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마태복음산책4 2015년 06월 23일
작성자 김기석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본문 / 마16:13-28


삶의 진실은 진지한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기 위해 노력할 때 드러난다. 예컨대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신 하나님의 질문은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은 누군가의 요청에 응답해야 할 인간의 책임을 상기시켜준다. 인간의 인간됨은 '나는 ~이다'라고 말할 때 '~'에 해당하는 '술어'로서만 드러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생명의 빵', '빛', '길이요 진리요 생명', '부활', '양의 문', '선한 목자', '포도나무'로 표상된다. 진지한 질문 앞에 서지 못할 때, 질문을 받아도 농담으로 얼버무리려 할 때 삶은 오리무중이 된다.


예수의 일행은 이스라엘 영토의 최북단에 해당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다. 분봉왕인 빌립이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재건축한 로마식 계획 도시였다. 빌립은 자신의 이름과 황제의 호칭을 넣어 도시 이름으로 삼았다. 로마의 신들을 모시기 위한 신전이 세워졌고, 로마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 활용될 극장이 들어섰다. 그곳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순된 공간이었다. 꺼림과 매혹이 공존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련된 로마 문화는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자기들의 정체성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혁명적 고백

바로 그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에 대한 세상의 평판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으셨던 것일까? 자기가 쓴 글에 달리는 댓글 수에 민감한 이 시대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질문을 곧이곧대로 듣고 들은 대로 대답한다. 세례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이도 있고, 엘리야나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것 같은 예수의 언행을 보며 예언자를 떠올렸던 것 같다. 하지만 예수의 관심은 군중들의 설왕설래가 아니었다. 그래서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자기의 실존 전체를 걸고 답해야 하는 물음이다.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은 그 순간부터 예수와 동고동락한 베드로의 고백은 주체적이고 실존적이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고백에 비해 상당히 신학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고백의 혁명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고백이 발설된 장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루어졌다. 황제의 도시 혹은 로마 문화의 첨병인 도시, 로마인들이 숭상하는 신상들이 도처에 깔린 도시에서 베드로는 갈릴리 의 목수 출신의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이 고백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고난 예고

예수는 베드로의 그런 고백을 장하게 여기시며 그런 인식은 인간의 지식이나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며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신다.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가 주어진다. 이 대목은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22:22)는 대목과 연결된다. 그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는 영예로운 사명까지 주어진다. 이것을 땅에서 풀 수도 있고 맬 수도 있는 종교적 특권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교권주의적인 오해일 뿐이다. 교회에 주어진 소명은 그 열쇠를 푸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인식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의 고백에는 한 가지가 누락되어 있다. 그것은 고난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겪게될 고난에 대해 말하자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예수에게 항변하다. '항변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꾸짖은 것이다. 조금 전까지 베드로를 칭찬했던 예수가 낯색을 바꾼 채 베드로를 준엄하게 꾸짖으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고난이 누락된 신앙고백은 이처럼 허약하다.


예수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한다.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당신을 위해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신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삶으로 나아감이지, 한가로운 산보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 길은 좁은 길이 아니던가.
























산 위의 현실과 산 아래의 현실

본문 / 마17:1-27


제자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으로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예수의 수난 예고로 급격히 냉각되었다. 영광스러운 날이 열리기를 기대했지만 어둡고 캄캄한 날이 그들 앞에 놓였음을 그들은 짐작이라도 했을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리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17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산 위에서

'엿새 후'라는 말은 이전의 보도 이후에 경과한 시간을 정확히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단어가 아니다. '엿새'는 어느 정도 내면의 혼란이 잦아들면서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나타나는 시간을 상징한다. 열 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세 사람만 따로 구별되었다. 그들은 아마도 마태 공동체의 중심 인물들일 것이다. '높은 산'이 헤르몬 산인지 다볼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높은 산'은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단어일 뿐이다. 옛 사람들은 산이야말로 신에게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산은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종교 전통에서 산이 없는 곳에 인공적 산을 만들고 그 위에 신전을 세웠던 것도 같은 이치이다. 


