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마태복음산책1 2015년 01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본문 / 마1:1-17


복음서의 첫 권인 마태복음의 기록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가이사랴라 말하는 이도 있고 수리아 안디옥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알렉산드리아일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장소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모든 문서는 쓰여진 삶의 자리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마태복음의 기록 장소를 특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이 기록된 상황은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교는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성전과 제사장 중심의 종교가 회당과 랍비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nan ben Zakkai)를 중심으로 하여 팔레스타인의 북부 해안 도시인 얌니아에서 열린 유대교 종교회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회의를 통해 유대인들은 히브리 성서, 곧 구약 성서의 정경을 확정함으로 그들의 정체성의 근거를 마련하는 동시에,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확장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려 했다.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얌니아 회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물이라고 말한다. 적대적인 유대교에 맞서 자신을 지켜야 했던 신생 종교의 안간힘이 이 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 때문에 마태복음서에는 유대교와의 대립과 대조를 암시하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이 대목은 마태복음서를 읽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 마태복음의 첫 구절인 이 대목은 저자가 말을 시작하기 위해 선택한 무의미한 허두가 아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마태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계보'(genealogy)이다. '계보'는 물론 '족보'라고도 옮길 수 있는 말이다. 마태는 과연 예수라는 존재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정초시키기 위해 자기 문서의 첫 머리에 족보를 기록한 것일까? '계보'는 헬라어 단어 '제네시스'(genesis)를 옮긴 것이다. 제네시스라는 단어가 '기원' 혹은 '내력'을 뜻하니까 '계보'라는 번역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단어 속에 담긴 속뜻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제네시스는 통상 '창세기'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1장 1절을 이렇게 옮겨볼 수도 있겠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창세기라." 이렇게 읽고 보면 뭔가 느낌이 온다. 지금부터 마태가 서술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의 족보가 아니라 그를 통해 발생한 새로운 창조라는 것이 아닐까? 1장 1절은 예수와 더불어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함축적 선포가 내포되어 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유대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다윗'과 연결시킴으로써 예수의 메시야적 지위가 뜬금 없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가/이 ~을/를 낳고'로 이어지는 족보는 두 차례에 걸쳐 잠시 숨고르기를 하듯 '~을 낳으니라'(6, 11)로 마무리된다. 족보 서술이 마침내 예수에 이르렀을 때 마태는 지금까지의 표현을 버리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로 변주한다. 그분의 탄생이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족보 속에 담긴 속뜻

족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두 가지이다. 첫째, 족보는 3×14의 구조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17). 성경이 다양한 숫자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다시 말해 여기 언급되고 있는 족보가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 기자들은 서술 의도에 따라 가끔 어떤 이야기를 확장하기도 하고 압축하기도 한다. 실제로 14대라고 했지만 바벨론 이후의 계보를 보면 13대로 끝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그것을 14대라 말한다. 오류인지 의도적인 서술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14일까?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그것이 '다윗'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정석일 것이다. 히브리어 각 자음에는 각각의 수값이 있다. 다윗이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세 자음의 수값을 합하면 14가 된다. 마태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계보를 통해서 증언하고 싶어한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족보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이다. 여성들의 이름이 족보에 오르는 것은 유대교 사회적 세계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여성들의 이름을 당당하게 기록하고 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밧세바의 이름은 이렇게 숨겨져 있다)가 그들이다. 이 여인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그들이 이방인이거나 이방인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들의 결혼생활이 비정상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추문거리일 수도 있는 이 여인들의 이름을 족보 속에 포함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유대교의 순혈주의 혹은 배타적 거룩성을 뒤집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구원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임을 족보 속의 여인들은 넌지시 증언하고 있다.






















탄생 이야기

본문 / 마태1:18-25


의로운 사람 요셉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의 중심 인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마리아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게 될 것임을 고지했을 때 마리아는 두려워했지만 결국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하고 응답했다. 이로 인해 마리아는 믿음의 표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의 이야기와 달리 아버지 요셉에 초점을 맞춘다. 마태복음에서 요셉은 약혼녀인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은 현몽한 천사를 통해 나중에서야 들었다. 

