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마태복음산책3 2015년 04월 24일
작성자 김기석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

본문 / 마12:1-21


이스라엘을 다녀온 이들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는지를 보고 놀란다. 그 놀람 속에는 비웃음도 담겨 있다.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도 안 되고, 기계를 작동시켜서도 안 되고, 일체의 인위적 조작도 할 수 없다는 규정은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낯설고 기이한 습속이 아닐 수 없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안식일 법의 제정 취지를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안식일 규정에 매이는 것은 오히려 그 계명을 위반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안식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 삶을 관조하는 시간이다. 스스로가 창조자가 되려는 열망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잠기는 시간이다. 19세기의 랍비인 하하드 하암은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고 말했다. 안식일을 뜻하는 샤바트는 '쉬다', '중지하다'는 뜻의 어근에 맞닿아있다. 분주함이 신분의 대명사처럼 된 시대일수록 '멈춤'은 허용되지 않는다. 중단없는 전진을 외치는 사회,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며 사람들을 강박적으로 몰아대는 시대에 안식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일 수 있다.


예수와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걷고 계신다. 갈릴리의 비옥한 대지 위에서 은총처럼 내리는 비와 농부들의 땀방울을 먹고 자란 밀밭이 넘실거리는 광경은 평화롭고도 목가적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폭의 그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제자들은 그만 이삭을 잘라 손에 대고 비빈 후 그것을 입에 털어넣었다. 1세기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상황은 참담했다. 만성적인 배고픔에 시달렸던 것이다. 농사를 지어도, 물고기를 잡아도 가혹한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트집을 잡았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12:2). 예수는 사울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이 제사장에게만 허락되던 진설병을 먹었던고사를 인용하며 그들의 말을 반박한다. 토라에 의하면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장함'이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런 절박한 처지까지도 매몰차게 외면하는 계명을 우리에게 강요하실까? 율법과 계명을 금과옥조로 지키며, 그것을 지킨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특색으로 내세우고, 그 때문에 사회적 존경이라는 특권을 누리고 있던 이들에게 이 질문은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12:6) 말귀를 알아듣는 이들은 알아들을 수 있겠지만, 언어의 상징성이나 은유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경천동지할 말이 아닌가. 성전은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이고,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상기시키는 가시적 상징물이다. 그런데 갈릴리의 목수 출신의 한 사나이가 자신을 일러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말한다. 위험한 말 아닌가? 그런데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12:7-8)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했다. 문자에 집착하는 순간 그 문자 속에 담긴 뜻과 정서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법이다. 바울 사도가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고 했던 것도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계명의 핵심은 '자비'이다. 자비의 체현인 예수는 그러므로 성전보다 크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도 전혀 그름이 없다.


안식이 없는 사람들

이야기는 회당을 배경으로 하여 진행된다. 회당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묻는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태는 그들의 질문이 순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를 고발할 꺼리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숨은 의도를 모를리 없건만 예수는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으신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그분의 일이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아무도 이 말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다음 말이 이어진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허를 찔린 느낌이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승복할 수밖에 없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이제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말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부담이다. 그들의 복잡한 속내야 어찌되었건 예수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신다.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 하시자 그의 손이 곧 온전히 회복되었다. 생명 회복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10:10)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그 소명에 충실하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보라. 그들은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다 한다. 경건을 독점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은 경건을 몸으로 살아내는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종교와 경건의 핵심이 생명 살림에 있다면 그들은 종교와 경건을 빙자하여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예수는 굳이 그들과 싸우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 곁을 떠나실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인지 알아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 예수는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하셨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쌓은 것을 내게 마련

