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마태복음산책2 2015년 02월 25일
작성자 김기석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본문 / 마5:21-48


본문은 '(나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준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인정받았던 토라의 말씀을 예수는 과감히 해체한다. 30세 남짓의 한 청년이 전통적인 권위에 짓눌리지 않은 채 말씀의 속뜻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그의 영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영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율법주의의 틀 속에 갇혀 자칭 권위자들의 볼모로 잡혀 있던 말씀을 풀어놓아 마음껏 춤추게 하려 했다. 옛 사람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로써 진정한 가르침은 문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나중에 바울 사도는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b)라고 말함으로 진리의 경직성을 경계했다. 

21절부터 48절까지의 말씀은 대체로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라/하지 말라"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섯 번에 걸쳐서 '옛 사람'의 가르침과 '나'의 말이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명제와 반명제의 연속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은 옛 가르침에 대한 이해의 확장 혹은 심화라고 보면 좋겠다. 다양한 상황에서 발화되었을 이런 가르침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것은 예수를 모세보다 위대한 인물로 드러내려는 마태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살인, 간음, 이혼

먼저 살인과 미움(21-26), 간음과 음욕(27-30), 결혼과 이혼(31-32)에 대한 가르침에 주목해보자. 예수는 '살인하지 말라'는 옛 계명을 형제에게 노하거나 모욕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재해석한다. '살인'이라는 외적 행위에만 집중할 경우 많은 이들은 이 계명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 강자들의 폭력에 의해 약자들이 속절없이 죽임을 당하던 제국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어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엄중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이 계명에서 언표되지 않은 숨은 뜻을 읽어낸다. 형제 자매에 대한 미움, 분노, 경멸은 그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기에 살인이라는 외적 행위 못지 않게 폭력적이다. 내면에 감춰진 적의는 작은 불꽃 하나만 튀기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잠재태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불화한 이들과 적극적인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에 대한 적의를 품은 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불경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급진적으로 해석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아름다운 이들에 대한 감탄조차 죄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기쁨과 미소가 사라진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문제는 한 존재를 쾌락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마음이다. 목적과 수단의 착종에서 죄가 발생한다. "인간을 단순한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도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음욕'은 '음행'의 입구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우리를 실족하게 하는 눈은 빼버리고, 손은 찍어 내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가혹하게 들리지만 그 정도의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라도 죄에 팔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잘 아시기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사회적 강자인 남성들에 의해 언제라도 유린당할 수 있는 여성들의 입장에 서서 사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음행' 이외의 어떤 이유로도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버림받은 여인들의 삶은 광야로 내쫓겼던 하갈의 처지와 다를 바 없었다.


맹세, 보복, 원수

율법은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그것을 급진화해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자기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말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자기보다 더 큰 권위를 끌어들이곤 한다. 마치 그것이 맹세의 보증이 되는 것처럼.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맹세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안다. 자기 입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사는 얼마나 허황한가. 그렇기에 예수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7)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문장의 기본형태는 'A는 B이다'로 되어 있다. A는 주어이고 B는 술어이다. 주어와 술어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 문제는 수식어가 화려해질수록 말의 핍진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짓된 말일수록 화려한 경우가 많다. 말이 무너지는 순간 한 사회의 신뢰의 토대는 무너진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살라는 예수의 요구는 말들이 제집을 잃고 떠돌고 있는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옛 계명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로 재해석된다. 더 나아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속옷을 가지려는 이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런 요구는 매우 급진적이다. 이 대목을 강자들의 폭력을 해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비폭력 저항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 역시 급진적이다. 가해자-피해자 도식에 갇히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정신의 키를 원수 혹은 박해자보다 높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구제, 기도, 금식

본문 / 마태6:1-18


거룩한 삶은 모든 믿는 이들의 지향이자 과제이다. 그러나 거룩한 삶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서는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거룩한 삶은 종교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삶으로 구현되지 않는 신앙은 일쑤 독선이나 교만으로 바뀌곤 한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기보다 더 큰 세계에 접속하려는 이들은 자기 중심성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제, 기도, 금식은 유대인들이 가르치는 3대 경건 행위이다. 그것은 욕망에 휘둘리기 쉬운 우리 마음을 신에게 비끄러매는 닻 구실을 한다. 문제는 그런 경건 행위가 자기 강화의 욕망과 연결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때 그 신심 깊은 행위는 덫이 되어 사람들을 확고히 사로잡는다. 예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그런 낌새를 느낀 것 같다. 그래서 그 3대 경건 행위의 기초를 새롭게 놓으려 한다. 어느 경우에나 핵심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외식이라 일컫는다. 