제자들은 그 산 위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스승의 모습과 만났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가시적인 형태로 구현된 것 같은 광경이었다. 비일상적인 그 광경 앞에서 그들은 넋을 잃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보았다.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주검을 남기지 않은 이들이다. 그들의 존재는 민중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홀연히 사라졌던 이들이 메시야의 날이 되면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순간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는 파우스트적 찰라였다. 황홀경에 빠진 베드로는 그 영적 스승들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한다.


홀연히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구름'은 성경에서 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올 때 들려온 그 소리가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다만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뿐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의 말은 곧 예수이다. 둘은 틈없이 일치한다. 예수는 이제 곧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그의 말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말을 기억하는 이들의 가슴에. 예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몸에 손을 대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이르신다. 그리고 산 위에서 본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당부하신다.


산 아래에서

그들이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는 간질병에 걸린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구한다.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다는 것이다. 이 젊은이의 증세를 간질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는 어떤 충격으로 인해 자기 통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모멸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식민지 백성들이 흔히 겪는 일이 아니었을까? 아들로 인해 아버지의 삶도 철저히 무너졌다. 제자들은 그 아이 앞에서 무능했다. 예수는 깊이 탄식한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17:17). 예수는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다. 귀신은 인격의 통합성을 깨뜨리는 압도적인 힘이다. 귀신의 전략은 '가르고 지배하라'(divide and rule)이다. 귀신은 사람들의 관계에 틈을 만들고 쐐기를 박아 갈라지게 하고, 인격을 조각내 자기로서 살지 못하도록 한다. 귀신보다 더 높은 영의 질서 속에 속한 이만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로서의 믿음만 있다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성전세를 바치는 이야기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기사이다. 이 일화는 베드로의 수위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해 마태가 전략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예수 일행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반 세겔 받는 자들이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느냐며 불퉁거린다. 예수는 아들은 세를 내지 않는 게 마땅하지만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 입을 열어 보라 이르신다. 고기 입에서 나오는 한 세겔를 가지고 가서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와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었다는 것은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다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가?

본문 / 마18:1-14


마틴 루터는 교회를 가리켜 '거룩한 창녀'라 했다. 거룩함을 지향하지만 여전히 옛 삶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도 분쟁과 갈등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마태복음 18장은 초대교회의 그런 질문을 염두에 두고 예수의 가르침을 들려준다. 


어린 아이처럼 된다는 것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와 오랜 시간을 동행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큼/작음, 높음/낮음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세속적인 척도를 '공감의 사랑'으로 해체하시는 예수 곁에 머물면서도 여전히 옛 도식에 따라 사고하는 제자들의 속기(俗氣)를 어찌해야 할까. 예수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는다. 아직 그들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신다. 예수는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운 후 말씀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 때묻지 않은 순진함 혹은 겸손함일까? 이 단락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신학자는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는 자신이 작은 자임을 인식하고 철저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이다. 의지한다고 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의 가능성보다는 하나님의 가능성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그 뜻을 수행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은 배움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 교회에서 이런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되기 일쑤이다. 가르칠 것만 있고 배울 것이 없는 양 처신하는 이들로 인해 교회 공동체는 위기에 빠진다. 자기 현시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칫하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2:15)가 될 수 있다.


5절은 앞의 단락과 뒤의 단락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 교회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않은 이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사고해야 한다. 그것이 곧 예수를 영접함이다. 강렬한 메시지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작은 자'와 자신을 끊임없이 동일시하신다. 작은 자들은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지워지는 존재들이다.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받기도 한다. 예수는 그들이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족하게 하지 말라

6절에 오면 '어린 아이' 대신 '작은 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둘은 실은 하나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 '실족하게 하다'를 새번역은 '걸려 넘어지게 하다'(새번역)로 영어 성경은 '죄짓게 하다'(ESV)로 번역하고 있다. 어떤 경우이든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삶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행태를 경계하는 말일 것이다. 독단적 태도, 교만함, 배려 없음, 냉랭한 시선, 모멸감을 불러 일으키는 말과 행동이야말로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릴 때가 많지 않던가. 바울 사도는 가난한 이들을 기다리지 않고 수행되는 주의 만찬을 가리켜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고전11:21-22)이라고 꾸짖었다.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일은 그 자체로 범죄이다. 예수는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는 몸의 지체를 찍어 내버리거나 빼어 내버리라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산상수훈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마5:29-30). 하지만 여기서는 개인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맥락 속에서 주어진 것이다. 마태는 작은 자 하나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10)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동체는 작은 자를 중심에 세울 때 건강해진다. 마태는 이 단락을 마감하면서 예수의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들려준다. 그가 참 목자라면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찾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99:1이라는 산술적 도식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불합리하다. 하나를 찾다가 나머지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타당하다. 잃어버린 하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모두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질서나 효율을 명분으로 해서 '하나'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사회는 때가 되면 '모두'를 버릴 수도 있는 법이다. 






