본문 / 마12:22-50


한 사람이 있다. 은총 속에서 태어났으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앞을 볼 수 없었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귀신에 들렸다고 말했다. 도무지 납득할 수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현실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은 그 모호하고 불쾌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귀신 들렸다'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문제는 그러한 명명행위가 고통받는 자를 치유하지도 위로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명명자의 도덕적 정신적 우위를 확인하기 위해 발설될 때가 많다. 그러나 그가 겪는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중고에, 귀신 들렸다는 사회적 편견까지 더해져 삼중고에 시달리던 이가 주님 앞에 나왔다. 예수는 즉각 그를 고쳐 주셨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12:23). 마태복음에서 이 구절은 병자 치유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한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 속에는 메시야에 대한 민중들의 갈망이 담겨 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예수의 모습에서 그들은 메시야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하지만 자기 중심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못마땅해한다. 그래서 즉시 예수에 대한 비난에 착수한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12:24). 제법 전문가로서의 발언과 같은 형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그 말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자기들의 특권을 잃을까 저어하는 마음과 질투심 뿐이다.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는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고,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나 동네나 집이 굳게 서지 못한다고 말한다. 귀신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은 횡설수설일 뿐 참다운 말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축귀의식에 능한 이들도 있었는데 예수는 그들도 귀신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냐고 반문하신다. 귀신이 아니다. 예수가 힘입은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분열시키는 귀신을 결박하는 사건이다. 예수를 통해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귀신의 힘은 제거된다. 예수가 있는 곳은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의 입구이다. 예수의 존재는 우리를 결단의 자리에 세운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어중간은 없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일 뿐이다. 예수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죄와 모독 그리고 당신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고 말한다. 영을 혼잡하게 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이든 주류 세계에 속한 이들은 혼잡하게 하는 영에 붙들려 있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로마의 교인들에게 엄히 경고했다.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12:35). 이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경구이지만 실은 예수를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이다. 별 수 없다.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법이다. 하나님께 속한 영은 일치의 영이요, 평화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

이번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함께 등장하여 예수를 시험한다. 그들은 다짜고짜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한다. 당신이 메시야라면 그에 합당한 표적을 보이라는 것이다. 표적을 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영적인 몽매함을 말해준다. 오죽하면 예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했을까. 그러면서도 예수는 그들의 눈뜸을 위해 표적에 대한 담론을 수용하여 대답하신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요나의 표적은 중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머물렀던 사흘과 죽음에서 부활 사이의 사흘의 대비이다. 죽음을 넘어 새로운 생명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유사성이 표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예수의 말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가 예수를 통해 하는 말일 가능성이 많다. 둘째는 요나의 예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의 존재처럼,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를 믿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43-45절의 이야기는 다소 뜬금없이 등장한다. 사실 이 대목은 22-26절에서 언급한 귀신 축출 이야기의 맥락과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쫓겨난 더러운 귀신은 머물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옛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집이 깨끗하게 수리된 채 비어 있으면 귀신은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그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나쁘게 된다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자부심만으로 새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비운 후에는 채워야 한다. 자아를 여읜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깨끗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교만과 독선에 접하고는 놀라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자비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거룩은 타자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낳기도 하는 법이다.



















비유로 말씀하시다(1)