구제와 기도

구제는 아름다운 것이다. 존 웨슬리는 진정한 회심은 돈 지갑의 회심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나의 소유를 다른 이들을 위해 내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존재에 대한 불안이 가중될수록 사람들은 소유에 집착한다. 소유는 불안의 해독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해독제를 다른 이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기에 진실한 나눔은 감동을 낳는다. 그리고 그 감동은 다른 이들의 닫혀진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는 이 거룩한 나눔의 행위가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꿰뚫어보고 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나눔은 영적 수행과 무관하다. 그런 나눔은 수혜자의 가슴에 굴욕감이라는 그늘을 만들어내기 쉽다. 도움을 받는 이들과 사진을 찍어 그것을 자기 선전의 도구로 삼는 이들이 있다. 예수의 사람들은 그래선 안 된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2). 그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복은 언감생심이다. 구제는 은밀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영혼을 타락의 늪에 빠뜨리지도 않고, 타인들의 영혼에 굴욕감을 심어주지도 않는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선한 일을 했다는 자의식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고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영혼은 너무 느슨해졌거나 너무 팽팽해져서 하늘의 선율을 연주하지 못한다. 기도는 자칫하면 자기 치장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권력으로 변할 수 있다. 장시간의 기도를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기호로 삼는 이들이 있고, 거기에서 발생한 권력으로 다른 이들을 압박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칭한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5). 기도의 자리는 골방이어야 한다. 여기서 '골방'은 물론 특정한 장소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마음의 홀로 있음'의 은유이다. 타자의 시선이 우리를 타락시킨다지 않던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역할을 연기할 때가 많다. 하나님은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이 아니라 우리 존재 그 자체에 관심이 많으시다. 유대인들의 자기 과시적인 기도도 문제이지만,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도 문제이다. 수많은 신들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신들의 이름을 부른다. 빠뜨리지 않을까 조바심치면서. 그렇기에 그들의 기도는 반복적이다. 참에 바탕을 둔 말일수록 단순하고 소박하다. 말이 허황한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을 많은 말로 설득하거나 속일 수는 없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절대자이신 그분 앞에 엎드림으로 잃어버린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주님 기도는 참으로 간결하다. 하나님에 대한 호명으로부터 시작하여 2인칭 단수 형태의 기원 세 가지와 1인칭 복수 형태의 기원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마태는 주님의 기도를 소개한 후에 용서에 대한 기도를 확장하여 들려준다. 사람이 서로의 과실을 용서해야 하나님도 용서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땅에서 벌어진 문제를 곧바로 하나님께 가지고 가 해결을 의뢰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얽힌 문제를 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 그래도 남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금식

금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행동이다. 참회와 재계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그것조차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동기에서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초췌한 낯색으로 '내가 금식을 하고 있다'고 나팔을 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경건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16). 일찍이 이사야는 금식에 대한 가르침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한 바 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예수는 유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경건행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의 오용을 경계할 뿐이다. 자기 부정으로 귀결되지 않는 신심행위는 악취를 자아낸다. 믿음 좋아 보이는 이들 가운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는 위선일 뿐이다.

















먼저 구해야 할 것

본문 / 마6:19-34


이 단락은 주님 기도의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의 확장 혹은 현실적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종교적 가르침은 참일 수 없다. 의식주의 문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삶의 기본이 아니던가. 지금 우리 주변에는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세상에는 여전히 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작중인물인 '대심문관'은 지상에 내려온 예수를 책망하듯 몰아세운다. 사탄이 돌을 떡으로 바꿔보라고 했을 때 예수는 마땅히 그 요구에 응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밥의 문제를 해결했더라면 인류의 비참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그럴싸하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참이 아니다. 본과 말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밥의 문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밥의 문제에만 탐닉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만다.