용서하라

본문 / 마18:15-35


권징의 유익

사람들의 모듬살이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사람들의 욕망과 생각이 백인백색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성숙함은 그런 차이들을 잘 조화시키는 데 있다. 공동체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여야 한다. 전체주의적으로 서로를 동화시키려 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 말이다. 조화란 서로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조화가 쉽지는 않다. 조화를 깨뜨리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 공동체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공동체의 조화를 깨뜨리는 일은 사소한 일일 수도 있고 심각한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과부들에 대한 구제 문제로 홍역을 치뤘음을 알고 있다. 고린도 교회가 교인들 간의 송사 문제와 성적 방종의 문제 때문에 흔들렸음을 알고 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잘못은 덮어두는 게 능사가 아니다. 물론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하는 허물도 있다. 문제는 권징(勸懲)되지 않은 죄가 다른 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는 잘못을 저지른 형제가 있다면 은밀하게 찾아가 권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런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권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를 외인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의 존재가 교회의 지향과 조화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는 언제나 어렵다. 


정수복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서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갈등회피주의'를 꼽고 있다. 한국인들은 공적인 영역에서나 사적인 영역에서나 문제가 발생하면 차이를 인정하고 합리적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재빨리 차이를 무마하려 하거나, 하나의 의견에 동조하도록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대립적 상황이 주는 심리적 불편함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등의 무분별한 봉합은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일 수도 있다. 오늘의 교회가 무기력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앙적 삶의 엄중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성화의 여정에서 낙오된 이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참회자반'(penitents)을 운영했다. 참회자반의 존재 자체가 신앙적 삶에 긴장감을 부여했을 것이다. 마태는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주어진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을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교회의 과제는 매는 것이 아니라 푸는 데 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는 말씀은 흔히 합심기도의 능력을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되곤 했다. 하지만 이 말은 교회 안에서 벌어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복되게 여기신다는 뜻으로 새겨야 할 것이다. 


용서의 용기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된다. 베드로가 예수께 묻는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 우리는 용서의 어려움을 잘 안다. 진정한 참회가 전제되지 않은 화해와 용서는 불가능하다. 용서 이후에도 같은 행동이 반복된다면 그의 참회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징표가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히 용서해야 하는가? 베드로의 질문 속에는 이런 의문이 담겨 있다. 예수의 대답은 혁명적이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라멕의 노래를 참조해야 한다. 가인의 4대 손인 라멕은 두 아내 아다와 씰라에게 자기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자기에게 상해를 입힌 자를 가차없이 응징했다고 말한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4:24). 가인을 해치는 자가 일곱 배의 보응을 받는다면 자신은 칠십칠 배로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일곱 번을 일흔 번'과 '칠십칠 배'의 차이가 있지만 이 두 대목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라멕의 노래를 뒤집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상대에게 받은 것 이상으로 보복하려는 마음을 아예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악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은 가진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는 왕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자기를 가엾게 여겨 달라고 애원했고 그 빚을 탕감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가혹하게 대했다. 받은 바 은혜를 타자에게 흘려보내지 못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자기의 빚 탕감 선언을 취소하고 그 비열하고 악한 종을 옥졸들에게 넘겨주어 괴롭히게 했다. 값없는 은혜를 입고도 자기 속에 있는 이기심과 분노를 극복하지 못한 자는 불행하다.























