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5-둘이서 함께 걷는 길 2015년 06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둘이서 함께 걷는 길


잘 지내시지요?

이제 결혼식이 몇 시간 남지 않았군요. 가슴 시리면서도 아름다웠던 그 사귐의 시간을 조금은 알고 있기에 두 분의 맺어짐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하고 싶습니다. 유대인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 속에는 인생길에서 우리가 만난 수많은 이들의 흔적이 배어 있습니다. 길가에 서 있는 나무의 상처와 옹이는 나이테와 더불어 그 나무가 견뎌온 세월을 보여줍니다. 그건 우리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각자가 거쳐온 시간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만남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어진 만남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그러하고 형제자매 간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이것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기에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택한 만남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이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요? 따지고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서 우리가 이 세상에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도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데,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이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겁니다. 천재일우千載一遇란 말로도 만남의 신비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옷깃을 스치는 모든 이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는 못하기에 만남의 대상을 제한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택은 그를 나의 존재의 터전으로 초대하는 행위인 동시에 그의 존재 마당에 나 또한 초대받기를 소망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바람이 어긋날 때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친구, 스승, 동료, 연인들은 우리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타자들입니다. 그들과의 만남이 우리 삶의 질과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이들의 고백을 들어보셨는지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혹은 운명이 자기들을 맺어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자기들이 능동적으로 선택한 만남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큰 뜻'으로부터 주어진 만남이더라는 것이지요.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 중에 서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 또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 흩어 사라지게 할 때까지 함께 있으리라.

아, 그대들은 함께 있으리라, 신의 말 없는 기억 속에서까지도."

(칼릴 지브란, <예언자>, 강은교 역, 문예출판사, 1979년 11월 30일, p.20)


시인은 결혼에 이르는 이들은 '함께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산문 정신에 투철한 사람에게는 이상한 말이지만 시적 상상력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말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시며 참 좋아하셨습니다. 이레 동안의 창조 이야기 가운데서 '좋았더라'라는 구절이 일곱 번 울려 퍼집니다. 그러다가 한 대목에서 느닷없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성경은 생명의 본질 혹은 아름다움은 함께 있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서로 비스듬히 기댄 채 한 세월을 사는 존재입니다.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인간을 '서로 함께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지낸다는 것이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연애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상대방의 낯선 모습에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 낯섦을 품어 안을만한 여백이 없을 때 불처럼 타올랐던 사랑은 차가운 재만 남긴 채 꺼져 버리기도 합니다. 사랑의 위기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그러한 낯선 모습이야말로 두 사람의 사랑을 크고 깊게 만들기 위한 기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볼까요.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 저희의 빵을 주되, 어느 한 편 빵만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칼릴 지브란, 위의 책, p.20)


지브란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 친밀해진 나머지 서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 못할 때 결혼은 불의의 연대가 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편들기는 삶의 성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곤 합니다. 나는 가끔 부부가 되려는 이들에게 '사랑하면서의 싸움'(liebender Kampf)을 권합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에게서 빌려온 개념입니다. 그는 참된 의미에서의 만남은 성실하게 자기와 타자를 밝혀나가려는 공명화(公明化)로서의 사귐이라고 말합니다. 이 싸움은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타자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끌기 위한 싸움입니다. 나를 만났기에 상대방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두 사람을 맺어주신 분의 뜻이 아닐까요?


결혼을 신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낭독하는 서약입니다. 두 사람의 앞길에 늘 장미꽃만 피어 있지는 않을 겁니다. 가끔은 시련을 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두 분이 되새겨야 하는 것이 결혼의 서약입니다. 그 서약을 충실히 지킬 때 결혼의 나무는 든든하게 서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타자인 배우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의 실패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결혼은 온전한 사랑을 얻기 위한 영웅적인 모험 여정의 출발입니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인생길에 늘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두 분이 마주잡은 손의 온기로 시린 가슴을 부여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보듬어 안으십시오. 두 분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불화했던 사람들이 화해하고,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이 희망을 되찾게 되고, 낯빛 어둡던 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분이 오순도순 다정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목마른 누군가의 샘물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두 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글을 마치면서 아파치족 인디언들의 결혼 축시를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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