하늘에 쌓는 보물

예수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을 향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한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물'은 물론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며 집착하는 일체의 것을 이르는 말이고, '땅'은 불안과 불확실함이 가득한 실존의 정황을 이르는 말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바이다. 보물은 우리 마음을 휘어잡는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줄 알지만 사실은 보물에 의해 소유 당하는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우리 영혼을 잡아당긴다. 사로잡힘 속에는 자유가 없다. 자유를 잃는 순간 하늘의 세계는 가뭇없이 사라진다. 예수는 땅은 좀, 동록, 도둑의 위험이 있으니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한다. 마태는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지만 누가는 상세하게 설명한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12:33). 흩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야말로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삶이라는 것이다. 나눔을 통해 빈 자리에 하늘의 자유가 깃들게 된다. 

이어지는 눈에 대한 가르침은 다소 뜬금없이 끼어든 것처럼 보인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23). 하지만 이 단락도 재물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오감을 통해 작동된다. 그 가운데서도 시각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눈이 성하다는 것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말일 것이고, 눈이 나쁘다는 것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 재물에 눈길을 돌리면 눈빛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눈빛이 흐려지면 존재의 어둠이 깊어지게 마련이고, 삶은 가리산지리산 종작없이 떠돌게 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 또한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신앙은 '너희가 오늘날 섬길 자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신앙은 '이것도 저것도'(both-and)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재물'로 번역된 단어는 '맘몬'이다. 예수는 재물이 인간에게 최고의 자리를 요구하는 유사-신(quasi-god)임을 꿰뚫어보고 있다. 


염려하지 말라

선택의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이들을 향해 예수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다. 염려란 마음이 분열된 상태, 즉 온전함이 무너진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문제는 염려하는 마음이 의지적으로 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불청객처럼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를 거미줄처럼 옭아맨다. 염려에 사로잡히는 순간 시각은 좁아지고, 눈앞의 것이 크게 다가온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예수는 다른 세계를 가리켜 보인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는 쉽게 스러지지 않는다. 예수는 우리 눈길을 다른 데로 이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보라'는 단어와 '생각하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봄'을 굳이 한자로 표현하자면 '견見'이 아니라 '관觀'이다. 현상 너머의 세계를 꿰뚫어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세상에 눈을 뜨면 온 우주에 신비 아닌 것이 없다. 그 세계에 눈을 뜨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는 해소되고 만다. 세상을 조화롭게 돌보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가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는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하라'는 말 속에는 상상력이 내포된다. 상상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예수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를 꿈꿨다. 인간의 위대함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에 있다.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또 깊이 생각함을 통해 우리 속에 경탄하는 능력이 회복되면 염려의 인력이 줄어든다. 경탄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불안의 해독제가 아니던가. 

예수는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과 나중에 구해도 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삶의 우선 순위를 바로 하면 나머지는 따라오게 마련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 할 때 삶의 비애는 줄어든다. 내일의 염려는 내일에 맡기고, 오늘의 삶에 충실할 때 영원이 우리 속에 깃든다.




