본문 / 마13:1-30


'비유'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비유를 뜻하는 파라볼레parabole는 '나란히 놓다'라는 뜻의 파라발로paraballo에서 유래된 말이다. 예수는 비유의 천재였다.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으면 비유로 말하기 어렵다.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 속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뛰어난 연상 능력이 필요하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관찰력 혹은 직관이 뛰어나지 않은 이들은 연상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서술이나 묘사보다는 비유에 의존할 때가 많았다. 예수의 비유는 미학적으로도 뛰어나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는 모두 천국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일련의 비유들이 가족과 고향 사람들이 예수에게 보인 태도를 전후로 하여 배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2장 말미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온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가족들을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거절하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12:50) 하고 말씀하신다. 천국 비유를 마치신 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13장 50절 이하에서는 고향에서 배척받으시는 예수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낯익은 세계에서 움터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예수가 바닷가로 나가 자리에 앉으시자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왔다. 예수는 배에 올라가 앉으셨고 무리는 해변에 서 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구릉 위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일까? 예수는 입을 열어 말씀을 시작하신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흩뿌렸다. 길 가에 떨어진 씨도 있었는데 새들이 와서 금방 먹어버렸다.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도 있었는데, 싹은 곧 나왔지만 해가 떠오르자 곧 타버리고 말았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도 있었는데 가시로 인해 기운이 막혀 자라지 못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도 있었는데,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너무나 잘 아는 비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비유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마태는 18-23절에 걸쳐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예수의 입을 빌어 친절하게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비유는 남김없이 해석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비유로 말씀하시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알쏭달쏭한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비유는 알아들을 마음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들을 마음이 없는 사람, 다시 말하면 자기가 구성해놓은 세계관 속에서 한 걸음도 걸어나올 생각이 없는 이들은 청맹과니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일의적인 해석을 강변하는 이들일수록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다. 비유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초점, 즉 '농부'와 '밭'과 '씨' 가운데 어느 것에 집중해도 무방하다. 하나의 바른 해석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신학자는 이 비유가 전승된 맥락에 집중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일을 하다보면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낙심할 때가 있다. 하지만 씨가 죽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그 씨가 싹이 트고 자라 결실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허비된 씨보다 많을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했던 바울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비유와는 달리 24절부터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는 천국에 대한 비유임이 적시되고 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 좋은 씨를 뿌린 것은 좋은 결실을 보기 위함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싹이 날 때는 둘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더니 결실할 무렵이 되자 곡식과 가라지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당황한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주인은 그대로 버려 두라고 말한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공생애 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다. 가라지 밭과 다를 바 없는 세상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꿈은 얼마나 장엄한가?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꿈은 그렇게 쉽사리 성취되는 법이 없다. 수많은 방해와 난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공중의 권세 잡은 이들은 '가라지'로 표상되는 악을 세상에 흩뿌리려 한다. 그 악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을 그저 묵과할 수도 없다. 때로는 그것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고, 투쟁을 통해 바로 잡아야 할 때도 있다. 이 비유가 그러한 실천조차 만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가라지의 존재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세상에 넘치는 악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악의 문제에 대한 속시원한 이론은 없다. 우리는 다만 그 악의 현실 속에서 선을 지향할 뿐이다. 악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기보다는 악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 악에 기울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악을 근절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이다. 치열하게 싸우되 그 귀추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13:30). 심판하실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비유로 말씀하시다(2)

본문 / 마13:31-58 


이 단락에는 '천국은 마치∼와/과 같으니'라는 상용구로 시작되는 다섯 개의 천국 비유가 숨가쁘게 펼쳐져 있다. 예수는 천국을 실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서술이나 묘사를 하지 않는다. 다만 비유를 통해 넌지시 드러내 보일 뿐이다. 비유는 은유로서 작동하는 짧은 이야기체 허구라는 점에서 잠언이나 경구들과 구별된다. 버나드 브랜든 스캇은 예수의 비유를 가리켜 '세상을 다시 상상하기'로 요약한 바 있다. 즉 비유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낡은 세계상을 전복하거나,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삶의 깊이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수는 비유를 구성하기 위해 어떤 문헌도 참조하지 않았다. 예수는 우리들의 비근한 일상에서 천국의 비유를 찾아낸다. 상투적일 수도 있는 현실 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셈이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예수의 비유를 읽거나/듣는 이들은 그 일상적인 것의 비일상성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늘은 멀리 있지 않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가 가늠할 수도 없는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겨자풀 천국

예수는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말한다. 겨자풀이 쓸모가 많았기 때문일까? 그런데 대체 그 겨자씨 한 알과 천국은 어떤 유사점이 있다는 것일까? 마태복음서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가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초본과에 속하는 겨자풀을 나무로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중에 나는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말도 전혀 근거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썩 와닿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이 비유를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천국은 그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이 비유가 내포하고 있는 전복적 성격을 담아내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날을 기다렸다. 그들은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이 세계 위에 우뚝 서고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굳이 나무에 빗대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레바논의 백향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천국을 가르치면서 백향목이 아닌 겨자씨/겨자풀을 거론하고 있다. 


