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 2015년 01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빛의 어루만짐


새해가 되더니 기온이 제법 차갑습니다. 찬 바람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기침을 달고 사는지라 목도리로 목을 잔뜩 감싸지 않으면 그 바람을 반기지도 못하는 신세입니다. 눈길에 다리를 삐끗하여 원단 산행도 거른 채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잘 걷고 계신지요? 눈빛 맑으신 분이니 세상에 가득 찬 신비에 오늘도 놀라고 계시겠지요? 저는 아내가 오디오에 걸어놓은 '냉정과 열정 사이' 음반을 들으며 피렌체나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서서 광장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우피치 회랑에 서 있던 동상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생각이 나네요. 정신적 거인들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자아의 한계를 끊임없이 돌파하면서 인간의 정신을 한없이 확장하고 심화하려고 고투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시킴으로써 인간 정신을 왜소하게 만든 시대로 기록될 것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교우들과 함께 불렀던 <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감싸여>(디트리히 본회퍼 작시, 지그프리트 피츠 작곡)의 멜로디가 자꾸만 되뇌어집니다. 지난 해에는 많이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애써 자기 마음을 다독이며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마음이 느꺼워서 울컥 했습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그 어떤 일에도 희망 가득/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그대'라 호명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춥고 쓸쓸한 인생의 계절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겠지요? 


젊은 날에는 의지만 있으면 외로움 쯤은 우격다짐으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지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원적 쓸쓸함이 있음을 실감하며 지냅니다. 신학자들은 인간이 무로부터 창조되었기에 '무에의 끌림'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가끔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허구렁에 깊이 빠져들기도 합니다. 스스로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호명해 줄 때 그 허구렁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쳐 물러나더군요. 인간은 '서로 함께 존재'가 맞습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로마서를 읽을 때 신학적인 문제에 집중해서 보았다면 이제는 16장에 나오는 바울의 인사말에 더욱 마음이 갑니다. 바울은 각지에서 만난 인연들을 떠올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기억이라는 우주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별자리들인 셈입니다. 그 별들이 없었다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바울이라 해도 길을 잃거나 낙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있음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소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도 있지만, 대개는 누군가와 인연이 맺어졌던 장소일 때가 많습니다.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인연도 그렇지만 스치듯 만난 인연도 우리 내면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오래 전 영국의 브리스톨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고적하고 쓸쓸한 바다 풍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enjoy your view!'라고 외치고 가더군요. 그 순간 그 풍경은 그의 말과 더불어 제 기억 속에 확고히 새겨졌습니다. 그곳의 거리와 집들까지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지금이란 지나간 것의 가장 내밀한 이미지"라고 말한 것이 발터 벤야민이지요? 우리의 경험 세계는 순간적인 것, 우연적인 것, 소멸하는 것들을 통해 구성됩니다. 그 순간을 소홀히 할 때 인간의 시간은 미끄러져 사라지고 맙니다. 시인 혹은 작가들은 보통 사람들의 의식에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순간들을 또렷이 자각하고 그것을 언어로 혹은 형상으로 구현해내는 사람들이겠지요? 좋은 작품은 우리 삶이 초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해줍니다. 일상의 분주한 흐름 속에서 잃어버렸던 경이의 감정 앞에 우리를 세우는 것이지요. 고통과 슬픔, 권태와 허무를 동반하는 일상 속에서 간혹 만나는 성스러운 순간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빛나게 해줍니다. 


몇 해 전 비가 오는 날 저는 짤츠부르크의 카푸친 수도회 장원을 홀로 걸은 적이 있습니다. 아래로는 짤자흐 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 언덕 위에는 구름 속에 드러난 성이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장원의 숲길을 걷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여행자로서의 외로움이 아니라 생의 근원적 쓸쓸함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장원을 한 바퀴 돌아 수도원 교회에 이르렀을 때 다리 쉼도 할겸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작고 소박한 예배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그곳에서 아름답고 영롱한 음악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오르겔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주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온 마음을 담아 연주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바흐의 푸가였습니다. 연주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소리조차 죽인 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차분하게 번겨가는 오르겔 소리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위안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중세기의 가장 뛰어난 여성 신학자 중 하나였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내 빛이 너를 만지니, 그 빛은 너의 깊숙한 존재에 가 닿는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그것이 빛의 어루만짐이었음을.


우리도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빛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의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만 우리 속의 빛이 어둡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객적은 말로 시간을 허비하게 한 것이 아닌지 저어되긴 합니다만 그래도 너그럽게 받아주시는 그 넉넉한 우정을 믿기에 이런 서신을 올립니다. 인간 세상에 사는 동안 어려움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누구보다 살갑게 대해주시고, 함께 비를 맞는 마음으로 곁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가(假)나라 사람 임회는 적에게 쫓길 때 자기 관직의 상징인 옥(玉)을 버리고 등에 어린 아이를 데려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처사를 궁금해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옥과 관직에 대한 나의 매듭은 이익의 매듭이었고, 아이와의 매듭은 도의 매듭이었다! 이익으로 맺어졌을 때는 재난이 오면 우정은 녹아 사라진다. 도로 맺어졌을 때는 재난에 의해서 우정이 완전해진다. 어진 사람의 우정은 물과 같이 담백하다. 소인의 우정은 단술처럼 달콤하다. 그러나 어진 사람의 담백함은 진정한 사랑을 가져오고 소인들의 달콤한 사귐은 미움으로 끝난다."(제20편, 山木, 5절, 토마스 머튼, <장자의 길> 중에서)


우리의 우정은 도의 매듭인 거 맞지요? 그렇게 되도록 저도 애쓰겠습니다. 하루 하루 걷는 길이 그분의 중심을 향한 순례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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