제자들의 삶의 방식

본문 / 마7:1-12


에덴 이후의 삶, 곧 불안이 인간의 기본 조건이 된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살 수밖에 없다. 협동보다는 경쟁이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도시에서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창세기는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갈등과 화해 이야기를 중심 모티프로 삼고 있다. 한정된 재화 혹은 삶의 기회를 배분할 때 갈등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갈등葛藤은 칡덩굴과 등나무덩굴을 이르는 말이다. 옛 사람은 욕구나 이해가 복잡하게 뒤엉키거나 충돌하는 상황을 식물적 상상력을 통해 눈에 그리듯 보여주었다.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해가 엇갈린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대개 갈등을 불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의견의 차이가 발생하면 합리적 토론을 통해 바른 길을 찾아가기보다는 차이를 무마하는 길을 모색한다. 대립적 상황이 주는 심리적 불편함이 싫기 때문이다. 삶은 어차피 적대적 타자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이 삼가 지켜야 할 삶의 원리는 무엇인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 이 말씀은 자칫하면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한 방편적 지혜를 가르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으로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수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여기서 '비판하다'라고 번역된 단어 '크리네'는 '간주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정죄하다'는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는 단어이다. 어쩌면 이 단어는 '비판'보다는 '정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정죄한다는 것은 그에게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단정한다는 것, 그것은 그를 고정시키는 행위이다. 달리 말해 그의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행위이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라 했다. 비판 혹은 정죄가 쇠로 만든 우리가 된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고 있다. '네가 그렇지', '너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라는 따위의 말을 듣고 산 사람은 부정적 자아 정체감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말은 그의 생명을 내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유와 권능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엄격하게 말한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 유대인들의 속담에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그 눈빛으로 우리를 본다는 말이 있다. 두려운 말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타자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도록 학습된 이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그들은 돌이켜 자기를 살피기보다는 남을 살피는 일에 더 익숙하다. 자기 죄나 허물은 합리화하거나 덮어두고, 남의 죄나 허물은 부풀리는 것이 우리 버릇이다. '어찌하여'라는 단어 속에 예수의 마음 아픔이 담겨 있다. 이런 시선의 폭력이야말로 타락한 존재의 특색이 아니던가. 예수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보다는 타인의 눈에 어린 눈물을 바라보던 분이다. 그 눈물에 얼비친 절절한 아픔, 외로움, 두려움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으로 읽으셨다. 사람들을 정깊게, 따뜻하게만 바라보아도 우리 존재가 깊어진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6a)는 말씀은 다소 난해하다. 대구법으로 구성된 이 단락에서 '개'와 '돼지'가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지레 단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소중한 가르침을 통해 자기 삶을 바꿔나갈 용의가 없는 사람들, 어떤 경우에도 남을 물어뜯으려는 이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는 권고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


황금률

7절은 자주 인용되면서도 오해의 소지가 많은 대목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세 개의 동사가 연이어 나온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 동사의 목적어가 없다는 사실이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암시조차 없다. 더욱이 8절은 구하는 이마다 얻고, 찾는 이마다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무 것이나 간구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인가? 이 이야기가 개진된 맥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목적어가 없는 동사를 세 번씩이나 연이어 쓴 것은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목적어를 앞서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러주셨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그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예수는 불안해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상기시킨다. 악한 자라 해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하물며'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악한 아버지와 좋으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선택된 단어이다. 하나님은 구하는 이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일까? 12절의 말씀이 그 답이 아닐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대접'이 무엇이냐이다. 사실 '대접하다'는 뜻으로 번역된 단어의 본래 뜻은 '행하다'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다른 사람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는 방식으로 다른 이에게 해주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존중받고 싶다면 남을 존중하면 된다. 이 마음 하나면 된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마음이다. 이 마음이 없어 세상이 전장이 되고 말았다. 




















지혜로운 사람

본문 /마7:13-27


이 부분은 산상수훈의 종결 부분에 해당되는 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을 향한 경고와 바람직한 생활에 대한 격려가 반복적으로 교차되고 있다. 이 단락의 핵심어는 '행하다'이다. 마태복음은 유난히 실천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는다'는 말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한국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살아내는 실천 없이는 진실한 믿음도 없다는 마태의 선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제자들이 선택해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셨던(5:20) 예수는 사회적 통념 혹은 욕망을 거스리는 길을 가리킨다. 좁은 문보다는 큰 문으로 들어가고 싶어하고, 몹시 좁은 길보다는 넓은 길을 걷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넓은 문 혹은 넓은 길은 기존 체제를 내적으로 수용하고 살아가는 삶을 가리킨다. 반면 좁은 문 혹은 좁은 길은 기존 체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옛 세계에 속한 모든 것을 버려두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으니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사람을 낚는 일에 나섰으니 말이다.

예수가 사셨던 사회적 세계에서 넓은 문 혹은 넓은 길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성전 체제와 권위자들의 가르침을 자기 삶의 최종 권위로 수용하고 살아가는 삶, 즉 인습에 젖어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전혀 다른 길을 가리키신다. 그는 존재의 변화를 요구한다. 즉 법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새겨진 삶,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문'의 은유는 '길'이라는 은유로 확장된다. '문'이 신앙적 결단을 의미한다면 '길'은 삶의 지속성과 연관된다. 새로운 존재는 결단과 지속에의 열정을 통해 빚어진다.


