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14-움씨를 뿌리는 마음 2015년 03월 30일
작성자 김기석

 움씨를 뿌리는 마음


잘 들어가셨는지요? 쓸쓸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의 앞 모습보다는 뒷 모습이 더 많은 말을 한다지요? 평소의 활달하고 싹싹한 발걸음이 아니라 주저주저 하는 듯한 걸음걸이는 직면해야 할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답답해서 찾아오셨는데 무조건 공감해주고 편들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무나 객관적으로 응대한 것이 아닌가 싶어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언뜻 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의기 투합했던 이들의 의견이 엇갈릴 땐 속이 상하고 심하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갈등 상황을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냥 그 갈등을 회피해 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격의 특질이니 가치판단을 할 문제는 아니지요. 하지만 도모하려던 일이 소중하다면 어렵더라도 갈등을 풀어가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람은 먼 데 있는 나와 무관한 사람은 사랑할 수 있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을 사랑하기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먼 데 사람은 나와 감정적으로 얽힐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이때 사랑은 관념이고 추상입니다. 진짜 사랑은 일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제를 차분하게 풀어갈 수 있는 지혜와 화해의 용기를 허락해 달라고 화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도종환 선생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림'과 '젖음'은 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지만 꽃은 그런 동요(動搖)를 받아들였기에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어둠을 모르는 빛은 불완전하고, 절망을 모르는 희망은 공허합니다. 비바람이 있기에 뿌리는 깊어지고, 뜨거운 햇살이 있기에 꽃잎은 더욱 선명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강할미꽃을 아시는지요? 할미꽃은 대개 무덤가나 양지바른 곳에서 허리를 잔뜩 숙인 채 피어나는 법인데, 동강할미꽃은 동강의 가파른 바위틈에서 자라나더군요. 동강할미꽃은 꽃대가 길지 않을 뿐만 아니라 꽃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동강할미꽃의 학명은 'Pulsatilla tongkangensis'입니다. 학명에 '동강'이 들어간 것은 이 꽃이 오직 이곳에서만 자라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곳에 옮겨심으면 동강할미꽃의 특색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참 신기하지요? 


흔들림과 젖음을 그리고 척박한 환경을 자기 삶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내면에 꽃이 피어나는 법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신앙을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흔들림과 젖음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보편적 숙명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흔들림과 젖음을 물리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통해 자기의 유한성을 깊이 자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합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흔들림과 젖음은 어쩌면 우리를 존재의 근원과 연결시켜주는 촉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뿌린 씨가 잘 싹트지 않을 때 농부들은 밭에 씨를 덧뿌립니다. 그것을 움씨라고 하는데, 사는 게 꼭 이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당장의 내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 다시 한번 씨를 뿌리는 용기를 내야 해요. 나는 마음이 답답할 때면 가끔 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도판으로만 보던 그 그림을 실물로 보았을 때 그 강렬한 빛에 확고히 사로잡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노란 태양이 작열하는 한 낮, 농부는 씩씩한 걸음걸이로 들판 위를 걸으며 씨를 뿌립니다. 마치 후광처럼 환한 빛이 그에게 드리워 있습니다. 고흐가 그 그림을 그린 것은 1888년입니다. 그가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 전에 고흐는 벨기에의 탄광마을인 보리나주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갈등 끝에 목회자의 꿈을 접고 화가로 살기로 작정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그러니까 인생의 전환기에 탄생한 작품입니다. 나는 그 그림이 일상성의 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흐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성스러움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울 사도는 복음의 정신으로 살려고 애쓰다가 쓰디쓴 환멸을 맛본 이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절망의 심정이 깊어지면 그 때가 정말 올까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든든히 붙들어야 합니다. 움씨를 뿌리는 농부는 자기 속에 있는 절망을 애써 다독이며 희망을 뿌리는 것입니다. 덧거친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덥석 일에 뛰어들었다가는 상처 받고 물러나기 십상입니다.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특권이나 재능, 능력을 내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으로 여기는 겸허함이 필요합니다. 시혜자의 자리에 서는 순간 선한 뜻은 공적쌓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또 수혜자가 조금이라도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나는 정결법전에 나오는 규정 가운데 추수할 때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라'는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다 거두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게 나눠주면 좋을 텐데 왜 성경은 그것을 금지하는 것일까요? 시혜자-수혜자 구조가 만들어내는 비대칭적 관계맺음을 피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선한 일을 할 때 경계해야 할 것은 좋은 일을 한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기에 그런 마음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자꾸 도리질을 해야 합니다. 칭찬을 구하는 이들은 실망을 추수하게 마련입니다. 차라리 모욕까지도 받아들이려는 결의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피에르 신부는 자기 책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 한자락을 들려줍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을 리옹 변두리의 어느 불결한 장소로 데려갔습니다. 이가 들끓는 거지와 부랑자들이 40명 가량 모여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현직에서 은퇴한 후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아버지의 친구 몇 분도 이미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임을 결성하여 그 걸인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수염도 다듬어주고, 더러운 빨래도 세탁해 주고, 여분의 내의도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함께 갔던 그날 아버지는 걸인 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다가 거친 욕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기계에 머리카락이 끼었던 모양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어린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불행한 사람들을 보살필 자격을 갖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았지?" 이 장면은 피에르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마음산책, p.79-80 참고). 그가 평생을 집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엠마우스 운동을 벌였던 것도 이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모욕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지만, 선한 일을 하다가 모욕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간적 품격이 다듬어질 테니까요. 


기왕에 누군가와 함께 일하기로 작정했다면 그 동료들을 진심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바꾸려 하는 순간 관계는 어그러지게 마련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소중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정의 공동체가 발생합니다. 선한 일을 꾸준히 수행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귀한 선물은 존재의 성숙일 겁니다. 그것이 보상이라면 보상입니다. 부질없는 말이 길어졌습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르른 것은 오직 삶의 황금나무일 뿐"(파우스트)이라지요? 그늘진 땅, 소외된 땅에 머무는 이들을 돌보기 위해 분투하는 그 삶의 길 위에 무지개가 드리우기를 기원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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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밀알(15 03-30 09:03)
고맙습니다. 깊이 마음에 새기고 또 되새기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그들을 위해 가난한 심령으로 겸허히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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