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3-링반더룽의 상황 속에서 2015년 06월 03일
작성자 김기석

 링반더룽의 상황 속에서


평안하신지요?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봅니다. 아직 붉이 밝혀진 집들이 별로 없네요. 혼곤한 잠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여운 생각이 듭니다. 낮 동안 도시의 번잡과 악다구니 속에서 사느라 지친 몸과 마음이 얼마나 회복될 수 있을까요? 저 멀리 반 너머 가려진 북한산 자락 너머로 희뿌윰한 빛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아 몸과 마음을 거두어보려 하지만 마음은 종작없이 떠돌 뿐입니다. '아, 고단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터져나온 신음소리입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문득문득 멈추어 선다지요?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웃어 넘길 수도 있지만 이 말이 요즘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제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은 나 자신을 돌아볼 여백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랴?' 싶어 나름대로 주어지는 혹은 요구되는 일들을 성심껏 감당하려 하지만 마음이 흔연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가끔 어디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물이나 산을 보며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래 전부터 붙들고 있던 명나라의 문인 진계유(陣繼儒, 1558-1639)의 문장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지난 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고요함과 침묵은 우리가 시간 속에 마련하는 성소입니다. 일상의 흐름을 끊고 자꾸만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차없이 우리를 몰아대고 끌어들이는 시간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들레르는 폭군처럼 우리를 몰아대는 시간의 공포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렇다! 시간이 군림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몰아세운다. "이러! 짐승 놈아! 땀을 흘려 일해, 노예 녀석! 살아라, 망할 녀석아!"(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윤영애 옮김, 민음사, 2009년 3월 6일, p.41)


보들레르는 가증스런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비루한 현실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으려면 뭔가에 취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체 무엇에 취하라는 말일까요?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 취함은 어쩌면 우리가 무게를 가진 육체이지만 동시에 저 영원의 세계를 동경하는 영혼임을 일깨워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에 취해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경계선을 선뜻 넘지 못하는 더덜뭇한 성격 탓에 삶의 비애만 가중되고 있습니다. 


시간 속을 바장이며 이렇게 어렵사리 걸어가고 있는 제게 길을 물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이든 사람에 대한 예우이거니 생각도 해보지만 그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님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을 반증해주는 것이어서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길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예수에게 사로잡힌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 길'의 사람이 되라는 선고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길을 어기차게 걷지 못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겠지요. 물론 그 길 위에 놓인 걸림돌이 만만치 않습니다. 걸림돌을 피해 몇 걸음 걷다보면 또 다른 걸림돌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움푹 패인 함정에 속절없이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 우리 시선은 하늘이 아니라 땅을 향하게 됩니다. 땅만 바라보며 걷노라면 길을 잃게 마련입니다. '그 길'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망각한 채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터덜터덜 걷는 이들이 많습니다. 처음 소명을 받았을 때의 뜨거운 마음은 다 잊혀지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만 남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무리 애써 봐도 성과가 부실하면 자괴감에 사로잡히거나 타자들에 대한 원망과 질시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삭연한 심사를 달래려고 오락에 몰두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견결하던 품성이 녹아내린 자리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시간의 강에 둥둥 떠내려가거나 막연히 생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마틴 하이데거는 이런 삶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조어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세인世人 das Man'이 그것입니다. 남자를 뜻하는 'der Mann'과 구별되는 중성적 단어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늘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 뿐 아니라, 타자와 구별되기를 원하지만 결국에는 타자에게 예속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 즉 중성화된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지 못합니다. 항상 타자의 눈을 통해 보게 됩니다. 다른 이의 눈으로 보고, 다른 이의 귀로 듣고, 다른 이의 가슴으로 분노하고, 다른 이의 느낌으로 향유합니다. 다른 이가 만들어 놓은 문법에 따라 말하고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듯 하나 실제로는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낯섦을 위험한 것으로 여깁니다. 오리 무리가 백조를 따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인들이 잡담이나 빈 말에 몰두하는 것은 타자와의 동질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자기 내면의 고요한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책임있는 주체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정착민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는 늘 세상을 낯설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지만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삶이 몰역사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발터 벤야민은 '매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세계를 상정하기에 오늘을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실 분의 삶을 이 땅에서 재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세인'에게 낯설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낯섦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본래적 실존이 인력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이 땅의 많은 목회자들이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을 뒤섞거나 뒤집어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회의 상황이 어렵다 하여 우리가 저 영원한 중심을 향한 순례길에 오른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고전7:29-31)


'마치 ~ 없는/않은 사람처럼' 살라는 것이 바울의 권고입니다. 위선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현실에 붙들린 채 머뭇거리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본래적인 것을 얻기 위해 비본래적인 것들을 자꾸만 내려놓는 것을 일러 하이데거는 '죽음에의 선구先驅'라고 하더군요. 그렇지요.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아는 사람은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가까이 있는 동역자들이 파당을 이루어 몰려다니고, 힘있는 이들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고 하셨지요? 씁쓸하지만 이게 우리 현실이지요? 하지만 힘써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닮게 됩니다. 


등산 용어 가운데 링반더룽(Ringwanderung)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방향감각을 잃어서 직진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같은 자리를 둥글게 배회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어쩌면 님이 처한 상황이 이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잠시 숨을 돌리는 여유입니다. 결국에는 길을 찾게 될 겁니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나온 길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불쾌한 일들로 인해 오갈든 마음을 미소로 어루만지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귀히 여기십시오. 허망한 일에 몰두하기에는 우리 생이 정말 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히 님이 걸어야 길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을 찾는 그 고독한 길 위에서 아주 멋진 동행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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