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살아갈 용기
괴테와 쉴러의 도시인 바이마르를 찾아가는 길은 오랜 과거와 만나는 길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며 회의와 번민으로 생을 허비하는 것 같은 조바심이 들 때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대목을 떠올리곤 했다.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 그 말은 종작없는 방황조차 따뜻하게 감싸는 품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보일 때 "지혜로워질 용기를 가지라"고 했던 쉴러의 말은 얼마나 큰 위안이었던가? 그는 천성의 무기력과 심정의 비겁함이 세워둔 방해물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용기라는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에 젖어들 때마다 그 말은 혼곤한 의식을 일깨우는 장군죽비가 되곤 했다.
하지만 괴테와 쉴러의 숨결을 만나리라는 기대와 상념은 이내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차량의 행렬 때문이었다. 그 엄청난 속도감은 사색을 허락하지 않았다. 속도와 생각은 양립하기 어렵다. 피에르 쌍소는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참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오직 이동 통로로서의 역할만 기대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한다. 아우토반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눈팔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 길은 멋진 숲을 보거나 새소리를 듣기 위해 멈출 수 없는 길이었다.
괴테와 쉴러의 도시에서 보낸 반나절은 느긋했지만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다시 속도의 무게감에 압도당하는 시간이었다. 긴 여정에 지쳐 간간이 나누던 대화도 뚝 끊기자 괴테와 쉴러는 사라졌고 빨리 숙소에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해졌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그루네발트 숲길에 접어들자 질주하던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마치 만유하듯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안내자는 내 표정에 스친 의문부호를 재빨리 읽고는 그 길의 제한속도가 시속 30km라고 말했다. 숲에 살고 있는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일체의 차량 통행이 금지된다고도 했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들도 희미한 전조등을 켠 채 느릿느릿 그 숲을 통과하고 있었다. 돌연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함이 복부 깊은 곳에서 치밀었다. '아, 이들은 이렇게 사회적 약속을 지키는구나!'
당연한 것이 오히려 낯설 게 느껴진 것은 반칙이 일상화된 곳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홀로 감동하고 있던 그 때 어둑어둑한 숲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붉은 여우 한 마리를 보았다. 몽환적 광경이었다. 그 여우는 마치 평화는 속도를 줄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모두가 속도에 취해 날뛰는 세상에서 '지혜로워질 용기'를 가지고 느릿느릿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