사실 겨자씨는 팔레스타인에서 '작은 것', '변변치 못한 것'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었다. 청중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풀이라니!' 예수는 백향목 세상은 언제나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는 세상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로마제국이라는 백향목 세상에서 그나마 사람처럼 사는 것은 시민들 뿐이었다. 그런 세상이 끝장나고 또 다른 백향목 세상이 온다 해도 세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독재자를 몰아내면 또 다른 독재자가 들어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는 저마다 백향목이 되려는 세상에는 평화가 깃들 수 없음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작고 여린 것들이 어울려 이루는 우정의 공동체를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유대인은 물론이고 이방인까지 품어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말이다. 바울 사도의 말도 이런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 


누룩들의 세상

천국을 누룩의 발효력과 관련시키는 것 역시 낯설기 이를 데 없다. 성경에서 누룩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일렀고, 바울은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한다'고 말했다. 정결한 사람은 누룩이 없는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예수는 어쩌자고 천국을 누룩에 빗대어 말씀하시는 걸까?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이들 가운데 정결법을 지키며 살 수 있었던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비유 속에서 '누룩'은 바로 그런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여인이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왜 하필이면 '가루 서 말'인가? '가루 서 말'이라는 구절은 천사들이 이삭의 탄생을 예고하는 창세기 18장에 등장한다. 이삭의 탄생이 기쁜 소식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는 뜻으로 새겨도 좋을 것 같다. 누룩으로 인하여 반죽이 '부풀어 올랐다'는 구절 역시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역사를 새롭게 하는 주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밭에 숨겨 놓은 보물 이야기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이야기의 핵심은 자발적인 포기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덜 소중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이지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빌3:8, 새번역)라고 말했던 바울 사도의 고백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어부들이 바다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분류하는 이야기는 천국의 도래가 어떤 이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두려운 소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때로는 유장한 이야기체로 때로는 촌철살인의 경구 형태로 전개되는 예수의 다양한 천국 비유는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13:52) 하신 말씀 속에 답이 있다. 천국과 예수는 이미 한 몸인 것이다. 
















아, 세례자 요한!

본문 / 마14:1-21


두려움에 사로잡힌 권력의 만행

13장의 마지막 단락이 고향 사람들에 의해 배척당하는 예수의 모습을 다뤘다면 이어지는 14장의 첫 단락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다룬다. 사실 이 단락은 예수가 맞이하게 될 비극적 죽음의 서곡이라 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은 분봉왕 헤롯에게까지 전해졌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의 우렁우렁한 음성은 여전히 귓전에 맴돌고 있던 차에 그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요한과 예수는 여러가지 면에서 닮은 꼴이다. 잠들어 있던 만중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쳤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고했고, 지상의 권력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았다. 대중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헤롯은 공포스러웠다. 예수는 어쩌면 자기가 처형한 세례자 요한의 정신에 빙의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14:2)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포와 두려움은 어쩌면 자기 스스로 마음 속에 짓는 지옥인지도 모른다. 그 지옥의 재료인 어둠은 타자들의 존재 권리를 부인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데서 비롯된다. 자기 확장 혹은 자기 강화를 위해 타인들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마음을 빼앗겨 나바테아 왕국 출신의 아내를 버린 헤롯 안티파스를 낭만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야심가였던 그는 분봉왕의 지위에 만족할 수 없었다. 부왕인 헤롯대왕처럼 명실상부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헤롯대왕의 손녀인 헤로디아와의 결합이 필요했다. 정치적 책략에서 비롯된 그의 일탈은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 형제관계가 악화된 것은 물론이고, 나바테아 왕국과의 전쟁 상황까지 초래했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헤롯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의 부도덕함만을 문제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민중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지도자는 더 이상 지도자일 수 없다. 요한을 통해 발설된 말은 흐르는 말(流言)이 되어 대중들의 의식에 파고들었고, 쏘는 말(蜚語)이 되어 권력의 탐욕과 위선을 폭로했다. 그럴 때마다 불의한 권력이 하는 일은 동일하다. 그 말의 주인을 잡아 가두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체포되었고 마케루스 산성에 수감되었다. 마케루스는 유대지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요단 동편의 산지였고, 헤롯의 여름 궁전이 있던 곳이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했지만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유보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회가 왔다. 헤롯의 생일이 되어 잔치가 벌어졌고 주흥이 무르익을 무렵 헤로디아의 딸(살로메로 알려져 있다)이 나아와 춤을 추었다. 자기 도취에 빠진 헤롯은 의붓딸인 그 소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겠다고 약속했고, 어머니 헤로디아와 상의한 소녀는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요한은 그렇게 어이없이 참수되었다. 마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그 사실을 예수께 알렸다. 