거짓 선지가 분별법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대조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로 이어진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접근하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이다. 겉모습만 보아서는 진위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경건하기 이를 데 없고, 심지어는 귀신을 쫓아내거나 권능을 행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에나 거짓 선지자는 있게 마련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들에게 미혹되기 쉽다.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붙잡을 능력이 없는 이들은 자기 마음을 강하게 붙들어줄 사람을 보면 열광한다. 하지만 그런 열광의 뒤끝이 개운치 않을 때가 많다. 지유조심只有操心이란 말이 있다. 오직 마음을 꼭 붙들라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수는 분별을 위한 시금석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16, 20)라는 말이 그것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8).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뿌리가 본本이라면 열매는 말末이다. '나무 목木'과 결합되어 있는 가로 획 '한 일一'자의 위치가 그 사실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본과 말을 뒤집는 게 문제지, 말이 모두 그른 것은 아니다. 좋은 열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좋은 뿌리이다. 그러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뿌리의 건강함을 알기 위해서는 열매를 살필 수밖에 없다. 이 단락의 결론은 자명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고백은 쉽지만 실천은 전 인격의 투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그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그 길은 생명과 잇대어 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집 짓는 자의 비유는 산상수훈의 결론이다. 이 단락에서도 역시 대조법이 사용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반석'과 '모래', '무너지지 않음'과 '무너짐'이 그것이다. 이 둘을 가르는 것은 들음과 행함 사이의 일치 여부이다. 야고보의 말을 참조하면 좋겠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약1:22-23). 신앙생활이란 들음과 행함,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어야 한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앎은, 특히 종교적 앎은 교만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죄책감을 자기보다 약한 타자에게 투사하여 비난하는 일을 우리는 흔히 만난다. 예수는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의 허망함을 종말론적인 심판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칠 때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는 것이다. 회복 불능의 참극이다.

28절과 29절은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반응은 '놀람'이었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어떤 차이였을까? 앨버트 노런은 예수와 바리새파 사람들의 차이를 간결하게 대조하여 설명했다. 예수는 진리를 권위로 삼았고, 바리새인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았다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된 채 말을 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인습적인 지혜에 기대어 말을 했던 것이다. 상투어는 사람들에게 놀람을 일으키지 못하는 법이다.

















병자 치유, 제자 부르심(1)

본문 / 마8:1-34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제자들의 삶을 가르치신 예수는 이제 또 다른 사역을 펼치신다. 치유 사역이 그것이다. 마태는 8장과 9장에 10개의 기적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자연 이적까지도 포함된다. 하필이면 왜 10개인가? 이 열 가지 기적 이야기는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벌어졌던 재앙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재앙 이야기가 옛 세계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면 열 가지 기적 이야기는 예수를 통해 도래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주의깊게 보면 이 기적 이야기가 매우 정교하게 구조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는 3가지 기적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예수께서 제자 혹은 일꾼을 부르시는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다. 부르심에 대한 기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따르라'는 명령어이다. 이런 의도적인 배치는 예수를 통해 나타난 기적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생명의 회복 사건은 제자들을 통해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경계선을 넘나들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자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다. 무리로 표상된 사람들은 대개 기존 질서의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종교적인 이유로, 경제적인 이유로, 건강상의 이유로 중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고대한다. 2절의 원문은 '그리고, 보라'(and, behold)라는 말로 시작된다. 우리말 성경은 이 대목을 생략했다. 하지만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마태는 이 구절을 통해 정결과 부정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수의 모습을 강력하게 드러내려 한다. 무리 가운데서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나와 절하면서 말한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 예수가 그의 몸에 손을 대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하자 나병이 떠나갔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정결예법에 의하면 스스로를 부정케 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예수는 서슴없이 그의 몸에 손을 댐으로 그의 부정을 자기 몸으로 받아들인다. 그 아름다운 행위로 인해 부정은 소멸되고 환자는 회복된다. 예수는 그 환자에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림으로 회복되었음을 입증하라고 말한다. 이로써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이야기(5-13절) 속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있다. 도움을 청하는 백부장이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부장이 고쳐달라고 부탁한 것은 중풍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그의 하인이었다. 예수는 이번에도 망설임없이 응답한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 고통받는 이에 대한 연민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선조차 넘어서게 만든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를 집에 모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절대적 신뢰이다.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에 경탄한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b)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힌 이들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겸손과 신뢰로 그 나라를 모셔들이는 이들이다. 예수께서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자 하인은 즉시 나았다. 구원의 능력은 민족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이후에도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 그리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신 이야기가 이어진다. 마태는 그러한 치유 이적을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말했던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 말한다. 이로써 마태는 예수의 치유 사역이 단순히 병자를 고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난초가 그 향기를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예수라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은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무리들의 속성을 잘 아시기에 예수는 그들에게서 잠시 멀어지려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이르신다. 그때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한다. 예수는 제자직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냉엄하게 일깨운다. 그것은 정착생활이 주는 안락함을 포기한 채 끝없이 유목적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그 신산스런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마태는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기관이 예수를 따랐는지에 대해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일화는 우리를 '그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 앞에 세운다.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따르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제자에게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22)고 간결하게 답하신다. 제자의 요구가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왜 예수는 그의 청을 거부했을까? 부름에 따른 응답이 종말론적 긴박성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일깨우려는 것이었을까?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사건(23-27)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겪게 될 위험에 대한 유비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큰 놀'과 '물결'은 제자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뒤흔드는 상황이다. '구원'을 간청하는 제자들의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예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다. 그러자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마치 혼돈 속에서 질서가 태어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자연 이적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7) 질문 속에 이미 답이 내포되어 있다.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신 사건(28-34)은 '마성적인 힘'을 다스리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준다.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가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에 돼지떼 속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달라 한다. "가라"라는 한 마디에 그들은 돼지떼 속에 들어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했다. 예수가 있는 곳에서 귀신들은 힘을 쓰지 못한다.

















