 정강길님 주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기에, 이 세번째 입장에서 보고 있는 분들의 입장을 말씀드립니다. 먼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 오산학교에서 함석헌 선생님을 만나셨을 때, 이렇게 반가워하셨습니다. "내가 자네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에 왔구먼" 그런데,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가 주위에 몰려드는 여성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시고, 다시는 그를 자신의 제자라고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주위에 자신의 삶과 사상을 따르고 함께 하는 이들을 위해서 어찌보면 선언적으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치열한 노력을 통해서든, 인도의 마하리쉬의 경우처럼 갑자기 습격한 어쩔 수없는 입장이든, 구도의 단계에서 반드시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큰 가르침을 주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에게서 앞에 제가 열거했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 그리고 현대에선 간디나 다석 유영모 선생님 모두에게서 공통된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는 결혼하지 않는다. 그런데, 결혼한 후 깨달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성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부부는'해혼'을 하시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제가 보기론 이 분들의 입장은 근본에 있어서 하나(느)님-神앞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와 자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같은 부모를 둔 형제와 자매가 결혼을 할 수 있는냐는 것이지요. 이것은 고행의 과정을 통해서 득도를 얻기위한 애초로운 수행자들의 색욕을 금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들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기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 함석헌선생님을 마음으로 끝까지 사랑하셨지만, 그렇게 안타까워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입장에선, 함석헌 선생님도 같은 지평을 공유하는 그전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같은 형제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직 이전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이라는 안타까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몸으로서 중심이 된 나와 '얼나' 그러니까 '참된 나'는 분명히 다르다고 그것을 예수께선 30전에 깨달을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고, 자신은 15세에 그리스도인 되어서 38년이 지나서야 겨우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갑자기 글이 다석 유영모 선생님께 집중된 감이 있지만, 전 이 세번째 입장을 지향하는 이들 중 한명이고, 그리고 저도 역시 넘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날아 오를 수는 없어도, 날아 오르려 발버둥치지 않으면, 인간은 타락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입장이 제 입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강길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몇 번 보고 악수만 한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현재의 한국 교회를 보는 지평 속에서 치열한 이론적인 작업을 수행하셨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 는 많은 이들에게 소중한 인싸이트를 주고 계신 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앞으로도, 더 소중한 일들을 많이 하셔야 할 분입니다. 물론, 그런 행동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이런 공적인 공간인 청파교회 홈페이지에서 님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비방의 글은 전혀 무익하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 인신공격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이런 글이 정강길님이 앞으로 감당할 긍정적인 역할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주서없는 편지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제 의도를 곡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넘어지면서 깨달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그 치열한 넘어짐의 과정 속에서 양적인 수행이 질적인 수행의 단계로 변화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모두 도정에 있습니다. 어쩌면 태어나는 것은, 아니 죽는 것조차 정해져 있을 지 모르지만, 깨닫는 것은 각자 선택의 몫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시의 하강과 치열함의 상승이 만나는 그 지점 속에 우리의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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