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4 2015년 01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오르페우스의 노래


소한 추위가 지나더니 날이 제법 푸근합니다. 건물 사이로 히뜩히뜩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산이 보입니다. 마치 시원의 그리움처럼 내 속에서 뭔가가 꿈틀합니다.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고향 같습니다. 겨울, 따뜻한 실내에 오래 머물러 몸과 마음이 느른할 때면 눈 덮인 평원을 헤매던 닥터 지바고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바리키노에 있던 얼음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을까요? 라라와 머물던 그 집에서 유리 지바고는 시를 썼지요. 창 밖에는 늑대 무리가 우우 울고, 유리창에는 성에가 낀 그 집에서 그는 촛불을 밝혀놓고 언손을 호호 불어 녹이며 라라에 대한 사랑 노래를 지었습니다. 젊은 날 그 장면 하나가 제 마음에 콕 박혔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런 차가운 고독과 열정을 버무리는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일까요?


1970년대 후반에 제가 다니던 신학교의 학장이셨던 윤성범 박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모님은 가족들과 상의한 후 교수님의 책을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하셨고, 당시 문예부장이던 저는 그 책을 학교로 옮겨오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홍제동인가에 있던 그 이층집은 참 아담하고 소박했습니다. 한 겨울이어서였을까요? 선생님의 이층 서재는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한 뛰어난 신학자의 정신이 빚어진 그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다소 감동적이었지만 시린 손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랫층에서 차를 한 잔 끓여가지고 올라오신 사모님께서 "춥죠?" 하고 물으셨을 때 철없는 저는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불기 없는 서재에서 공부하셨어요." 아, 그건 충격이었습니다. 가슴은 따뜻하게 하되 머리는 차갑게 하라는 옛 어른들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요? 교수님은 선비셨던 것입니다. 자그마한 몸집에 베레모를 눌러쓰고 다니시던 선생님은 가끔 창고 같은 가건물에 있던 탁구장에 들러 학생들과 탁구를 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식없고 허물없던 분인데,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렇게도 엄정하셨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습니다. 결곡한 태도로 살아가던 그런 선생님들이 한 분 두 분 떠나시고 안 계셔서 세상은 더욱 빈곤해진 것 같습니다.


가끔 겨울에 제 사무실을 찾아오는 이들은 조금 당황스러워 합니다. 실내 기온이 좀 낮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에서도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일을 하니 좀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홀로 지내는 공간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게 죄스럽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앞에서 말한 그 두 에피소드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바고나 돌아가신 선생님의 그 냉열(冷熱)한 태도를 내면화하지는 못했지만 흉내라도 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그 엄정함과 서늘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채 순치된 동물처럼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조금 지친 듯한 느낌입니다. 삶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도시는 끊임없이 우리를 삿된 욕망의 벌판으로 몰아댑니다. 자유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욕망의 지배를 허락하는 순간부터 우리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썩은 겨릅대처럼 허물어지고 맙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사막으로 들어갔던 초기 교부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로마에 살던 귀족들의 타락한 실상을 보고는 수비아코의 동굴 속에 들어가 여러 해 기도에 정진했던 베네딕도의 마음이 어렴풋이 헤아려지기도 합니다. 7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활동했던 고백자 막시무스의 말도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욕망이 강해지면, 지성은 잠자는 동안에도 정욕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들을 상상합니다. 도발하는 힘이 강해지면, 지성은 두려움을 초래하는 것들을 상상합니다. 더러운 마귀들은 우리의 태만함 안에서 힘을 얻어 정념들을 자극하고 강화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덕을 행하게 함으로써 정념들을 연약하게 만듭니다."(필로칼리아·2, 116쪽)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는 정념에 물든 생각들을 거부하기만 하는 사람이 있고, 정념들 자체를 완전히 잘라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시편낭송이나 기도, 정신을 하나님께로 들어올림, 또는 비슷한 방법으로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물리칩니다. 정념들은 그것들이 발생한 근원이 되는 사물들로부터 적절히 이탈함을 통해서 근절됩니다."(필로칼리아·2, 168쪽)


막시무스는 우리의 정념들을 자극하고 강화하는 것을 일러 '더러운 마귀들'이라 하는군요. 소비사회의 볼모가 되어 살고 있는 이들은 이 말을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사실 욕망의 천국은 얼마나 휘황하고 자극적이고 아름답습니까? 저는 요즘 녹화를 위해 방송국에 오갈 때마다 현대백화점을 통과하곤 합니다. 즐비하게 진열된 물건들 사이를 걷는 동안 제 시선을 잡아채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를 걷는 이들의 심정이 저와 같았을 겁니다. 소비의 낙원은 참 매혹적입니다. 돈만 넉넉하다면 사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물론 그것이 꼭 필요해서는 아닙니다. 상품은 존재 그 자체로 우리 속에 결핍감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돈을 필요로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했던 마녀 세이렌이 떠오릅니다. 


세이렌은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새 모양을 한 바다 요정입니다. 스킬라의 바위 섬들 사이에 있는 어느 벼랑 위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 노랫소리에 홀린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세이렌의 유혹에 저항하는 방식은 둘입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꼭 듣고 싶었던 호메로스의 '오딧세우스'는 부하 선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합니다. 자기를 돛에 묶은 후 협곡을 다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아무리 애원하더라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는 것과 뱃머리를 섬쪽으로 돌리지 말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원들의 귀에 밀랍을 채워넣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짜릿하지만 오금이 저린 방식입니다. 


또 다른 예는 아르고호를 타고 금양모피를 구하러 모험에 나섰던 이아손의 경우입니다. 그는 키론의 충고대로 자기 배에 오르페우스를 태웁니다. 세이렌의 협곡을 지날 무렵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꺼내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세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유혹의 노래를 이길 힘은 그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려면 내면을 깨끗이 비워야 합니다. 비운 자리에 울림이 깃들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유리 지바고가 쓴 시는 누군가의 가슴에 해바라기를 피웠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누구의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날까요? 이런 생각이 서리병아리처럼 살아가고 있는 저를 일으켜 찬 바람 앞에 세웁니다. 그곳에도 찬 바람이 많이 불지요? 그 바람 앞에 설 때마다 제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지르된 처지이긴 하지만 거짓되지는 말아야 하니 말입니다. 눈비음에 지친 삶에 늘 진실의 전망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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