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8-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 2015년 02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


평안하신지요?

지난 번에 만났을 때 마치 늘 만나는 벗인양 허물없이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격조한 세월이 만들어내는 소원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을 보면 우리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별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통할 수 있는 벗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눈이 내리자 문득 친구가 그리워져 배를 타고 친구 집을 찾아갔다가 사립문 앞에서 그저 돌아섰다는 옛 사람의 이야기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흥에 따라 왔다가 또 표표히 돌아서는 그 홀가분함이 부럽습니다. 안태 고향이 그러하듯 아무런 강제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이들이 있다면 삶이 지금보다는 한결 수월해질듯 싶습니다. 해야 할 일 혹은 성취해야 할 목표를 인간관계의 중심에 두는 이들과 만난 후면 저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곤 합니다. 내향적인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의지적 강제가 느껴질 때마다 제가 뒷걸음질치는 것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안간힘입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때의 불편함처럼, 강요된 역할 혹은 자리에 설 때마다 쇠항아리를 뒤집어쓴 것처럼 답답해하곤 했습니다. 저는 천성이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제 분수나 잘 지키며 살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게 참 마뜩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며칠 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인 조현아 씨의 1심 재판 결과가 나왔더군요. 이미 게이트를 떠난 비행기를 되돌린 그의 행태를 꾸짖으며 재판장인 오성우 판사는 징역 1년을 선고했습니다. 그 형량이 적절한지 여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판결문의 한 대목이 제게 생각할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심이 있었다면, 직원을 노예처럼 여기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그의 죄는 비행기를 되돌린 행위이지만 그런 행위를 유죄로 판단한 또 다른 근거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입니다. 재판장은 조 전 부사장은 물질적으로는 넉넉한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됨의 조건인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심'이 결핍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결락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결락이 타자에 대한 잠재적 폭력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권력자에게 더 넓은 자아의 공간을 마련해준다지요? 권력이 주어질수록 몸을 더욱 낮추지 않으면 그의 존재 자체가 타자에게 무거운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인 인간의 삶을 다각도로 파악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삶은 관계맺음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일러 하이데거는 '고려'(Besorge)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단어는 '배려'(Fursorge)입니다. 복잡한 그의 철학 이론을 뒤틈바리인 제가 일매지게 설명할 능력은 없습니다만, '~ 위하여'를 뜻하는 'fur'라는 접두사 속에 담긴 느낌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타자의 입장에 서보는 데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타자가 자기의 능력과 사람됨을 주체적으로 사용하고 또 형성해 가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해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 잠시 머물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도시 교외 지역에 살고 있던 어느 피아니스트가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독일식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가 흥미로웠습니다. 음악 이야기며 건축 이야기며 신앙에 대한 이야기며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나올 때 공동 주택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던 한 젊은이가 독일 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분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집에 가서 세탁기를 돌리면 안 되겠지요?" 그러자 그는 "8시가 넘었으니 오늘은 안 되겠네요. 너무 늦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제게 휴일이면 잔디 깎는 기계도 돌리지 않는 게 이 사회의 불문율이라고 말했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나 좋을 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는 게 이런 배려의 마음이 아닐까요? 배려는 타자 윤리의 핵심입니다.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된 자기로부터도 멀어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일쑤 거짓 자아(false ego)를 참 자기(true Self)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자기 부풀리기, 자기 강화야말로 거짓 자아의 특색입니다. 참된 자기로부터 멀어진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적대적입니다. 뿌리뽑힌 자의 불안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가 가르치는 어짊(仁)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의 욕망을 누르는 것이고(遏人欲), 다른 하나는 하늘의 뜻을 물으며 거기 머무는 것입니다(存天理).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克己復禮). 마음이 허황한 자의 자발없는 말이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 나무라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모든 존재자는 존재 그 자체인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드러낸 것이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리고 이것을 '존재자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를 찾아갈 수 없다'는 말로 갈무리해 두었습니다. 저는 삶이란 하나의 중심을 향한 순례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이웃'을 도외시하거나 속된 존재자의 세계를 벗어난 채 초월의 세계로 도약하는 길은 애당초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철학자인 김진석 선생이 초월超越이 아니라 '포월匍越'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나온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여깁니다. 가장 낮은 바닥을 기지 않고는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역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본적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지만 그 동등함을 기꺼이 포기하고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고 말합니다. 그저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발적인 낮춤을 귀히 여기시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자발적 낮아짐과 올리움의 변증법적 순환이야말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방식이 아닐까요?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homo incruvatus in se).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모든 판단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 해도 우리의 판단은 주관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런 자기 중심주의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의 자리로 자꾸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마음 쓸 때 우리는 조금씩 자기 중심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오게 됩니다. 죄는 이웃에게 등을 돌리게 하지만 사랑은 이웃을 마주 보게 만듭니다. 마주본다는 것, 그것은 그를 나와 똑같은 존재로 인정한다는 말일 겁니다. 쏘아보는 눈, 공포에 질린 눈이 아니라 편안하게 마주보는 눈길 속에 하늘이 깃드는 법입니다. 타자와 마주본다는 것은 모험이기도 합니다. 상처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처가 무서워 그와 마주 보기를 거절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수 절기가 다가오는군요. 깊은 산 계곡으로 눈석임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암울한 시대에도 봄볕이 비칠 날이 오겠지요? 그 날을 기다리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봄볕처럼 다사로운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합니다. 오늘도 희떠운 소리가 많았습니다.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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