결혼의 본질

본문 / 마19:1-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1). '이 말씀을 마치시고'라는 구절은 하나의 단락이 마무리 될 때 마태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참고. 7:28, 26:1). 이로써 마태는 이제 예수 이야기가 새로운 단계로 옮겨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라는 구절은 이후에 벌어질 일을 위한 배경이 되는 셈이다. 어디에 가든 예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마태는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고 말한다. 어떤 병을 고치셨는지는 알 수 없다. 육체적 질병은 물론이고 오랜 식민지살이에 지치고 상한 이들의 마음까지도 고치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고치시다'라는 말과 늘 붙어다니던 '가르치셨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난의 여정인 예루살렘 길에서 예수는 더 이상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남겨질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실 뿐이다. 


이혼의 악용을 경계하다

16장 이후에 등장하지 않던 바리새인들이 다시 등장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그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을 가지고 찾아왔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 이혼 문제는 랍비들 사이에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는 복잡한 문제였다. 그들은 예수를 그 논쟁에 끌어들여 상처를 입히려 한다. 신명기 법전은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신24:1)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수치되는 일'이라는 구절은 내포와 외연이 불확실한 말이기에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에 의해 오용될 소지가 많다. 


바리새인들의 질문 속에는 또 하나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세례자 요한은 헤롯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결혼한 사실을 비판했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한 마디로 이혼 문제는 당시에 민감한 사안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그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끌어들이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대답을 하든 예수는 논쟁의 중심에 설 가능성이 많았다. 예수는 그 질문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결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밝힌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그들을 하나 되게 하심으로 서로를 돕는 배필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부부는 서로를 향상시킬 책임이 있다. 예수는 결혼을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 관계는 임의로 해소되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들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한 모세의 말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냐고 묻는다. 그들은 모세의 말을 거칠게 왜곡하고 있다. 예수는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것은 완악한 인간의 현실을 소극적으로 수용한 것일 뿐이라면서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9)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전통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의 뿌리에 사회적 강자인 남자들의 저열한 욕망이 있음을 폭로한 것이다. 제자들도 사회적 에토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11절과 12절은 자발적인 독신에 대한 평가인데 이것은 이야기의 맥락에서 좀 벗어나 있다. 초대교회의 관심사가 어설프게 이 단락에 반영된 것 같다.


열린 공동체

마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한 논의를 보도한 후에 또 다시 어린 아이들을 등장시킨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3). 성경 이야기를 그린 그림에 익숙한 이들은 풀밭에 앉은 예수에게로 두 팔을 벌린 채 달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하는 예수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하지 않은가. 무정한 제자들과 다정한 예수의 대비가 뚜렷하다. 하지만 이 대목은 그런 낭만적인 상상을 위해 할애된 것은 아니다. 


마태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가 여느 공동체와 구별됨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 세계에는 로마가 허용하는 공식적인 종교 외에도 비밀스러운 제의의식이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곡물의 신인 데메테르의 죽음과 소생을 재현하는 엘레우시스 제의,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거행되었던 미트라 제의, 술과 도취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제의, 오르페우스 제의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밤중에 모여 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빵을 나누고, 입문의식으로 세례를 베풀고,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가르쳤던 기독교 여시 또 다른 밀의 종파로 오해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그렇기에 기독교가 남자와 여자는 물론이고 어린아이들까지 다 참여하는 건전한 가족 종교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마태가 아이들을 사람들 가운데 불러 세우거나, 품에 안고 안수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려보여주는 것은 초대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뢰의 모험

본문 / 막19:16-30


남들이 부러워 할만한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욕망과 충족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능력의 증대는 성취에 대한 기대감을 저하시킨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먹고 산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공허한 삶이 있고, 골막한 형편이지만 흔흔한 삶이 있다. 불안과 공허는 시간 속에서 바장이는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무로부터 창조된 인간의 비애라고 말한다. 우리 속에는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구석이 있다. 


젊은 늙은이

어느 날 예수를 찾아온 청년이 그러했다. 공관복음마다 그를 소개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가 부자라는 사실에는 너나없이 일치하고 있다. 그는 젊은 데다가 부유하기까지 하다. 그만하면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주체하기 어려운 생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그래서 예수 앞에 나아와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자 묻는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마음 속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예수 앞에 나온 젊은 청년은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멀미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절박한 질문 앞에서 예수는 짐짓 거리두기를 한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17). 이 말씀 속에는 '선한 일'을 통해 영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청년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선하다'는 단어가 적용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목마른 그 젊은이의 질문을 진지하게 취급하신다. 그래서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한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에 자기 존재를 비끌어맨다는 뜻이다. 그런 실천을 다부지게 반복하는 동안 자아의 속박은 느슨해지게 마련이다. 청년이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는 십계명의 대인관계에서 언급되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덧붙인다.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 하고 묻는다. '이웃 사랑'의 계명까지 지켰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경건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나무랄 데가 없다. 문제는 마음의 불안과 공허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 이르신다.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온전함'은 흠 없음 혹은 완벽함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나뉘지 않은 마음을 뜻한다. 예수는 하나님께 오로지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부'라고 하는 또 다른 선택지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계신 것이다.