병자 치유, 제자를 부르심(2)

본문 / 마9:1-38


이분법을 넘어

9장의 전반부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적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서기관(3), 바리새인(11), 세례자 요한의 제자(14)이다. 마태는 이들로 대표되는 신념체제와 예수를 맞세움으로써 예수 운동의 새로움을 드러내려 한다.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머물던 예수가 '본 동네' 곧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마가복음 본문은 그 광경을 눈에 보일 듯하게 그려 보여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환자를 침상째 달아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드라마틱한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아주 건조하게 사건을 전한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다짜고자 용서를 선언하신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생략에는 분명히 의도가 있다. 마태가 전하려는 것은 치유 사건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드러난 예수의 죄 사하는 권세이다.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은 죄 사함을 선언하는 예수를 불경하다고 느낀다. 서기관들의 속 마음을 알아차린 예수는 그들의 생각이 악하다고 책망한다. 병이 죄의 결과라는 사회적 통념을 예수가 그대로 수용했는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신학이론이 아니라 생명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병과 죄를 막바로 연결시키는 세상에서 주눅든 채 살던 그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의 선언이었다. 마태는 이 사건을 통해 죄를 사하는 예수의 종말론적인 권세를 증언하고 있다. 두려움과 놀람으로 반응하는 무리들의 존재 자체가 그 권세의 반증이다.

세 가지 이적 이야기 끝에 제자를 택하여 부르는 패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세리 마태이다. '세리'는 '죄인'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부정한 자의 대명사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세리는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특정한 집단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범주화되는 순간 각 개인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만다. '우리-그들'의 이분법은 때로는 매우 폭력적이다. 그런 이분법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람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마련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예수는 사람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가볍게 횡단한다. 예수가 부르시자 마태는 즉시 일어나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앉았다. 식탁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관습을 벗어난 예수와 제자들의 행태에 대해 항의한다. 남들과 구별됨을 자기 존재의 기반으로 여기는 그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아주 간명하게 말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2) 바리새인들이 건강한 자이고 세리들이 병든 자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중의적이다. 경건한 몸짓을 하며 살지만 다른 이들을 품어줄 수 없을만큼 영혼이 협소한 사람들이야말로 병든 자들이 아니겠는가? 자기 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상처입은 자들을 품어안으려는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예수의 행태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다. 이 두 집단이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문제는 '금식'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경건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금식을 해야 하는 데 예수와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으니 그들의 경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금식은 인간 속에 있는 동물적 욕구를 제어하고 존재의 심연에 가닿으려는 절실함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다. 금식은 은혜의 이르는 수단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금식을 하는 데 너는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너는 경건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판단할 때 금식은 자기 의가 된다. 예수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생을 경축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런 의미에서 이전의 종교와 철저히 구별된다. 


