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국민들은 어리석지 않다 2015년 02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국민들은 어리석지 않다


겨우내 황량했던 교문 앞 거리가 졸업과 입학 시즌이 되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학사모를 쓰고 교정 곳곳에서 졸업 사진을 찍는 학생들의 모습은 경쾌하고 발랄하다. 그들 곁을 지나치며 마음으로 기원한다. 부디 저 명랑함과 경쾌함이 지속되게 해달라고. 한때 대학 교문 앞에는 대기업에 취직한 학생들의 학번과 이름과 회사명을 적은 대형 플래카드가 자랑스럽게 내걸린 적도 있었다. 그만큼 취업의 문이 좁다는 사실의 반증일 테지만 대학 교육이 방향을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인 것 같아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체제에 포박된 채 다른 삶을 상상할 능력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을 보는 것은 고통이다. 때로는 규범을 파괴하고 사회가 설정한 경계선을 넘나들 줄도 알아야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저들에게 자본주의가 이미 프로그램화 해놓은 삶이 아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가끔 영문 모를 외로움에 시달릴 때가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외로움은 어뜩비뜩 걷고 있는 내 발걸음을 가지런하게 바로잡아 줄 스승이 없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외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알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지만 몇 년 전부터 친밀한 관계를 이어온 한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은 젊은 벗들을 가끔 불러내 격려하실 뿐만 아니라 음식까지 즐겨 대접해 주신다. 이 분야 저 분야에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후학들을 불러 소통하고 피차 배울 수 있도록 마당을 마련해주시고 싶은 것이다. 팔십 중반에 이른 어르신네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언행에는 어그러짐이 없다. 가르치려는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후학들이 나누는 대화를 듬쑥한 시선으로 경청하실 뿐이다. 문득 말길이 막힐 때면 그리운 옛 선생님들의 일화를 유쾌하게 들려주시어 분위기를 북돋으신다. 어쩌면 이것이 옛사람이 말하는 '말없는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후학들은 정신을 더욱 가다듬게 되니 말이다.


요즘 이 나라 국민으로 산다는 게 참 피곤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가르치려 드는 정치인들과 언론인들 종교인들 때문이다. 그 가르침이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진 인위적인 경계선을 지우도록 하는 것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들은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포박하여 자기들의 뜻을 수행하는 기계가 되도록 만든다. 그들의 열정이 클수록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지고 세상은 소란스러워진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경험한 노자는 말했다. "백성들이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소유할수록 국가는 더욱 혼미해지고, 법령이 화려할수록 도둑이 더 많아진다." 마음 속에 날카로운 것을 자꾸 만들도록 부추기는 정치와 언론과 종교는 타락한 권력이다.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이들은 몰염치한 사람들이다. 자기의 자기됨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멈칫거릴 때 그들은 서슴없이 위반함으로 자기 이익을 확보한다.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는 황폐하게 변하고 만다. 바벨론 포로기의 예언자 에스겔은 그런 이들을 향해 준엄한 신의 심판을 예고한다.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대통령의 임기가 이제 3년 남았다. 부디 남은 임기 동안 국민들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렸으면 좋겠다. 국민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이제는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지금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교문을 나서는 저 젊은이들이 다시 희망을 기획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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