배고픈 무리를 먹이시다

헤롯이 예수를 요한의 환생으로 이해하는 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예기되는 위험을 피해 호수 건너편 빈 들로 나아간다.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가져온 공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많은 무리가 예수를 찾아 나아왔다. 빈 들은 마음 둘 곳조차 없는 사람들의 스산한 마음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해준다. 목사 시인 고진하는 <빈들>이라는 시에서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들녘의 스산함을 이렇게 노래한다. "늦가을 바람에/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그러나 시는 눈부시게 반전된다. "아니, 그런데/당신은 누구입니까/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빈 들은 비어있지 않았다. 그곳은 누군가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본 '당신'은 누구일까?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갈릴리 호숫가의 빈 들에는 참 사람이 있었다. 마음의 정처를 잃은 이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사람, 병든 사람을 보고 안쓰러이 여겨 고쳐줄 수밖에 없는 사람, 먹지 못해 기진한 사람들을 기어코 먹이려고 하는 사람 말이다. 예수가 있어 그 빈 들은 사랑으로 가득 찬 곳이 되었다. 예수를 만나려고 빈 들로 나아온 사람들을 보고 제자들은 당황했다. 무리의 시선이 예수에게 집중될 때 헤롯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제자들은 '무리'의 존재를 부담으로 받아들였다. 예수의 시선이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과 고통에 머물고 있었다면, 제자들의 시선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머물고 있었다. 제자들은 날도 이미 저물었으니 그들을 가까운 마을로 보내자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의 말은 단호하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실쭉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뿐'이라는 접미사는 제자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하지만 예수는 무리들을 잔디 위에 앉힌 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나눠주었다. 결국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먹고 남은 것이 무려 열 두 바구니에 이르렀다. 축사, 떡을 뗌, 나눔, 만족의 흐름이 물 흐르듯 매끄럽다. 이 이야기가 성찬식과 관련된 기억의 변용이라는 해석도 있다. 남은 떡 열 두 바구니는 흩어졌던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회복을 뜻한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우리 눈길이 머무는 것은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기보다는 그 아픔에 주목하는 예수의 시선이다.


















베드로, 물 위를 걷다

본문 / 마14:22-36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1:22-23). 바울은 히브리 문명과 헬라 문명의 핵심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성경이 들려주는 기적 이야기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 태도를 보인다. 첫째는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이니 그의 아들이신 예수 또한 못할 일이 없다고 그들은 굳게 믿는다. 둘째는 기적 이야기를 신화적 마술 동산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보아 도외시한다. 셋째는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주목하는 태도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랜 기간 전승되는 데는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무의미한 이야기는 포말처럼 스러지고 만다. 해석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거슬러 부는 바람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와 잇닿아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신다. '재촉한다'고 표현했지만 이 말에 담긴 속뜻은 '억지로 ~ 하게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 예수는 마음 내켜 하지 않는 제자들을 억지로 보내신 것이다.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은 까닭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그곳이 이방 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사이에 예수는 무리들을 흩어 보낸다. 예수는 그들을 의지하여 무엇을 도모해 볼 생각이 없다. 예수를 통해 가슴에 어떤 따뜻한 불씨를 간직하게 된 이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겨울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 불씨를 전하라는 뜻이었을까? 모이는 교회도 중요하지만 흩어지는 교회 또한 중요하다. 예수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낸 후 산에 올라가 저물도록 혼자 계셨다. 고독을 뜻하는 영어 단어 'solitude'는 독거 곧 홀로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타자로부터 소외된 상태가 아니라 자발적인 소외라 할 수 있다. 예수의 '홀로 있음'은 '하나님과만 함께 있음'이라고 새겨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진실한 대면은 우리로 하여금 비본래적인 것들을 떨쳐버리고 본래적인 것들을 굳게 붙잡을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없었다면 고통받는 이들 곁에 끊임없이 다가섰던 예수적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수의 삶은 '굳건히 나아감'과 '지긋이 물러섬'의 통일이었다.