'알아차림'과 '새로운 인식' 사이의 시차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마태는 짐짓 모른 체 하고 있다. 홀로 고심했을 요셉의 마음을 상상해 보라. 배신감과 당혹감, 그리고 암담함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요셉의 사람됨을 암시하는 단어 하나를 사용하고 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19) '의롭다'는 말은 성경에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기본적으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지만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그 뉘앙스는 많이 달라진다. 싸늘한 정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요셉은 마리아의 의심되는 부정행위를 폭로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되 상대방에게 피해가 덜 가도록 조치를 취하려 했다. 그는 마리아의 배신을 응징함으로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그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신적인 개입에 의해 무산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 성령 잉태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자기의 경험 세계에 도저히 통합할 수 없는 그 사건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구절이 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으로 지칭되고 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족보와 그의 탄생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연결어이다. 요셉은 예수의 탄생이라는 사건 속에서는 소외되고 있지만 예수를 다윗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요셉은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구약의 요셉이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창조라 할 수 있는 출애굽기와 창세기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신약의 요셉은 예수를 통해 창조되는 새로운 세계와 옛 세계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둘 다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구약의 요셉이 꿈을 꾸는 자인 동시에 꿈의 해석자라면 신약의 요셉은 꿈을 꾸는 자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주의 사자는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기가 아들이라면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한다. 이름은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특히 성경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성격인 동시에 운명이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곧 그의 운명이 새로워졌음을 뜻한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한 후에 남의 발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 이름은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여호수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이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이미 구원사 속에서 그가 할 역할이 암시되고 있다. 마태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1)라고 보도한 것은 일종의 이름 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장구한 구원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밝히기 위해 마태는 이사야서를 인용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23). 사실 이 인용문은 애매하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처녀' 잉태에 관심을 집중한다.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여부를 가지고 설왕설래할 때 본래 이 구절이 가진 강력한 의미는 스러지고 만다. 사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처녀 탄생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1-17절을 통해 예수의 인간적 혈통을 다윗과 아브라함에게까지 소급한 마태는 예수가 신적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 잉태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구절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이라는 단어에 있다. 마태는 넌지시 예수가 임마누엘의 구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존재 자체로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분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사자가 분부한 대로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고, 마리아가 아기를 낳자 그 이름을 예수라 했다. 21절에 나오는 "예수라 하라"는 명령과 25절의 "예수라 하니라"라는 실행이 틈 없이 일치하고 있다. 요셉은 회의와 확신 사이에서 바장이는 모든 이들에게 신앙의 모범으로 우뚝 서 있다. 

























탄생, 경배, 피신의 삼중주

본문 / 마태2:1-12


헤롯 왕 때, 베들레헴에서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1a). 마태는 예수의 탄생 시기를 헤롯 대왕 때라고 명토박아 말한다. 그가 죽은 것이 주전 4년 경이니 예수의 탄생은 그 이전이라 할 수 있겠다. 누가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던 때, 곧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을 때(눅2:1-2)에 태어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 시기는 대략 주후 6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두 복음서가 전하는 탄생 시기가 대략 10년 차이가 나는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복음사가들은 정확한 역사 기록을 의도하지 않는다. 예수가 누구이고,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에 집중할 뿐이다. 마태가 말하는 '헤롯 왕 때', 그리고 누가가 말하는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을 때'는 예수 탄생과 그 사역의 의미를 밝히기 위한 광의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헤롯 대왕은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누군가 자기 권력을 넘본다는 의심이 들면 가차없이 제거했다. 그것이 자식이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건축광이기도 했다. 도시와 궁전과 수도교를 짓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느라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들였다. 민중들의 삶이 결딴날 수밖에 없었다. 마태는 그런 엄혹한 시기에 메시야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셨다고 보도한다. 마태는 예수가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요셉과 마리아가 본래 그곳에서 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누가는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말한다. 이 대목 역시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베들레헴'이다. 