재물이 많았던 청년은 그 말씀을 듣고는 근심하며 떠나갔다. 그는 아직 불확실한 미래에 삶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재물이 주는 안정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젊지만 늙은 영혼인 것이다. 


천국과 부자

청년이 떠나가자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3a-24). '낙타와 바늘귀'라는 비대칭적 대조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합리적 해석을 시도한다. 낙타라고 번역된 단어가 실은 '밧줄'일 거라거나, '바늘귀'는 예루살렘 성에 있는 좁은 문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씀의 힘은 그 비대칭성에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에 좀 충격을 받았다. 유대교의 사회적 세계에서 '부'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로 여겨졌다. 그런데 예수는 부유함과 천국이 상호 배치될 수 있다고 말하신다. 물론 예수가 '부' 그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부가 주는 그릇된 안정성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여전히 그 부자 청년에게 마음이 가 있던 제자들은 마치 꿈을 꾸듯이 묻는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는 구원의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대답하신다.


베드로 역시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주님의 말씀 속에 담긴 속뜻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주님은 당신이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될 때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영광스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9)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박해에 직면하고 있던 믿음의 공동체에 한 줄기 빛처럼 작용했을 것이다.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현세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자꾸만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셈법

본문 / 마20:1-16


갈릴리 구릉지대와 산지는 지중해성 기후 덕분에 포도와 올리브 농사가 발달했다. 강수량이 적고 바닷바람이 적당하게 부는 따뜻한 여름을 지나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가을을 거치는 동안 과일들은 듬뿍 맛이 들었던 것이다. 가을 수확철이 되면 비가 내리기 전에 수확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무척 분주했다. 본문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갈릴리 농부들의 처지

예수는 그런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천국식 삶의 방식에 대해 가르치려 하신다. 물론 이 비유는 19장의 마지막 구절인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절)는 가르침을 예증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인력 시장에 나간 집 주인이 있었다. 그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는 아침 아홉 시, 열 두시, 오후 세 시에도 사람들을 고용했다. 그들에게는 '상당하게 주리라' 약속했다. 절박했던 사람들은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묻지도 않은 채 포도원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주인은 오후 다섯 시에도 장터에 나가 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이들을 붙잡고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서 있느냐"(6b)고 묻는다. 그들은 아무도 자기들을 품꾼으로 써주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낸다.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 비유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면 이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1세기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비록 가난하고 조촐했을망정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자기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우느라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헤롯은 돈을 조달하기 위해 무역에 매달렸고, 무역을 위한 특화 작물 재배를 농부들에게 강요했다. 그는 갈릴리 호수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어부들에게도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동시에, 잡은 물고기를 자기가 세운 염장 공장에 헐값으로 넘길 것을 요구했다. 어부들과 농부들의 삶이 급격히 악화된 것은 물론이다. 특화된 작물 재배는 위험부담이 큰 농법이었다. 기후 변화에 민감했을 뿐만 아니라 땅을 척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흉년이 들면 가난한 자작농들은 생필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들은 땅을 담보로 하여 빚을 질 수밖에 없었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은 결국 그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소작농들의 삶은 참혹했다. 지주에게 바쳐야 할 지대가 수확의 35-40%에 이르렀고, 게다가 로마가 부과한 세금과 종교세까지 내고 나면 농부들의 손에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 형편이 지속되면 그들은 농노가 되거나 날품팔이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본문의 삶의 자리이다. 아무도 써주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이들은 게으른 이들이 아니라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절박한 처지에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공평