예수가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던 그 시간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 불었고 물결로 인해 제자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신 사건을 전하는 8장은 제자들이 탄 배를 위험으로 몰아넣는 '큰 놀'과 '배에 덮이는 물결'이 상세히 묘사되었지만 14장에서는 그런 묘사가 상당 부분 생략되어 있다. 제자들이 탄 배에 불어온 '거슬러 부는 바람'은 어쩌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저항감이 아니었을까? 이방인의 땅으로 가기 싫어하는 마음 말이다. 


믿음이 적은 자여!

밤 사경 무렵(여명에 가까운 때) 예수께서는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접근하셨다. 그 광경을 보면서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놀랐다. 여기서 말하는 놀람은 혼란스럽다는 뜻을 내포한다. 어떤 혼란이었을까? 그들은 스승인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어둑 새벽이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그들의 믿음이 온전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 예수는 '안심하라'는 말로 제자들의 혼돈된 마음을 다독이신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말은 가까운 이들에게 자신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과 관련되어 나타날 때가 많다. 안심하라고 말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제자들은 그렇게 큰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발화된 '나다'라는 말은 시편의 몇몇 구절을 상기시킨다.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시107:29).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65:7). 바다 물결을 잠잠케 하시는 분, 파도를 즈려밟고 걸으시는 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오신다. 


혼란스러운 중에도 베드로는 용기를 내서 말한다.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주님이 허락하시자 그는 비교적 안전한 배 밖으로 발을 내민다. 믿음이란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것이다. 때로는 무모한 용기가 믿음의 시작이다. 베드로는 물결 위를 걸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물 속에 빠져들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에서 애써 신앙 쪽으로 정위되었던 그의 마음이 불신앙으로 급격이 쏠렸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바람'을 뜻하는 단어인 '아네몬'은 '풍조'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자기 시대의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선에서 활동했던 베드로조차 유대주의자들의 눈치를 보았던 사실을 알고 있다(갈2:12).


베드로의 베드로 됨은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과 과오을 인정할 줄 알았다는 데 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주신 주님은 그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다. 하지만 그 책망은 질책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깝다. 예수가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고,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재확인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본문 / 마15:1-20


전통으로 계명을 범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나아왔다. 처음은 아니다. 12장에서 이미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문제로 예수와 충돌한 적이 있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에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어느 경우이든 호의적인 만남은 아니었다. 그런데 15장에 이르러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마태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1).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성전체제의 대표자로 온 셈이다. 그들이 제기하는 질문은 성전체제의 공식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2). 번역은 정중한 어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비조였을 가능성이 많다. '어찌하여'라는 부사는 이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행태가 그릇되었다는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장로들의 전통'이었다. 바리새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그 전통을 예수와 제자들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든 것은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정결법 준수를 자기들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정결법을 무시하는 듯한 예수 그룹의 행태를 그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는 대신 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 응수하신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 전통을 잘 준수하는 것을 신앙적 자부심의 근거로 삼고 있던 이들에게 이 말은 청천벽력이다. 예수는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성전체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비틀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부합되도록 해석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부모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고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새번역) 하고 말하면 부모 공경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성전체제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6). 본과 말의 뒤집힘이다. 