예수는 왜 꼭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을까? 그것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히브리 성서의 예언 때문이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 쯤 떨어진 유대 구릉지대에 있는 마을로, 그 길가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예레미야는 라헬을 재난을 겪는 후손들로 인해 무덤에서 통곡하는 어머니로 형상화하고 있다(렘31:15).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라헬의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이루어진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방박사

예수의 탄생은 헤롯으로 대변되는 강권 통치에 대한 상징적 심판인 셈이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멀지 않은 곳이지만 이 두 지역은 태어나신 예수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있다. 그 대립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이들이 바로 동방박사들이다.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이방세계의 지혜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교회 전설은 이 신비한 인물들에게 이름(카스파, 멜키오르, 발타사르)과 용모(수염과 피부색)까지 부여했다. 마태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들을 등장시킨 것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임을 암시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그들의 존재는 헤롯을 비롯한 기득권자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헤롯대왕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모아 그리스도가 나실 곳을 문의한 끝에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답을 듣는다. 그는 동방박사를 '가만히' 불러 아기에 대해 '자세히' 묻는다. 일종의 보도 통제인 동시에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다. 모략가답게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돌아와 자기를 그에게 안내해달라고 부탁한다. 자기도 그분에게 경배하고 싶다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은 이처럼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어떤 행동이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편적이어야 하고, 인간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는 행동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불의한 권력은 그런 의미에서 부도덕하다.

문득 별이 나타나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 별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렀다. 성탄절의 별 이야기는 사람들을 유년시절의 상상 세계로 인도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민수기 24장을 배경으로 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모압 왕 발락은 자기 땅 지경으로 들어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달라면서 명망있는 이교도 예언자 발람을 청한다. 하지만 발락의 의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발람이 자기 의지와 무관한 어떤 힘에 이끌려 이스라엘을 축복했기 때문이다. 성탄절의 별 이야기는 발람의 예언 가운데 나오는 별 이야기와 연결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24:17). 성탄절의 별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상징한다. 

동방박사들은 아기가 머물고 있던 집(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는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되어 있다)에 들어가서 아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친다. 이 세 가지 예물의 의미를 각각 예수의 삶과 죽음에 연결시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실제로 세 가지 예물은 그저 왕적 존재에게 바치는 예물이라는 의미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아주 간결하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끝난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12). 요셉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당신의 뜻을 알리신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그 뜻에 순종한다. 헤롯에 부역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간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순종하지도 않는 헤롯 일파의 모습과 대조되고 있다.





















어둠이 지극할 때

본문 / 마태2:13-23


피신

마태는 예수의 탄생 전후 이야기를 모세 이야기에 빗대어 기록하고 있다. 두 이야기는 유형적으로 일치하는 바가 많다. 헤롯의 영아 학살과 바로의 영아 학살, 애굽 피신과 광야 도피, 유다 땅으로의 귀환과 애굽 귀환이 서로 조응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새로운 세계는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옛 세계에 속한 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영아 학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속뜻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나라의 아기장수설화가 그 좋은 예이다. 지배자들의 폭력과 착취가 극에 달해 민중의 삶이 피폐해질 때면 사람들은 역사를 변전시킬 영웅이 탄생하기를 기다린다. 하늘은 그들의 응집된 바람을 외면하지 않고 한 아기를 보내신다. 아기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고, 여러 가지 놀라운 능력을 보인다. 하지만 그 아기는 두려움을 느낀 부모나 권력자들에 의해 날개가 잘리거나,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가 죽임을 당한다. 아기를 태우기 위해 이 땅에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용마의 울음소리만 메아리처럼 남는다. 아기장수설화는 버려진 영웅담이다. 좌절된 민중의 꿈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모세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이와는 확연히 다르게 전개된다.

동방박사가 다녀간 후 요셉은 또 다시 꿈을 꾼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형성물'이라 했지만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통로일 때가 많다. 주의 사자는 헤롯의 계획을 알리면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있으라고 말한다. 요셉은 즉시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애굽일까? 애굽은 이스라엘의 성조들이 기근을 만날 때마다 찾아가던 땅이다. 형제들의 미움을 받은 요셉이 팔려간 땅이기도 하고, 야곱이 일가족을 데리고 이주한 땅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태는 왜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애굽 이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 마태는 어쩌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성조들의 고난의 역사를 온 몸으로 짊어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수 일가족은 헤롯이 죽기까지 그 땅에 머물러야 했는데, 마태는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호세아서의 말씀(11:1)을 인용한다.