비유는 계속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마침내 결산의 시간이 되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삯을 지불하라고 이른다. 그런데 그 순서가 통상적이지 않다. 보통은 맨 처음에 온 사람들부터 계산하는 법인데,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사람까지 삯을 주라 한다. 청지기는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다. 착오가 아니라면 전혀 예기치 못한 후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먼저 온 이들은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에게 주어질 더 큰 보상을 설렘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보상은 없었다.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고는 주인을 원망한다. 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땀흘리며 일한 자기들과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이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형평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의 대답은 단호하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3). 말인즉슨 옳은 말이다.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마음의 불편함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주인의 관대함이 어떤 이들에게는 상처가 된 것이다. 하루 종일 일한 이들의 불평은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눅15장)에 나오는 큰 아들의 불평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셈법은 낯설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절박한 동료들에게 베풀어진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일 아량도, 그것을 함께 기뻐할 인간적 깊이도 없다. 오직 계산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진정한 공평은 산술적 평등이나 딱 맞아떨어지는 계산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했다. 은혜는 언제나 인간의 계산을 넘어선다. 


포도원 주인의 활수(滑手)한 마음 씀을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국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오늘도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5). 하나님 나라는 가장 절박한 처지에 빠진 이의 곤경을 해결해 주기 위해 마음을 모을 때 이 땅에 도래한다.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

본문 /마20:17-34


지배의 욕망을 해체하라

예루살렘을 향한 길 위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훈련시켜 홀로 설 수 있도록 하려 한다. 비교적 암시적이었던 앞서의 수난 예고(마16:21, 17:22-23)와는 달리 세번째 수난 예고는 매우 구체적이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 그의 죽음에 연루될 성전 체제의 최고 실력자들과 이방인 집권자가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고, 그가 겪어야 할 모욕과 폭력적인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초대교회의 기억에 의지한 사후적인 예언일 것이다. 세번씩이나 반복된 수난 예고가 의도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우연히 벌어진 불운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것을 일러 선택적 지각이라 한다. 마태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를 등장시킨다. 그 여인은 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 앞에 나아와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하고 청탁을 한다. 어쩌면 메시야의 나라가 임하면 예수의 측근 제자들이 중용될 거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태가 두 아들의 장래를 청탁하는 한 여인을 등장시킨 것은 대중들의 그런 관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여인은 대중들의 몰이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대중들만 예수의 길을 오해한 것은 아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그 여인이 아니라 두 제자를 향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 예수는 야고보와 요한의 헛된 꿈을 책망하시기는커녕 제자의 길을 걸으려는 이가 치뤄야 할 값을 치를 용의가 있느냐고 물으신다. '내가 마시는 잔'의 표상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그 의미는 같지 않다. 예수의 잔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이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을 가리킨다. 이 잔은 성 목요일의 저녁 만찬에서 나누는 '언약의 잔'을 예비하고 있다. 두 제자는 "할 수 있나이다" 하고 대답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는 그들이 그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영광의 자리에 앉는 일은 전적으로 하늘 아버지께 달려 있다고 말한다. 


다른 제자들 역시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세번이나 반복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 체계 안에는 아직 '고난'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낸다. 화를 낸다는 것은 차마 발설하지 못했을 뿐 그들도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아직 자기 부정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새로운 공동체의 꿈을 그들에게 제시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5-27). '임의로 주관'이라는 구절과 '섬김'이라는 단어가 대조되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해체되고 서로를 섬기려는 열정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고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예수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


누가 눈 뜬 자인가?

여리고에서 떠날 때 벌어진 일은 제자들의 무지와 대조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여전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앞 못보는 사람 둘이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외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0). 키리에 엘레이손! 어쩌면 이것은 마태 공동체가 반복적으로 드린 기도였을 가능성이 많다. 사람들이 '잠잠하라'며 두 사람을 꾸짖지만 그들은 더욱 소리를 높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한다. 예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묻는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2). 21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던졌던 질문과 거의 유사하다. 그 두 형제는 세속적인 힘을 구했지만, 앞 못보는 두 사람은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대답한다. 눈을 뜬다는 말은 시력이 회복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태는 이 단어를 중의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예수는 절박하게 눈 뜨기를 원하는 이들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의 눈을 만지시자 곧 볼 수 있게 회복되었고, 그들은 곧 예수를 따라나섰다. 예수의 길을 걷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마태가 17장 이후에 사라졌던 치유 이야기를 이 단락에 배치한 것은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앞 못보던 이의 눈이 열릴 것이라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 못보던 이들이 예수를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은 참으로 적실한 고백이었다. 누가 보는 자인가? 제자들의 눈은 여전히 어두웠고, 여리고 길 가의 두 맹인은 눈을 뜬 사람이 되었다.





















