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4-어느 장인의 작업실 2015년 06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어느 장인(匠人)의 작업실


안녕하세요? 벌써 절기는 망종에 접어들었습니다. 분주한 일정에 따라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벌써 초여름의 문턱을 넘고 있네요. 보리 추수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부지런한 농부들이 내다 심은 벼포기가 제법 자리를 잡은 듯 보이더군요. 바람이 불면 제법 흔들흔들 춤도 추면서 한 계절을 넉넉히 살아내는 거겠지요. 도시에 살고 있지만 제 몸 속 깊은 곳에 새겨진 계절의 리듬을 잊지 않으려고 서재 뒤편 손이 닿는 곳에 <농가월령가>를 두고 지냅니다. 달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의 노래를 찾아 소리내어 읽습니다. 그럴 때면 떠나온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물결처럼 번져오기도 합니다.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가 대대로 살아온 삶의 방식을 떠올리면 괜히 가슴이 울컥해지기도 합니다. 나이가 드는 증거일까요?


오월이라 중하(仲夏)되니 망종(芒種) 하지(夏至) 절기로다

남풍은 때 맞추어 맥추(麥秋)를 재촉하니

보리밭 누른빛이 밤사이 나겠구나

문 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打麥場) 하리로라

드는 낫 베어다가 단단히 헤쳐 놓고

도리깨 마주 서서 짓 내어 두드리니

불고 쓴 듯 하던 집안 졸연히 흥성(興盛)하다

멍석에 남은 곡식 하마 거의 진(盡)하리니

중간에 이 곡식이 신구(新舊)상계(相繼) 하겠구나!

이 곡식 아니려면 여름 농사 어찌할꼬?

천심(天心)을 생각하니 은혜도 망극하다


가난하고 소박했지만 나름대로의 흥겨움이 있고 생에 대한 감사가 있던 그 시절은 어디로 흘러가버린 것일까요? 온 나라가 메르스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잘 알고 지내는 분의 가족이 메르스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아뜩한 슬픔을 가눌 길 없었습니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날 때마다 온 나라가 법석을 떠는 것은 그만큼 정부의 대처가 미흡했기 때문일 겁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유동하는 공포'가 스멀스멀 우리 삶 가운데 스며들고 있습니다. 유동하는 공포는 고체의 공포와는 달리 대상이 불확실합니다. 뭔가 있기는 있는데 그 실체가 무엇인지 특정할 수 없을 때 공포는 확산되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거라사에 가셨을 때 무덤 사이에서 살던 광인을 만납니다. 그는 귀신들린 사람으로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는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내 이름은 레기온'이라고 대답합니다. 불확실하던 실체가 객관적 실체로 포획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는 그 귀신을 꾸짖어 내쫓았습니다. 공포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리고 그 공포의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취해야 할 수단입니다. 정부와 언론은 처음부터 우왕좌왕 했습니다. 이름을 붙이기는커녕 오히려 불확실성을 증대하는 쪽으로 작동했습니다. 무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미 공포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뒤에야 허둥지둥 대책이라고 내놓고는 있는 데, 그것을 곧이곧대로 신뢰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슬픈 세월입니다. 그래도 살아야지요. 


며칠 전 그 멋진 작업실에 초대해주시고, 지금 하고 계시는 작업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오르겔을 제작하는 모습을 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정말 제게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소리의 비밀을 일찍이 알아차린 이는 피타고라스라고 하셨지요? 대장간 옆을 지나가던 피타고라스가 대장장이의 망치질 소리가 조화롭게 들리는 까닭을 궁구한 끝에 망치의 무게와 소리 사이에 정수비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음악이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우주에 편만한 비례를 적절히 배치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작업장 곳곳에 있던 나무 소리통과 파이프 하나하나는 장인의 정성 그 자체였습니다. 오랫 동안 오르겔을 제작하면서도 후진을 키워내지 못한 것을 속상해 하셨지요? 큰 꿈을 품고 배우러 왔던 젊은이들이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슬그머니 물러서곤 하더라는 말씀을 하실 때는 참 쓸쓸해 보였습니다. 처음 독일에 갔을 때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현장에서 봉변을 당하곤 했다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들려주셔서 나 또한 즐겁게 들었지만 당시에는 무척 힘들었겠지요? 마이스터는 재바른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뭉근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며 자기를 숙성시켜가는 사람의 이름임을 알겠습니다. 마이스터라는 호칭 속에는 그런 눈물 겨운 시간과 절망 그리고 꿈이 아릿하게 배어있네요.