학살

그리고 이어진 것은 베들레헴의 유아 학살 이야기이다. 이런 일이 정말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태는 모세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까지는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일까? 수많은 화가들이 이 비극적인 장면을 그렸다. 광기에 찬 군인들, 공포에 질린 아기들과 엄마들, 그런 폭력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남자들…. 화가들은 어쩌면 성서 속의 한 장면을 통해 자기 시대의 참담함을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폭력의 광기는 어느 시대이든 나타나게 마련이니 말이다.

마태는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사내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 굳이 그 숫자를 헤아려 본다면 당시의 인구 구성상 십 수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숫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의 희생자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많다. 그 중에서도 여성들과 아이들의 희생이 크다. 전쟁 기획자들은 그런 무고한 죽음을 '부수적 손실'이라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마태는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하여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라헬의 울음소리와 베들레헴 여인들의 울음을 연결시킨다. 이것 역시 예언의 성취인가? 그렇다면 이 무고한 죽음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예언을 인용하며 사용한 서술어에 주목해야 한다. 15절은 "~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일이 하나님의 의지였음을 드러낸 반면, 18절은 "~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귀환

꿈 이야기는 두 번 더 등장한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는 애굽에 있던 요셉의 꿈에 다시 나타나서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20) 하고 지시한다. 요셉은 이번에도 즉시 그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간다. 성가족의 귀향은 마치 출애굽의 축소판과도 같다. 피신이 귀환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안이한 도피가 되고 만다. 하지만 위험은 여전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주의 사자는 헤롯대왕의 아들인 아켈라오를 무서워하는 요셉에게 갈릴리 지방으로 올라갈 것을 지시한다. 요셉은 나사렛 마을에 정착한다. 누가는 그곳이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라고 말하지만 마태에게 그곳은 요셉 일가가 이주한 낯선 땅일 뿐이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 불렀다. 사람들이 굳이 예수라는 이름에 마을 이름을 덧붙여 불렀던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에 구별할 목적으로 그랬을까? 그와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사렛(Nazareth)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의 나실인(nazirite)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 때문일 것이다. 나사렛은 예수의 고향 '땅'을 일컫는 이름이지만 동시에 예수의 '본질'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다. 



















세례를 받으시다

본문 / 마태3:1-17


망치의 언어

마태는 왜 예수의 공생애를 다루기 전에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켰을까? 요한은 일종의 사이- 존재이다. 구약과 신약 사이, 광야와 도시 사이. 사이-존재는 두 세계 사이의 접점이다. 세례자 요한은 옛 세계의 종언과 아울러 새 세계의 열림을 알리는 전령이다. 그가 사람들 앞에 자기를 드러낸 곳은 유대 광야였다. 그곳은 바라볼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오직 자기 자신과 하나님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 아니던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를 거처로 삼은 사람, 그는 세상의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인이었다.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음식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불수레를 타고 사라진 엘리야를 떠올렸을 것이다. 마태는 세례자 요한을 이사야가 말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와 동일시한다. 

세상을 향한 그의 외침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안이함과 타성을 깨뜨리는 망치였다. 혼이 담긴 말은 화려한 말이나 공교한 논리보다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요한의 독창적 고안물이 아니었다.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이방인들은 개종의 표로 세례를 받았고, 쿰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세례의식을 반복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옛 삶과의 철저한 단절, 곧 회개를 뜻하는 상징적 의례였다. 세례의 의미가 죄사함으로 확장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였다.

신심에서든 호기심 때문이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자 요한을 찾아왔다. 하지만 요한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하여 두남두지 않는다. 그들에게 던져진 말은 매우 신랄하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 지도자라는 자부심, 경건하다는 자부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거친 욕은 지금도 우리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그 거친 언사에 모욕감을 느낀 사람은 적대감을 품고 돌아섰을 것이고, 그 언사에 가슴이 찔린 사람들은 몸을 낮추어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요한은 그들이 기대고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헛된 자부심에 철퇴를 가한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열매일 뿐,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신앙고백과 자부심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말로 심판의 임박을 예고한다. 심판날에 중요한 것은 나무의 종류가 아니라 열매를 맺느냐 여부이다. 요한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정확히 안다는 데 있다. 그는 망치의 언어로 낡은 것들을 부수고, 무뎌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울 수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빚어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기에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정화하실 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을 기다린다. 요한은 그 분에 견주면 자기가 얼마나 작은 지를 알기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11).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