아, 예루살렘

본문 / 마21:1-22


랍비 문헌들은 예루살렘을 우주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예루살렘은 또한 다윗과 깊이 연루된 도시이다. 그는 여부스인들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야훼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도 옮겨왔고, 아들 솔로몬이 세우게 될 성전의 기초도 닦아놓았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약 400년,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과 성전이 바빌론의 손에 무너지기 전까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는 명운을 함께 해왔다. 예루살렘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순례의 중심이었다. 성전이 있던 산에 오르는 것은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실재를 향한 상승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두 행렬

예수는 이제 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는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면서 그곳에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 이르셨다.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당부도 덧붙이셨다. '주'라는 단어는 피조 세계에까지 미치는 예수의 주권을 담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태는 이런 지시가 스가랴서 9장 9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명토박아 말한다.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자 예수가 그 위에 타셨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폈고,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 메시야를 환영하는 의례인 셈이다.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예수 일행을 반긴다. 찬양의 내용을 '호산나'라는 단어가 감싸고 있다. '이제 구원하소서'. 이것은 할렐 시편의 마지막 시인 시편118:25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성이 소동했다고 말한다. '소동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지진이 일으키는 움직임을 뜻한다. 예수라는 존재가 자체가 기존 질서의 바탕을 뒤흔들었음을 암시하는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다른 하나의 행렬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수많은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오랫동안 이방 민족의 압제를 받아왔던 그들의 울분이 고조되기 쉬웠다. 언제든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총독은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이동시켰다. 깃발을 앞세우고 기마병들이 위풍당당하게 행진했다. 그것은 반란은 꿈도 꾸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나귀를 타고 느릿느릿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의 행렬은 그런 로마의 무력 시위에 대한 일종의 조롱 혹은 폭력과 공포에 바탕을 둔 통치 행위에 대한 부정이었다. 말이 전쟁을 상기시킨다면 나귀는 평화를 상기시킨다. 


성전 정화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예수의 거룩한 분노를 보여준다. 예수는 성전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말씀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13). 예수가 분노한 것은 성전에서 벌어지는 상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물을 공급한다는 미명하에 제사장들과 상인들 사이에 맺어진 탐욕의 카르텔에 분노하신 것이다. 성전은 거룩함과 편의 제공을 빙자한 채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던 성전 체제에 의해 이미 더럽혀져 있었다. 제도화 된 종교와 종교인들은 넉넉한 물질이 주는 안락함과 특권에 길들여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질을 포기하게 된다. 예수는 자기 앞으로 나오는 맹인과 저는 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그들은 몸이 성치 못하다 하여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었다. 예수는 이 치유행위를 통해 성전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맹인과 저는 자인가? 마태는 이 사건을 통해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죽였던 사실(삼하5:8)을 상기시키려 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의 명예를 지키고 또 살아남기 위해 죽여야 했지만 다윗의 자손인 예수는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회복시키는 분으로 오셨다. 바로 그런 회복의 현장에서 아이들이 '호산나' 찬양을 올렸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노기띤 음서으로 그들을 꾸짖으라 요구했지만 예수는 시편 8편 2절 말씀을 인용하여 그 청을 물리치고는 베다니로 물러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 일행이 성으로 들어오실 때 예수는 시장하셨다. 그러던 차에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가갔지만 잎사귀 밖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예수께서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자 그 나무가 곧 말라버렸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구절 앞에서 당황한다. 예수의 처사가 온당치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무화과는 대개 6월 경이 되어야 무르익는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단 사건 그 자체에 윤리적 가치기준을 적용하지 말고 그 행위의 상징성에 주목해야 한다. 마른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흔히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나타낼 때 쓰는 은유이다. 그런데 마태는 이 사건을 슬쩍 믿음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시킨다. 성전보다 중요한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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