이야기가 독일의 도제 과정과 마이스터 과정에 이르렀을 때 선생님은 참 즐거워보였습니다. 집짓기 공정 중 지붕을 얹는 전문가인 '침머만'(Zimmermann)이 되기 위해서 교육을 받는 도제들은 마지막 1년 동안 각지를 떠돌며 집을 짓는 이들 곁에 머물며 무료로 일을 함께 해주어야 하고(숙식만 제공받는다 하셨지요?) 나중에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한 리포트를 정밀하게 점검한 후 그에게 마이스터 자격을 부여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구체적인 집짓기의 현장에서 다양한 장인들과 만나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 일년의 방랑 세월이 제게는 매우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운수납자처럼 정처없이 떠돌다 시절 인연에 따라 한 곳에 머물고 인연이 다하면 또 홀연히 떠난다는 것, 참 멋진 삶입니다.


굴뚝 청소부(Rauchfangkehrer) 이야기는 더 재미있었습니다. 독일에서 굴뚝청소부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사람으로 여겨진다지요? 아마도 굴뚝에 붙어있는 그을음을 제거해주고 화재를 막아주는 사람, 곧 액운을 막아주는 사람으로 인식되기에 그런 것이겠지요? 굴뚝 청소부가 결혼식에도 초대받곤 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새롭게 이루어지는 가정에 행운을 가져다 달라는 애교섞인 주문이겠지요? 목조주택이 많은 독일에서 굴뚝 청소부는 정말 중요한 직인이었겠습니다. 그는 지금도 배기가스 검사, 보일러 기계 육안검사, 그을음 측정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지요? 쇠줄에 매달린 굵은 공이와 쇠수세미로 굴뚝을 쑤시다가, 나중에는 굴뚝 속으로 들어가 몸으로 굴뚝 벽을 문대며 그을음을 제거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허드렛일처럼 보이는 그 일이 실은 매우 전문적인 솜씨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마이스터 자격을 딴 사람만 할 수 있다지요? 그들의 복장 이야기가 흥미로와서 찾아보았더니 정말 그렇더군요. 바지와 더블 브레스트 쟈켓 그리고 모자까지 검은색 일색이었습니다. 오직 상의에 달린 단추만이 금색으로 번쩍거렸습니다. 그렇게 제복을 갖춰 입음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을 아주 소중한 의례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노동이 의례로 변하는 순간 그 노동은 신성한 것이 됩니다. 


굴뚝청소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엉뚱하게도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떠올렸습니다. 어린왕자는 자기 별인 소행성 B612에서 아침마다 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세 개의 화산 분화구를 청소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청소를 잘 하지 않으면 언제 화산이 폭발하여 별을 깨뜨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린 바오밥나무의 뿌리를 뽑는 일이었습니다. 작은 별이었기에 바오밥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리면 소행성은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요. 어린왕자는 굴뚝청소부이자 정원사네요. 어쩌면 그는 진짜 구도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청소했던 분화구가 우리 마음을 상징한다고 보면 말입니다. 세상 사는 동안 우리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가다가 때가 되면 폭발할 수도 있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날마다 청소해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마음 속에서 과도하게 자라 결국 삶이라는 생태계를 파괴할 수도 있는 욕망의 나무를 그 뿌리부터 뽑아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선생님의 작업실을 떠올리며 17세기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그림 한 점을 찾아보았습니다. 1640년에 그린 <목수 성 요셉>입니다. 화면은 목수 요셉의 작업실을 담고 있는데, 날이 이미 어두워져서인지 주변의 사물들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있는 데, 아버지 요셉은 아들 예수가 들고 있는 촛불 빛을 의지하여 어떤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남루한 작업복을 입은 늙수그레한 요셉의 눈길은 지며리 예수를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촛불을 밝혀들고 작업대 위에 걸터 앉아 있는 예수의 얼굴은 불빛을 받아 환히 빛납니다. 예수는 마치 기도하듯 촛불을 양손으로 받쳐들고 있습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신뢰와 사랑이 남루한 일상을 거룩하게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스산할 때마다 저는 이 그림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이제는 눈을 지릅뜬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가 마음이 지칠 때면 선생님의 작업장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고마운 우정을 떠올리니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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