마침내 그 분이 세례자 요한 앞에 몸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다. 이 대목은 좀 미묘하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유대교와도 경쟁해야 했지만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이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가 자기 스승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자기들이 영적인 우위에 있음을 강변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세례을 받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예수가 더 크신 분임을 변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수세 장면(막1:9-11)에는 나오지 않는 대화가 첨가된 것이다. 요한이 말한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가 대답한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 이로써 세례 요한이 우위에 있다는 주장은 불식되었다. 그런데 15절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최초의 발언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뜻한다고 본다면, 마태는 이 로써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경쟁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협력하는 관계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벌어진 일을 감각적인 언어로 전하고 있다. 먼저 예수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본다. 이것을 두고 예수께서 이때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과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세례 때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늘이 자동문처럼 열린 것이 아니다. 하늘을 여심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은 예수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의 불통을 중지시키실 분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늘에서 소리도 들려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3인칭으로 증언되고 있다. 이 소리를 듣는 청중이 있었는지에 대해 마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마가복음(1:11)과 누가복음(3:22)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2인칭을 사용하여 그 소리의 청자를 예수로 특정하고 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마태는 예수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구절은 예수의 신적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주어진 소명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험을 받으시다

본문 / 마태4:1-11


광야에서 보낸 시간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선언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마태는 예수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다고 보도한다. 이 둘 사이의 기묘한 어긋남 때문에 우리는 당황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정은 단순한 사실 관계의 확인만이 아니라 소명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대목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겪어내야 할 모든 어려움을 대행해주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 고통과 시련이 없을 수는 없다. 사실 시련과 고통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일 수도 있다.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적 성숙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이끌었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만나던 곳이고, 세례자 요한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나던 곳이다. 광야는 시선의 준거점이 없기에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곳, 온갖 허장성세로 치장했던 자아를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설 수밖에 없는 곳, 그렇기에 하나님의 현존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예수는 그곳에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다. 작정하고 금식을 했다기보다는 몰두하다 보니 먹기를 잊은 것이리라. 사십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어떤 전환이 일어나는 시간을 뜻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사십 일을 머물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 년을 광야에 머물렀다. 광야에서 보낸 예수의 사십 일은 그런 이스라엘의 시련을 몸으로 재현하는 과정이었다. 광야에서의 금식은 크게 한번 죽은 후에야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大死一番事後蘇生)는 옛말을 떠올리게 한다.


유혹의 달콤함

유혹은 우리가 가장 취약해졌을 때 찾아온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다. 달콤하지 않으면 유혹일 수 없다. 마태는 '마귀'를 '시험하는 자'라 일컫는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예수는 시험이라는 입문의식을 거쳐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시험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마귀는 예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한다. 사탄의 말은 공교하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조건절과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주절의 명령이 뗄 수 없이 결합된 것인양 가장한다. 굶주림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메시야됨을 입증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마귀의 말속에 숨겨진 문법 구조를 해체한다."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떡으로 치환된 물질의 문제가 부차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떡의 문제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 사람은 '떡'은 물론이고 '의미'를 먹어야 산다. 삶의 의미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줄 때에 생의 비애는 줄어든다. 이윤 창출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있는 자본은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고 지금도 속삭이고 있다.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면서 성경을 인용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사실 것이라는 것이다. 역시 조건절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다. 마귀는 인간이 숭배할 대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 힘이 없는 이들은 힘있는 이들에게 자기 마음을 의탁함으로 안도감을 느기고 싶어한다. 마귀는 지금 예수에게 사람들을 자기 삶의 주체로 세우기보다는 객체로 혹은 기적의 관객으로 전락시키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타락한 종교와 대중 정치가 선택하는 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이반이 창조한 인물인 대심문관은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가 사람들을 너무 과대 평가했다고 말한다. 인간이 구하는 것은 불확정적인 자유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허약하고 비열한 인간은 하나님보다는 기적을 구한다. 예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마귀의 유혹을 뿌리친다.

