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13-더 나은 사람의 꿈 2015년 03월 22일
작성자 김기석

 더 나은 사람의 꿈


잘 계신지요? 

사위가 고요한 시간, 홀로 일어나 앉아 찬물 한 잔을 들이켰습니다. 가슴 가득 시원함이 번져갑니다. 그리고 저 어둠에 잠긴 주변 세계를 바라봅니다. 책이 겹겹이 쌓인 서가며, 낯익은 생활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탁자 위에는 엊저녁 아내가 읽다가 덮어둔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놓여 있고, 옆에는 빨리 읽고 싶다며 꺼내놓은 줌파 라이히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도 보입니다. 며칠 감기로 골골거리더니 아내가 약국에서 받아온 분홍색 진해거담제도 지친 듯 놓여 있습니다. 거실 곳곳에 마치 숨겨진 듯 놓이거나 걸린 십자가를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그 십자가와 만났던 장소 혹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축복하는 마음으로 그 하나하나를 더듬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목에 걸고 다니던 끈 달린 노란 리본과 예은이 엄마가 잊지 말아 달라며 내 가슴에 부착해주었던 노란 리본을 가만히 만져봅니다. 저릿하게 스며드는 아픔에 눈을 감았습니다. 수많은 미완성의 이야기가 물에 잠겼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비극이라는 말로 가름할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스러져도 이야기는 죽지 않는 법이지요. 이야기를 불멸로 만드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기억에의 의지입니다.


고요한 시간을 핑계로 넋두리를 한 것 같습니다. 모악산 자락에서 함께 나누었던 대화가 참 좋았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이나 결 모두 마음에 새겨두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 노동의 흔적이 배어 있는 그 공간을 어둠 속에서 둘러볼 수밖에 없었지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걷어낸 자리에, 나무를 심고 푸성귀를 심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신명내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손 노동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제 삶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의 일을 도와 밭에서 일하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어른들이 밭두둑 저만치에 놓인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나는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그 작은 손으로 호미를 야무지게 들고 콩밭을 매곤 했습니다. 어른들보다 늘 앞서나갔었지요. 아버지가 집에서 상당히 떨어진 논에서 수확한 볏단을 지게로 져 나르실 때는 나도 작은 지게에 서너 뭇이라도 나르고 싶어하던 기억도 납니다. 중심을 잡지 못해 한쪽으로 쏠릴 때마다 지겟다리로 앙버티던 그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 나는 노동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웃통을 벗어부치고 장작을 패는 그런 노동이 아니라 해도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라치면 왠지 땅에서 뿌리뽑힌 것 같아 허전해집니다.


엊그제 어떤 신학 잡지를 재출간하기 위한 모임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학계의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팔십 넘으신 분이 여러 분 계셨고, 구십이 넘은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모두 그리 고요하고 꼿꼿하시던지요. 마치 큰 산 앞을 마주하고 앉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어른들이 유지하고 있던 고요함은 주변을 질식시키는 완강한 고요함이 아니라,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온유한 고요함이었습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한 어른이 그 고요한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여셨습니다. 최근에 어느 교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한국 교육은 연필깎는 것을 가르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한손에 칼을 쥐고 다른 손에 쥔 연필을 깎을 줄 아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네요.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구가 대신 해주거나 아니면 엄마가 대신 해 줄 테니까요. 저는 지금도 커터 칼을 들고 연필이나 색연필을 깎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치 글을 쓰거나 읽기 위한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팔십 대 중반의 한 어른은 연필 깎는 법을 배우기 전에 칼을 가는 법부터 배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각가인 한 원로는 손글씨를 훈련하지 않는 세태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손글씨 속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를 펼쳐들 때마다 마치 아버지를 뵈옵는 듯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편지를 가만히 손에 쥐고 있으면 따뜻한 사랑이 전해져오는 것 같아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눈 쌓인 교정에 길을 내기 위해 학생들 손에 비를 쥐어주자 빗자루의 각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라 쩔쩔매더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갈하게 비질된 절집 마당을 볼 때의 상큼함이 떠올랐습니다. 비질을 하는 것도 스님네들에겐 일종의 마음 공부일 겁니다. 가끔 사찰에 가면 요사채를 기웃거릴 때도 있습니다. 토방에 놓인 섬돌 위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고무신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벗어놓은 것만 보아도 그 사람의 내면 풍경을 알 수 있다고 하지요?


옛 어른들은 공부의 기본이 수신修身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 닦음은 몸 닦음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소학은 몸가짐,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를 구사구용九思九容을 통해 가르칩니다. '구용'은 특히 발걸음, 손동작, 시선, 말, 목소리, 머리 자세, 몸 전체의 기상, 서 있는 자세, 표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세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동감에 넘치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애어른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반발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규율이 사라져버린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이런 가르침이 재조명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얼추 이순의 나이가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여줄가리에나 집착할 뿐 깊은 곳에 당도하지 못한 채 어뜩비뜩 걷고 있는 내가 부끄럽습니다. 프로방스 지방의 아름다운 소도시 루르마랭에 머물던 사십 대 중반의 알베르 카뮈가 마음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선생님, 저는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해 유감스럽다고 여기는 때는 더러 있습니다. 젊은 때는 자신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굳은 결심으로 많은 시간을 바치면 결국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러다가 마흔다섯 살에 이르고 보면 맨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상태, 또는 그 비슷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발전에 대한 믿음만 없어진 채로 말입니다. 요컨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는 거지요. 알량한 진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지음,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김화영 옮김, 책세상, p.356-7)


문제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카뮈는 무서울 정도로 자신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맨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상태에 머물고 있더라는 말이 참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이것은 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내가 서리 내린 밭에 남아 있는 희아리(덜 익은 채로 말라비틀어진 고추)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오뉴월 논물 위에 둥둥 떠있는 속이 빈 우렁이 껍질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엄부렁한 내 삶의 실상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발전에 대한 믿음만 없어졌다는 말을 읽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진지한 고민이었는데도 그르니에는 답장에서 이런 탄식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카뮈가 연출한 <악령>에 대해 칭찬의 말만 하고 맙니다.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각자의 몫일 뿐이라는 뜻일까요?


아직도 어둠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허수한 마음을 풀어내 괜히 마음만 심란하게 해드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밭에서 땀을 흘리시겠군요. 밭가에 심어놓은 과실수들이며 밭에 심은 뿌리 식물들의 이름을 죽 열거하며 신나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쓰시는 글 곳곳에 이제는 흙냄새가 듬뿍 배어들겠지요?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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