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무렵
양파에 매운 맛이 들려는지 성탄 무렵 칼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연말을 맞아 가뜩이나 엄부렁하던 마음이 더욱 움츠러든다. 빨간 방울 달린 모자를 쓴 아이들이 앙증맞은 율동과 함께 부르는 캐롤을 들으며 벙싯 웃어도 보지만 마음 한켠의 어둠은 좀처럼 스러지지 않는다. 내면의 부실함을 가릴 옷자락을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게다가 ‘저 들 밖’, 엄동의 거리를 바장이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자책감 또한 크다. 예배당 벽면에 달아놓은 저 휘황한 별빛으로도 밝힐 수 없는 어둠이 지극한 시대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길거리로 내몰린 노숙인들, 불기조차 없는 쪽방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일터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칼바람과 마주선 이들, 공부 못한다고 가난하다고 교육적인 배려조차 받지 못한 채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 같은 반 친구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중학생과 그 가족에게 성탄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의 어둠을 밝히려는 이들이 있다. 쇠 항아리를 둘러쓴 것 같이 암담한 세상에 틈을 만들고 그 속에 인간다움의 숨결을 불어넣는 이들 말이다. 그들 덕분에 우리가 산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갓난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의 제유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아기가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역설 중의 역설이다. 생명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세상의 꿈으로 오신 예수는 지금 품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 상처입기 쉬운 존재, 폭력에 의해 언제든 유린될 수 있는 존재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보호자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오시는 분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아담의 창조’가 떠오른다. 하나님은 앞으로 태어날 아기 예수와 천사들을 외투자락으로 감싼 채 갓 창조된 아담에게 손을 뻗어 그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계신다. 반쯤 몸을 일으킨 아담도 하나님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닿을락말락한 하나님과 아담의 손가락은 유한과 무한의 접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 긴장된 정지 속에서 창조가 일어난다. 예수,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뻗은 하나님의 손이다. 새 창조가 일어나려면 이제 우리가 그분을 향해 손을 내밀 차례이다.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13세기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성탄절기에는 배고픈 이들이 배를 채우고, 황소와 당나귀도 여분의 건초를 얻어 우쭐거리고, 자매인 종달새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박하지만 거룩한 염원이다. 이 마음이 없어 세상이 어지럽다. 하지만 지금 제 살과 피를 녹여 새 날을 잉태하는 사람들이 우줄우줄 걸어오고 있다. 바야흐로 빛의 절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