마귀는 이제 예수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인도하여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말한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권력에의 유혹이다. 권력이란 나의 생각을 남에게 강제할 수 있는 힘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기를 강화하고 남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인간의 기본적 충동이라고 보았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교의 급진 그룹인 열심당원들은 세상 지배권을 확보함으로 이방 민족을 몰아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시험 이야기는 남을 강제하는 힘으로서의 권력이 마귀의 질서에 속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귀와 제휴한 권력은 반드시 백성을 억압하지 않던가.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한 사람일수록 권력에의 충동에 빠지기 쉽다. 예수는 권력을 통해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힘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을 통해 서서히 일어난다. 예수는 단호히 말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세 번의 유혹을 물리칠 때마다 마태는 '기록되었으되'(4, 6, 10)라는 단어를 앞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한다. 그것은 마태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반율법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던 이들에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마태는 이런 입장을 복음서 전반에 걸쳐 견지하고 있다.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 / 마태4:12-25


가버나움

파시즘에 대항했던 이탈리아 영화 감독 피에르 파졸리니가 만든 <마태복음>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온다. 거친 언사로 기존 체제를 비판하던 세례자 요한은 실갱이 끝에 관원들에게 끌려간다. 그 과정에서 그의 망토가 땅에 떨어진다.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예수가 가만히 다가와 다가와 그 망토를 손에 들고 표표히 사라진다. 함께 영화를 보던 청년 하나가 말했다. "치사하게." 그는 파졸리니 감독이 만든 영화적 장치를 읽지 못했던 것이다. 감독은 아마도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주워 가지고 요단강을 갈랐다는 이야기(왕하2:14)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장면을 구성했을 것이다. 예수가 주워 든 세례자 요한의 겉옷은 사명의 연속성을 가리키는 기표이다.

요한이 잡혔다는 소문을 들으신 예수는 갈릴리로 물러나셨다가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 그곳은 갈릴리 호수 북부 연안에 있는 고대 도시인데 무역로인 '해변 길'을 끼고 있어 매우 번창했던 국경도시였다.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는 대략 48km 쯤 된다. 마태는 예수의 이러한 떠돎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자기 땅에서도 낯선 자로 살아야 했던 예수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이런 거주지 이전이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15-16).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라는 말은 제국의 폭압으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들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표현이다. 게다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에는 앗시리아의 정복 전쟁 이후 많은 이방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그곳은 선민 의식에 젖어 있는 이들이 보기에는 죄악의 땅, 불결한 땅이었다는 말이다. 그 땅에 사는 이들보다 구원과 빛을 더 갈망하는 이들이 또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가버나움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한 예수의 제2의 고향으로 손색이 없다. 

예수는 그곳에서 최초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선포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와 동일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라는 항간의 소문을 의식했더라면 마태는 이 선언을 다소 변형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유혹을 뿌리친다. 중요한 것은 남과 구별되는 독특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기 때문이다. 


제자를 부르심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던 예수는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신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9).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다. 부름과 따름 사이에 호리의 틈도 없다. 즉각적 순종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사전에 충분한 논의가 있던 것이 아닐까?' 마음에 떠오르는 의혹이 가시질 않는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을 베드로의 장모 치유 기사(4:38-39)와 고기잡이 이적(5:1-11) 이후에 배치함으로 따름의 개연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마태는 일체의 사전 정지 작업을 보도하지 않는다. 따름의 엄중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리라. 믿음은 계산이 아니라 모험이다. 아브라함이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다면 첫 제자들은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했다.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는 랍비 전통에도 낯선 이야기이다. 랍비가 제자들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갔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을 부른다.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다. 두 번의 부름 이야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버려 두고'이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는 따름이 불가능하다. 전우익 선생은 참 삶이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라 말했다. 손에 잡은 것을 놓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붙잡을 수 없다. '말'을 버리고 '본'을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약한 것을 고치시다