예수는 성전체제 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던 '고르반'(corban) 전통의 비본래적 오용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바치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유대교에서 헌물을 드리겠다고 맹세하는 말의 첫 마디가 되었다. '고르반 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사람들은 자기 소유물의 유일한 상속자가 성전임을 세상에 천명했던 것이다. 물론 선언을 했다고 하여 그 물건 혹은 재산이 당장 성전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주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사용권이 그에게 귀속되었다. 고르반 규정은 부모 공경의 계명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가장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헛된 자부심을 타격하고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진짜 더러운 것은 입에서 나오는 것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에 응답하신 후 무리를 불러 이르신다.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0-11). '더러움'이라는 단어를 중심에 놓고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대조되고 있다. 들어가는 것이 '음식'이라면 나오는 것은 '말'이겠지만, 그 말의 뿌리는 마음일 것이다. 규정을 지키는 것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규정의 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면의 정화이다.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의 착종을 바로잡지 않으면 경건해 보이는 행위는 오히려 자기 기만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19)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씻지 않은 손으로 먹었다고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12). '걸림이 되다'는 '스칸달리조'의 번역어인데 '모욕감을 느끼다', '분개하다'라는 뜻으로 새겨도 괜찮을 것이다. 제자들의 저어하는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예수의 말은 더욱 신랄하다.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뽑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성전 체제에 대한 부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분개했다 해도 할 수 없다. 진실은 가려질 수도 없고 가려져서도 안 된다.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14).


16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루겔(1525-1569)은 이 구절에 의지하여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화면에는 6명의 맹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한 채 길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감각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개를 갸웃 하고 있는 이도 있다. 브루겔은 좁은 개울과 교회 사이로 난 소롯길을 걷다가 맨 앞 사람이 뭔가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거센 바람이 유럽을 뒤흔들고 있을 때 그려진 이 그림은 종교가 자칫하면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애린의 마음으로

본문 / 마15:21-39


세상에는 인위적인 경계선도 있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강고하게 드리워진 경계선도 있는 법이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것도 있지만 특정한 사람들의 의도에 따라 형성된 것도 있다. 사람들은 남녀, 종교, 인종, 피부색, 지역, 이데올로기, 빈부, 지식 유무에 따라 이편과 저편으로 갈린다. '우리'의 경계 밖에 있는 '그들'은 늘 위험한 이들로 분류되거나 접촉해서는 안 될 사람들로 터부시 된다. 그 경계선을 넘는 일은 사회적 금기에 속한다. 경계선은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완강한 의사표현인 셈이지만 또 따지고 보면 자기를 가두는 감옥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경계선 가로 지르기'야말로 예수 운동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경계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나안 여인의 믿음

예수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갔다. 성전체제와의 갈등이 노골화된 현실 속에서 잠시 몸을 피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 공동체를 찾아간 것일 수도 있다. 정답은 어차피 없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 앞에 나와서 외쳤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 마가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그 여인을 헬라인으로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말한다(막7:26). 그 여인을 헬라화된 도시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왜 그 여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토착민들을 경멸하는 투로 일컬을 때 쓰는 '가나안 사람'으로 수정한 것일까? 그것은 나중에 그 여인의 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 없음과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 여인은 놀랍게도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여인은 유대의 지도층들이 경계하는 이 인물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존재임을 알았던 것일까? 하지만 예수는 여인의 간청을 못 들은 체 한다.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던 스승의 낯선 모습에 제자들은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청원한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23). 이 말은 쫓아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여인의 청을 들어주라는 부탁이다. 하지만 예수의 반응은 냉랭하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 예수는 짐짓 이런 말을 함으로써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려는 것일까? 아니면 지도적 유대인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어 그 여인의 일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여인은 예수께 절을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한다. 예수의 말은 더욱 가혹해진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의 절박함이 가슴 저리게 느껴지지 않는가? 예수는 비로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 때 여인의 딸이 나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정결함과 부정함에 대한 논쟁 바로 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혈통이나 국적이 아니라 내적인 자세 혹은 믿음이다. 마태는 천대받던 가나안 여인을 '큰 믿음' 혹은 '진실한 믿음'의 모범으로 내세우고 있다.


