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독서모임 4-팔레스타인의 눈물(2) 2007년 11월 03일
작성자 박어진
1.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 모리드 바르구티 저자는 30년만에 자신의 고향으로 망명하는 행위를 요르단에서의 다리건넘을 통해 그리고 있다. 암만에서 다리로, 다리의 대기실에서 초소로, 초소에서 고향으로의 정지로 이어지는 이동은 저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암만에서 다리를 향할 때엔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된 사연을, 카이로에서의 대학생활과 그곳에서의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체류허가증을 갱신해야하는 이방인이 된 과거를 회상한다. 저자에게 땅의 의미는 굴욕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대기실에서의 일상에 대한 기억은 작은 표현이 자아내는 감동을 주는 시적효과를 가진다. 난민은 평범한 삶을 박탈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초소에서는 기억이 환기해내는 가싼 카나파니, 나지 알 알리와 같은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는다. 이런 부재와 현재의 뒤섞임은 난민의 실존을 더욱 확실히 보여준다. 시인인 저자는 중간중간 몇 단어(다리, "마침내! 내가 걸어간다" "몇 걸음 걸었다")를 가지고 이야기를 밀어가고 있다. 문체는 글쓴이 생각의 방식을 결정하기에 저자의 어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로는 나지힌(고국에서 추방당한 난민), 적신월사(이슬람 국가에서 적십자사를 이르는 말로 표시는 붉은 초승달), 키파(유대인 남자 신도가 쓰는 작은 모자) 등이 나왔다. 2. "귀환" - 자카리아 무함마드 죄수들의 것과 같은 녹색신분증으로 규정되는 귀환자 무함마드로 고향에 망명해서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난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이름 말살을 통해 난민들을 길들이려는데에 굴욕감을 느끼고 있다. 순례를 떠나려했던 저자 아버지의 언급에 이슬람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육신오행 중 오행을 배웠다. 하나, 알라가 참 신이며 무함마드가 최고의 선지자라는 신앙(샤하다)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이며, 둘, 자기정화를 위한 예배 특히 정해진 시간에 하루 5번 하는 기도이며, 셋, 자카트 즉, 구제금 납부의 의무이다. 넷, 금식이며(한달동안 지속해서 하는 금식은 '라마단'이다), 다섯, 성지순례의 의무이다.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 앞에는 '하츠'라는 존칭을 붙인다. 3. 폭력의 현실이 압도적인 때에 종교의 할 일은 무엇인가? 세계전쟁 뿐 아니라 페스트,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중세부터 어느 사회에서나 유대인은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 그 피해자들이 오늘의 잔인한 가해자로 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방향으로 삶의 반응이 갈린다. 하나는 복수자로 돌아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이를 승화시켜가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고난을 거친 한국은 세계사의 하수구가 되어 더러운 것을 걸러내되 스스로는 더러워지지 않아야 하겠다고 하였다. 간디의 '비폭력'은 satyagraha 즉, 본질을(satya) 붙잡는(graha) 적극적 개념이었다. 진리파지에 실패하면 무기력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며, 여기서 ahimsa인 불살생이 나온 것이다. 이 각성의 요구가 종교에게 들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힘있는 자가 정의를 규정하는 오늘, 시민사회에 변혁의 힘으로 작용하기 위해 종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4. 다음 모임. 11월 10일 모임은 쉽니다. 11월 17일 토요일 2시에 싸하르 칼리파의 <<가시선인장>>(한국외국어대학 출판부)로 모입니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