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2-마주 잡을 손 한나 2015년 05월 26일
작성자 김기석

 마주 잡을 손 하나


평안하신지요?

계절은 벌써 소만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만물의 생장함이 두루 신비로운 나날입니다. 교회 어르신들을 모시고 하루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가만가만 나누시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차창 밖 풍경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아카시아 꽃과 더불어 바람에 뒤채는 나뭇잎들이 은빛 물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잘 구획된 농지에 이앙기를 이용해 모를 심는 농부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쓸쓸한 풍경이었습니다. 논에는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내기를 할 때면 덩달아 흥분상태가 되어 눈두렁 여기저기를 종작없이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른들이 못줄 잡는 일을 맡겨주면 제법 일꾼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품앗이하러 온 마을 어른들이 허리를 굽히고 열을 지어 모를 내다가, 목청 좋은 아저씨 한분이 노동요를 선창하면 노래는 금방 합창으로 변하곤 했습니다. 조금 힘들다 싶으면 흘낏흘낏 다복솔 우거진 야산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새참을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제법 의젓한 일꾼으로 보이고 싶어 더 열심히 일하는 척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기미를 눈치챈 어른들은 '000도 상일꾼이야'라고 놀림 삼아 칭찬해 주셨지요. 새참을 드신 어른들이 공동묘지의 무덤을 베고 잠시 잠을 청할 때면, 둠벙에 가서 물방개를 잡기도 했습니다. 벌써 50년도 더 지난 일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을 보면 살풋한 정을 나누던 마을 공동체가 다 깨져나간 오늘의 살림살이에 어지간히 지친 것 같습니다.


파종을 위하여 정갈하게 갈아엎어놓은 붉은 흙을 볼 때마다 왜 눈시울이 시큰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그 밭보다 순수한 장소가 또 있을까요? 번번히 신발을 벗고 그 흙을 가만히 밟아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노란빛 해를 등지고 싹싹한 걸음걸이로 씨앗을 뿌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나오는 농부의 모습이 보입니다(<씨 뿌리는 사람>). 그리고 오랜 노동의 시간을 견뎌온 구두를 그렸던 그의 마음도 떠올랐습니다(<구두 한 켤레>). 대지와 맺어온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낡은 구두, 몸의 연장으로서의 구두를 볼 때마다 멀쩡하기만 한 나의 구두가 오히려 부끄러워지곤 했습니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닷 물빛 또한 깨끗했습니다. 적절히 서늘한 바람은 안면도 바닷가를 조용히 산책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평화를 안겨주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소년 소녀들처럼 좋아하셨습니다. 자연 휴양림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리가 아파 걷지 못하는 이들은 솔바람 소슬하게 부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풍경을 즐겼고, 어렵더라도 산길 걷기에 도전한 분들은 서로의 손을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걸어나갔습니다. 오름길에 허청거리는 어르신네의 손을 가만히 잡아드리기도 하고, 잘린 채 놓여있던 나무 다발을 헤쳐 지팡이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아내 연세가 가장 높으신 어르신 손에 쥐어드리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준다는 것, 그의 속도에 맞춰 함께 걷는다는 것이 참 아름다운 일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정호승의 시집 <<여행>>을 펼쳤습니다. 먼저 인상깊게 읽었던 <발에 대한 묵상>을 가만히 읊조려보았습니다. "저에게도 발을 씻을 수 있는/기쁜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여기까지 길 없는 길을 허둥지둥 걸어오는 동안/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뜨거운 숯불 위를 맨발로 걷기도 하고/절벽의 얼음 위를 허겁지겁 뛰어오기도 한/발의 수고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이제 비로소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발에게 감사드립니다"(<발에 대한 묵상> 부분). 문득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마음이 고스란히 추체험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고단한 삶 전체를 그렇게 가만가만 감싸주며 '애썼다'고 격려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요? 나도 수술을 받은 후 늘 통증에 시달리는 아내의 발을 그런 마음으로 주물러줄 때가 있습니다. 참 고마운 발입니다.


시집을 뒤적이다가 <손에 대한 예의>에 또 눈이 머물렀습니다. 손에 대한 예의란 어떤 것일까요?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때때로 말을 하지 않는 손이 인간의 어떤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아직은 수줍은 연인들을 보십시오. 손 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가슴 가득 전율을 느끼지 않던가요? 우리는 이미 이런 세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온 것 같아 쓸쓸한 생각이 드네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도 그런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내민 하나님과 아담의 손, 닿을락말락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창조의 순간일 겁니다. 손은 또한 누군가를 어루만집니다. 상처입은 사람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줄 때, 놀란 아이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줄 때, 쓸쓸한 사람의 손을 잡아줄 때 우리 손은 마음을 전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소설가인 고종석은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어루만지다>, 233쪽)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손은 언어가 됩니다.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손에 대한 예의가 뭔지 말해야 하겠군요. 그의 음성을 직접 들어보세요.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을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에 대한 예의> 부분


이후에도 시는 계속됩니다. 시인에게 손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세상과 접촉하고 삶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의 환유입니다. 물끄러니 내 손을 바라보려니 부끄러운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남의 호의를 얻으려고 손바닥을 비빈 적도 없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린 적도 없지만 뭔가 창조적인 노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 때문이었을 겁니다. 평생 노동을 해오신 어머니 아버지의 구부러진 손, 풀물 밴 손 앞에서 감히 내 정신 노동이 힘겨웠노라 언거번거 말할 수 없습니다. 


손이 아름답던 한 사람을 압니다. 예수입니다. 그는 나병에 걸려 사랑하는 이들과의 접촉의 기쁨을 포기한 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열병에 시달리던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기도 하셨습니다. 바다 물결 속에 잠겨들던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 끌어올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깨어났습니다. 그 손을 생각할 때마다 강은교 시인의 <당신의 손>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

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

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

머뭇대는 슬픔의 날이 달리는 기쁨의 날이 되네

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

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물결처럼 가벼우면서도 산맥처럼 무거운 그분의 손을 잡고 싶습니다. 며칠 전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신 분을 찾아갔습니다. 말을 하실 수 없었지만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을 보이셨습니다. 힘을 잃어 축 늘어진 손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나마 감각이 조금 남아 있는 손을 잡자 조금씩 힘을 주어 고마운 내색을 하셨습니다. 손을 마주잡은 채 나는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나의 손을 통해 주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달라"고. 지리산에서 세상살이를 마감한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의 마지막 대목이 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고통과 설움의 땅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면서 그 끈질긴 희망의 근거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그렇습니다. '마주 잡을 손 하나'가 바로 희망입니다. 먼 곳에 계시지만 우정의 손을 내밀어 봅니다. 청안청락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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