예수 운동의 핵심: 연민

치유 이야기의 마지막 단락은 속도감이 대단하다. 한 관리의 죽은 딸을 살려낸 사건 사이에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에 시달리던 여인이 치유받은 사건이 액자구조로 배치되어 있는 것은 다른 복음서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마가복음(5:21-43)과 누가복음(8:40-56)의 평행 본문에 비해 마태복음의 기술은 매우 간결하다. 이런 생략은 앞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치유 사건 그 자체에 독자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마태의 전략이다. 관리와 여인은 예수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낸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18).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21). 그들은 구하는 것을 얻었다. 

절대적 신뢰로서의 믿음에 대한 강조는 맹인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사건과 귀신에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친 사건을 통해서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반응한다. 바리새인들만은 둥두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예수의 존재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한다. 이제 누가 병자인지 다 드러났다. 마태는 예수의 치유 사역을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35)

마태는 이 대목을 통해 예수 운동의 핵심이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임을 강조한다.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 차별과 천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던 사람들 곁에 다가가 벗이 되어주고, 격려하고, 치유하는 일을 배제한 채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자들의 선교

본문 / 마태10:1-42


산상수훈(5-7장)과 치유 사역(8-9장)을 마무리 하면서 마태는 무리들의 상황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신세로 요약했다. 고생하며 기진한 사람들. 마태는 아마도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상황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 어디를 바라보아도 희망의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런 가운데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나갈 일꾼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10장은 바로 그러한 필요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8장과 9장이 일관되게 증언한 예수의 권능이 이제는 제자들에게 위임되고 있다. 마태는 권능을 부여받고 세상으로 흩어지는 제자들을 일러 '사도'(보냄을 받은 자)라 한다(2). 


떠나기 전에

5절부터 15절까지 계속되는 파송의 말씀은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에 대해 설명하는 40-42절과 호응하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일러준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은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이다. 가야 할 곳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있는 곳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활동하신 예수님의 명령치고는 매우 국수주의적으로 들린다. 이것은 정말 예수님의 명령일까? 아니면 유대인 공동체와 갈등 속에 있던 초대교회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선택한 수사일까? 혹은 예수 운동이 지향하는 바가 무너진 열두 지파를 회복하는 일이었기 때문일까? 

예수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소상히 일러준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8) 일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생명을 온전케 하고 풍성하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은혜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대가를 계산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이 되고 만다. 거저 주려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만나는 순간의 빛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

보냄을 받은 자들은 소유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10a). 자기를 위한 안전장치 없이 길을 떠날 때 사도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 없기에 누군가의 호의에 의지해야 하고, 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선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세상의 꿈을 가지고 길 위에 선 제자들을 영접하는 이들을 위해서 평안을 빌어주는 것도 소명의 일부이다. 그들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 이들 때문에 마음 쓸 것 없다. 그런 일로 상처를 입는다든지 낙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영접하지 않는 집이나 성에서 나가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이르신다. 물론 이것은 종말론적인 긴박성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 상황의 산물이다.


위험 속으로

예수는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험을 숨기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6) 새로운 세계를 열려하는 자는 옛 세계의 박해를 받게 마련이다. 옛 세계는 자기들의 질서를 뒤흔드는 이들에게 불온의 낙인을 찍는다. 배제와 추방 혹은 투옥이 이어진다. 예수는 제자들이 공회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고, 관원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뿐 아니다. 가족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초대 교회 교인들이 겪었던 현실을 사후 예언의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의 길은 언제나 가시밭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

예수는 선생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 제자의 길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고난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표지가 될 때가 온다.  감추인 것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때가 이르면 누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환히 드러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짧은 단락에 마치 방점을 찍듯 세 번씩이나 '두려워하지 말라'(26, 28, 31)는 말이 반복된다. 기꺼이 수난을 받아들이려 할 때 하늘의 자유가 유입된다. 안일한 평안을 얻기 위해 영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를 생각해본다. 그 타락으로 인해 비난받기는 하지만 진리의 길을 걷다가 박해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의 삶을 종교적으로 추인해주는 일이 더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는 예수의 몸인가?

