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씁쓸한 장면 셋 2015년 05월 22일
작성자 김기석

 씁쓸한 장면 셋


동생을 들로 유인하여 죽인 가인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신의 질문에 오연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의 말은 자기 존재의 본질에 대한 부정이다. 신은 인간을 '사이-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은 비스듬히 기대어 존재한다. 인간다움이란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려 할 때 발현되는 현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가인의 후예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도처에서 아벨의 핏소리가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다.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잘려진 올리브 나무를 뒤로 한 채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보도에 의하면 이스라엘 군인들은 정착민들의 편의와 주거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올리브 나무 수백 그루를 폭력적으로 잘라냈다 한다. 어쩌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주입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우야 어떠하든 몇 대를 이어오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준 올리브 나무가 무참하게 잘린 것을 보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참담함을 느꼈을 것이다. 데이빗 흄은 "덕은 사랑이나 긍지를 산출하는 능력이고, 악덕은 경멸이나 증오를 산출하는 능력"이라 말했다. 무참하게 잘린 나무는 이 시대의 악덕을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 사막에 있는 고대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 유적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 한다. 이미 이라크 북부의 고대 아시리아 도시 님루드와 고대 파르티아 제국의 원형도시 하트라 유적지에서 그들이 벌인 만행을 알고 있기에 그러한 우려가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자기들의 존재를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인류 문화 유산을 훼손하는 행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허용될 수 없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온 인류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그 어리석은 열정에서 그들이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사람들에 의해 인류는 점점 불모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먼 산만 바라보며 탄식할 일이 아니다. 최근 서울여대 총학생회의 중앙운영위원회가 보인 행태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들은 임금 협상을 요구하며 청소 노동자들이 설치한 현수막을 며칠 간의 유예 기간을 거친 후 전부 철거했다 한다. 그들이 밝힌 철거의 이유는 교내 축제에 앞서 '보다 나은 축제 환경 조성을 위하여', '학생들이 더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학우들의 편의를 위해'였다. 즐김과 편의의 욕구가 약자들과의 연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학생들의 선택은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깔축없이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캠퍼스 여기저기 걸려 있는 현수막을 불쾌한 것, 미관을 해치는 것, 숨겨야 할 것으로 받아들였다. 도시 빈민들이 무리지어 살던 산동네를 밀어버리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 하여 비닐 하우스에 살고 있는 이들을 쫓아내는 폭력적 현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타인의 고통이 내 마음에 아무런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석일 뿐 인간이라 할 수 없다. 편리함과 쾌적함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자연적 본능을 거슬러야 할 때가 있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할 때 비로소 자유의 공간이 열린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장면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심층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 중심성'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선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인공 낙원은 어쩌면 인정의 황무지가 아닌가? 적대감이 가득찬 세상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 쉽지 않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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