이제 때가 이르렀다. 예수는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자'들을 찾아가신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23-24). 이것은 예수의 사역 전체에 대한 요약문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태는 5장부터 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염두에 두고 '가르침'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많다. 주님의 가르침 사역은 병 고침보다 앞선다. 천국 복음의 선포는 역사의 어둠을 뚫고 돌입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심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나타나는 생명의 회복을 말한다. 예수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간다. 아름다운 향기가 사람을 끌어 모으듯 예수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생의 온갖 짐을 지고 비틀거리던 이들이 그분을 찾아왔고 예수는 그들을 다 고치셨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지도 않았고, 그들이 도덕적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다만 품이 되어 그들을 부둥켜 안았을 뿐이다.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다, 요단강 건너편에서부터 허다한 무리가 찾아왔다.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 중심과 변방의 구분은 해체되었다. 





















복이 있는 사람들

본문 / 마태5:1-20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편의상 산상설교 혹은 산상수훈이라 부르는 데 도입과 결구를 제외하고도 106개 절로 구성(5:3-7:27)되어 있다. 누가복음도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은 훨씬 간략하다. 불과 30개의 절(6:20-49)에 불과하다. 학자들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설교를 산상수훈과 대비하여 평지설교라고 부른다. 산상설교는 예수가 한 장소에서 같은 대상을 향해 행한 설교의 기록이 아니다.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예수가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복음서 기자들이 후대에 모아놓은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은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상설교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소중한 것이지만 인류의 정신사가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힌두교인이었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에 맞서 전개했던 비폭력 저항운동의 뿌리가 산상설교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뒤집힌 복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1). 평범한듯 보이지만 마태는 '무리'와 '제자'를 대조하고 있다. 무리는 아직 호기심에 이끌리는 이들이지만 제자는 호기심을 넘어 삶의 방향을 바꾸려 하는 이들이다. 산상설교는 제자됨의 대강령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가르침이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됨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팔복(사실은 구복)으로 요약되는 예수의 가르침은 '복'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뒤집고 있다. 유대인들은 물질적인 풍족함, 자손의 번창, 사회적 존경, 경건한 삶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징표로 여겼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소위 오복이라 일컬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만큼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 혹은 욕망에 잇대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복을 전한다. 예수가 전하는 새로운 복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제자의 길은 좁은 길인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복은 넷이다. 가난한 자의 복, 주린 자의 복, 우는 자의 복, 박해받는 자의 복이 그것이다. 물론 이 네 복에도 차이가 있다. 누가복음은 지금 절박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데 비해, 마태는 그것을 제자들의 품성의 문제로 슬쩍 바꿔놓고 있다. 예컨대 누가복음에서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6:20)라는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로 변형되고 있다. 학자들은 대개 누가복음의 교훈이 예수의 원래 가르침에 가까울 것이라고 본다. 예수가 언급한 것은 '지금 여기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기존 체제와 대립하는 듯한 그 가르침을 제자들이 지향해야 할 삶과 품성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다.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정신화시킨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세상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운명에 더욱 집중하고 있었던 마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태는 그 때문에 누가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 다섯 가지의 복을 추가한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려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긍정적 품성이다. 온유함, 자비함, 마음의 청결함, 화평케 함, 의를 위하여 박해 받음이 그것이다. 마태는 이런 품성을 가지고 사는 이들에게 내릴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복은 박해 받은 이의 복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1-12). 예수를 따르는 길은 기존 질서에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그런 삶의 결과는 박해일 수밖에 없다. 예수는 박해를 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는 이 말씀을 통해 복 받은 이들의 삶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 구절이 유대인들에게는 낯선 말이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선민'으로서의 자기들의 정체성과 대립하는 현실이었기에 경계해야 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그런 세상의 부패함을 막고 맛을 내주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둠 가운데 유폐된 세상 앞에 밝혀진 등불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국적, 인종, 피부색, 문화, 성별, 빈부, 귀천 등의 척도를 가지고 온통 가르고 나누지만, 하나님 안에서 세상은 둘이 아니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소속이 아니라 삶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예수의 이런 가르침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이 자칫하면 반유대교 혹은 반율법주의로 간주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 율법은 과도한 선민의식의 뿌리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삶을 옭죄는 올무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여 율법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완전하게 한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