예수는 평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지만 그것은 '좋은 게 좋은' 안일한 평화가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값비싼 평화이다. 그것은 불화를 거친 평화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이들의 가장 큰 걸림돌이 가족인 경우가 많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더라"(36). 참 가슴 아픈 지적이다.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새를 잡아채는 올가미처럼 가족은 중력이 되어 우리를 안일한 행복 쪽으로 잡아당긴다. 하지만 잘 드는 칼로 그 끈을 잘라내지 않으면, 그런 아픔을 겪어내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하지만 예수의 길은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료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길에 나선 이들을 영접하는 이들이 누릴 상급이 있다고 말한다(40-42).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본문 / 마태11:1-30


진술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는 끊임없이 움직임으로 로마 제국에 의해 부과된 세계, 그리고 유대교가 구축해놓은 세계 질서에 틈을 낸다. 거룩함과 속됨,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무너졌다. 하나님 나라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누구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모두가 형제자매일 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위임하셨지만 자신의 일을 계속하신다.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이 그것이다(1). 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다만 당신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가리킬 뿐이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5) 세례자 요한이 들었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이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해 증언되고 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자기 증언 혹은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맺는 삶의 열매를 통해 드러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예수가 있는 곳에서 일그러졌던 생명이 회복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가 누구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들사람 요한에 대해 말한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 광야로 나간 것은 참 소리를 그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이 아니라면 그 거칠고 척박한 땅에 사람들이 갈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보려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나갈 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실상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가끔은 누군가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을 가차없이 찢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것이 신을 향하도록 지음받은 인간의 속성이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 또 당신의 길을 앞서 예비하는 '사자'(messenger),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라고 말한다. 극찬이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0). 이 말은 옛 세계와 새롭게 도래하는 세계의 문지방에 서 있는 그의 실존을 가리키는 말이지 그를 비하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천국에 크고 작음의 위계가 있겠는가? 수수께끼 같은 말은 그 다음에 나온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 메시야가 오실 길을 닦았던 세례 요한이 겪고 있는 시련 혹은 예수 운동에 가해진 박해를 가리키는 것일까? 여기서 사용된 단어들을 비유의 언어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침노' 혹은 '빼앗느니라'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부정적 어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단어 속에 담겨있는 행동에 주목해보자.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관념이나 추상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머리의 언어는 손과 발의 언어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수는 그 시대를 동무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둔감함의 시대로 규정했다. 부드러움은 생명에 가깝고 굳어짐은 죽음의 가깝다. 그 시대는 거의 죽은 시대이다. 탓하는 말과 비방의 말이 난무하는 곳에서 진실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9b). 여기 나온 '행한 일'이라는 구절은 2절에 나오는 '그리스도가 행한 일'과 짝을 이루어 이 단락을 종결짓는다.


그리스도의 멍에

21-27절은 우리에게 예수의 낯선 얼굴을 보여준다. 화를 삭이지 못하는 예수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도 또한 인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가르치고 선포해 보아도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자아에 포획당한 사람들은 마치 쇠항아리 속에 갇힌 것처럼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한다. 갈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보는 이들이 많다. 예수가 권능을 많이 행하신 갈릴리 성읍들, 곧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역정을 내신다.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에서 그런 권능을 행했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거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소돔 땅까지도 예시된다. 이러한 대조는 청중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기 위한 의도적 서술이다. 문제는 익숙함과 당연함이다. 당연의 세계에는 경탄이 없다. 경탄이 없는 곳에서 삶은 그저 견뎌야 하는 지겨움이다. 삶이 힘겨워서일까, 희망을 구성할 기력이 없어서일까? 주님의 화냄은 분노라기보다는 탄식 혹은 연민에 가깝다. 탄식은 기도로 이어진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 새로운 세상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시작된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이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서기 어려운 이들을 쉼으로 부르신다. 그것은 죄의 짐일 수도 있고, 삶의 힘겨울일 수도 있고, 율법의 멍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나의 짐을 누군가에게 맡기려 하는 순간 어그러지기 일쑤이지만, 예수와의 관계는 짐을 맡김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품으로서만 제시하지 않는다. 예수의 사람들은 그의 멍에를 메고 그로부터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배워야 한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낮아짐이다. 낮아짐을 통하지 않고는 열리지 않는 것이 영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 당도하는 순간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예수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30)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