메시야의 잔치

29-31절까지 나오는 치유 이적 이야기의 구조는 산상수훈의 틀을 따르고 있다. 예수 일행은 다시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많은 무리가 그 앞에 몰려왔다. 몰려온 이들이 제자가 아니라 각색 병든 자라는 사실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예수는 애린의 마음으로 그들을 고쳐주셨다. 말 못하던 이가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사람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놀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는 이 단락을 통해 이사야35:5-6에 나오는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암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바로 이어지는 본문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들려준 마태가 또 다른 급식 이적 이야기를 반복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별개의 사건이니 다루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이야기의 구성은 비슷하다. 기진한 무리가 있고,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예수가 있다. 제자들은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이 여퉈두었던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오라 하신다. 사람들을 자리에 앉게 하신 후 감사 기도를 올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도 사천 명이었다. 이 잔치는 메시야 시대의 선취가 아닐까? 낯선 사람들이 어울려 식탁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위선의 누룩을 경계하라

본문 / 마16:1-12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기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를 인정하고 수용할 만한 그릇도 못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는 현실을 방관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런 진퇴양난에 빠진 이들이 일쑤 들고나오는 것이 자격 문제이다. 바울 사도도 자격 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어느 사회이든 기존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자격증을 따기 어렵다. 자기들의 특권을 강화하려는 이들일수록 자격증에 집착한다.


노골화된 적대감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다. 조상들의 유전 문제를 두고 갈등 관계에 있는 두 집단이 예수라는 새로운 존재를 경계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불의의 연대이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자기들의 특권이다. 마태는 그들이 나아온 것은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명확하게 밝힌다.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도발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예수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았던 두 번째 유혹을 물리치면서 사용하셨던 단어와 동일하다. 사탄이 예수에게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했을 때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응답했다. 이 말은 결국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사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가장 경건해야 할 사람들이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현실과 무관한 것일까? 


그들은 예수에게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하나님'을 뜻하는 은유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요구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보냈다는 증거가 뭐냐는 것이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든 이들이 낫고, 사람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현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눈을 감고 있다. 트집을 잡으려 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예수는 즉답을 피하고 그들이 기대고 있는 인식의 토대를 뒤흔들어 놓는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2-3). 문제는 분별력이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일수록 어리석음에 빠지기 쉽다. 토마스 머튼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우리가 삶에서 얼마나 많은 수확을 거두어 들이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한 말을 의심하고 우리가 한 일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이 내린 평가를 완전히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다. 자기가 실행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가 바라는 전부는, 그것이 자신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선한 것이다"(<토마스 머튼의 씨앗>, 생활성서, p.157). 


예수는 표적을 구하는 이들의 그 음험한 속마음을 강력한 언어로 타격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으니라"(4)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했을 때 했던 대답과 동일하다. 예수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 자리를 벗어났다. 대화란 들음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바꿀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니 말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라는데,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정호승, <여행>)이라는데, 제자들은 아직 스승의 마음의 오지에 당도하지 못했다. 예수는 저만치 뚜벅뚜벅 앞서 걸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주변만 두리번거릴 뿐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한다. 


예수와 일행은 또 다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옮겨가고 있다. 배 안에서 제자들은 근심스런 눈빛을 주고 받고 있었다. 떡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밑도끝도 없는 말씀을 꺼내신다.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6). 어쩌면 예수 자신도 그들과의 불유쾌한 만남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누룩'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만 아프게 떠올릴 뿐이다. '누룩'에서 '떡'을 연상하는 능력은 기민하지만, 그들 역시 분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역정을 내신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그러면서 예수는 두 번의 급식 이적을 상기시킨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그들은 경험했다. 하나님의 일은 치밀한 계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철저한 신뢰에 이르지 못했다. 꾸지람을 듣고서야 그들은 예수가 경계하는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위선과 자기 중심주의임을 깨닫는다. 누룩이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위선과 자기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주변을 불모의 땅으로 만든다. 예수와 더불어 길을 간다는 것은 자기 중심주의적인 경향으로부터의 탈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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