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3 2015년 01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해 저문 빛이라도 있으니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참을 찾기 위해 늘 고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느슨해졌던 제 마음을 바루곤 합니다. 평안함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을 자꾸 도스르지 않으면 수도자들의 '아케디아'(懶怠)에 빠지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조금 나이가 든 탓일까요? 요즘처럼 추워 몸을 웅크리고 지낼 때면 어린 시절 쩡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던 얼음의 울음소리가 떠오릅니다. 그 소리의 부추김으로 생각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년 시절에 당도하기도 합니다. 


채워놓은 논물이 얼면 그곳은 아이들의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얼음판 위에서 팽이도 돌리고, 앉은뱅이 썰매도 지치고, 조금 커서는 외발 썰매로 멋을 부리곤 하던 벗들이 떠오릅니다. 얇은 얼음이 꺼져 빠지기도 했는데, 젖은 양말을 말린답시고 논두렁에 불을 놓았다가 나이론 양말을 호로록 태우기도 다반사였습니다. 솔가지를 꺾어들고 산이나 마을로 향하는 불길을 두드려 끄기도 했습니다. 동네 형들은 속을 파낸 메주콩 속에 청산가리를 채워넣은 후 그것을 눈밭 위에 던져두기도 했습니다. 꿩을 잡기 위해서였지요. 오랜 기다림 끝에 꿩이 그 콩을 먹은 게 확인되면 꿩이 날아갔음직한 방향을 향해 죽어라고 뛰어가던 광경이 지금도 선합니다. 참 대책없는 사냥법이었습니다. 긴긴 겨울, 아버지가 건넌방에서 왕골자리나 봄에 쓸 가마니를 짜시면 심심한 아이들은 지푸라기를 골라 드리며 일손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가끔 날을 잡아 꽁꽁 얼어붙은 마을 둠벙의 얼음을 깨고 물을 퍼낸 후 뻘흙 속에서 쉬고 있던 물방개며 미꾸라지 붕어 등속을 잡아 동네 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저녁이면 식구들이 뜨근뜨근한 아랫목에 둘러 앉아 이불 속에 발을 뻗고는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라도 늘 새롭게 듣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화롯불에 밤을 구어주시기도 하셨고, 삼각형 인두로 화롯불을 정돈하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풍경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요? 입성도 나아졌고 먹을 것도 지천이지만 마음은 흥뚱항뚱 떠 있습니다. 흔연한 생각은 들지 않고 늘 초조합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차가운 눈밭 위를 뒹굴지 않고, 시골 어른들도 둠벙을 뒤지지 않습니다. 저마다 바쁜 탓에 서로의 기색을 살필 여유조차 없습니다. 우리 삶은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반복되는 일상은 권태로 이어집니다. 그 권태로움을 잊기 위해 자극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겠다던 젊은 시절의 호기로움은 어디가고 하루하루 그저 '별일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남루한 영혼만 남았습니다. 객쩍은 소리를 한다고 꾸중하실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이런 소리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 때문일 겁니다. 우리의 경험세계가 마을을 넘기 어렵던 시절의 삶과 지구 전체가 한 마을처럼 인식되고 있는 오늘의 삶이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 경험세계의 확장이 인식과 공감의 확장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의구심을 빚는 현실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독일 극우파들의 '이슬람 배척' 시위에 반대하는 맞불시위가 여러 도시에서 펼쳐졌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주의를 내세우는 극우 포퓰리즘 단체인 '페기다'(유럽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이란 뜻)에 맞서 '톨레랑스'(관용)를 외치는 시위였다고 합니다. '애국적 유럽인들'이라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리네요. 애국을 명분으로 타자에 대한 배척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국가는 그런 이들을 부추겨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이들과 싸우도록 만들기도 하지요. 누군가가 애국이라는 말을 선취하는 순간 그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은 '비국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좌파' 혹은 '빨갱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장식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타인에게 제멋대로 색깔을 칠하고 그 색을 빌미로 그들을 배척하는 것처럼 비겁한 일이 또 있을까요? 


유럽의 극우집단들이 외국인, 집시, 무슬림 포비아를 만들어내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장기 불황으로 경제가 어렵고 직업의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습니다. 희생양은 언제나 그러하듯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선택됩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신년사에서 국민들에게 "마음속에 편견과 냉담, 증오를 지닌 자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참여하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지요?(한겨레신문, 2015년 1월 7일자 참고)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번지고 있는 혐한류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점차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는데 '타자'와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퇴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척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태도가 일반화될 때 세상은 전쟁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1월 7일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테러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참 무거워졌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몇 차례 실었던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아 열 두 명 이상이 희생됐다 합니다. 파리의 도심에서 벌어진 이 사태는 매우 충격적입니다. 까뮈는 일찍이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통해 정의를 세우기 위해 무고한 이들까지도 희생시키는 테러의 정당성에 대해 물은 바가 있습니다. 테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반드시 단죄되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 인류가 투쟁을 통해 확보해온 언론 자유가 어떤 형태로든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 사회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때문에 토대가 흔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일을 계기로 해서 사람들이 무슬림들을 극단적인 테러리스트와 동일시하는 정서가 확산되고, 그 때문에 증오를 선동하는 극우주의자들이 반사이익을 얻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톨레랑스가 철회되고 타자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될 때 좋아할 이들은 누구일까요?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일부 과격한 폭력분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적 종교는 폭력과 멀지 않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자기와 다른 이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십자군의 허무주의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십자군은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한테 손을 내밀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한테서 배우려는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의 공포와 원한을 다스릴 줄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이고 망가뜨리고 태우고 모독하고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들의 도덕성을 무너뜨렸다. 아우슈비츠는 그런 의도된 증오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지만, 서양인이 계속해서 이슬람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볼 경우 오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마음의 진보>, 교양인, 이희재 옮김, 435-6쪽)


샤를리 에브도는 시사풍자만화를 내는 출판사라 합니다. '풍자諷刺'라는 말 속에 이미 '찌르다, 나무라다'라는 뜻이 담겨 있기는 합니다만, 풍자는 웃음을 무기로 하여 어떤 사람이나 계층이 담보하고 있는 권위에 저항함과 동시에 그들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수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일 겁니다. 풍자를 풍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극단주의자들의 경직성은 분명 문제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풍자를 누군가에 대한 조롱의 수단으로 삼는 것 또한 문제가 아닌가요? 조롱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롱을 통해 관계가 좋아지는 예는 별로 없습니다. 남에 대한 멸시와 조롱이 일상이 될 때 평화 세상은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마5:22)이라던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풍자와 해학의 순기능을 모르지 않지만, 그 역기능 또한 심각합니다. 풍자가 조롱으로 귀착할 때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진보적인 사람이든 보수적인 사람이든 서로에 대한 비판은 상관없지만 조롱은 삼가야 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불가역적이니 옛날을 그리워해보았자 소용이 없겠지요? 그렇다고 하여 추억조차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추억이 때로는 오래된 미래를 여는 문이 될 수 도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말로 마음을 어지럽혀 드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소한에서 대한으로 넘어가는 이즈음을 두고 농가월령가는 "설중雪中의 산봉우리들은 해 저문 빛"을 띈다고 노래합니다. 쓸쓸하고 적막하기도 하지만 어떤 따뜻함도 배어 있는 듯합니다. 해 저문 빛이라도 있으니 고맙지요. 제게 그런 빛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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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청자(15 01-15 08:01)
목사님의 아름다운 글 그리고 설교,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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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경자(15 01-18 08:01)
하나님의 보물-청파교회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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