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버팀목 십자가 2014년 12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버팀목 십자가

 

철로가 지나가던 자리에 공원이 만들어지고 있다. 몇 해 동안 흙을 쌓아 둔덕을 만들었다가 허물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지난 늦가을부터 땅을 파 배수로를 만들고, 석축을 쌓고, 공원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해 줄 시설물도 들어섰다. 차가운 바람이 불던 어느 날부터 커다란 나무들이 대형 트럭에 실려오기 시작했다. 줄기가 많이 잘리고 뿌리조차 간동하게 갈무리된 나무가 수평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머물던 땅에 뿌리 내린 채 운명처럼 살아가던 나무, 그 갑작스런 변화에 넋이라도 빠진 것일까? 하지만 나무는 말이 없다.

 

어느 날 보니 솜씨좋은 조경사들과 일꾼들의 노역으로 나무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낯설고 차가운 땅에 한 줌 고향 흙에 둘러쌓인 채 세워진 나무는 슬퍼보였다. 바람이 불어 흔들릴 때면 더욱 그랬다. 왜 하필이면 늦가을에 나무를 옮겨심는 것일까? 생장 주기 때문일 것이다. 비전문가의 생각으로도 생명의 기운이 안으로 한껏 움츠러든 때가 이식의 적기처럼 보이긴 한다. 한 그루 두 그루 세워진 나무가 쓸쓸해 보이더니 어느 날 퇴근길에 바라보니 나무와 나무 사이를 굵은 대나무로 엮어 버팀목을 만들어놓았다. 힘들더라도 어깨를 겯고 낯섦과 추운 바람에 맞서라는 격려인가? 그 버팀목이 마치 나무들이 서로에게 내민 손처럼 보였다.

 

그 애잔한 풍경 앞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빈센트 반 고흐가 29살에 그렸다는 수채화 <가지 잘린 버드나무>가 떠올랐다. 잔 가지 몇 개만 남긴 채 윗 부분이 싹둑 잘려나간 버드나무 한 그루가 연못가에 서 있다. 구새 먹어 속이 빈 나무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고 연못은 무심히 고요하다. 연못 옆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 사내가 등을 보인 채 걸어가고 있다. 저 멀리 철도 기지처럼 보이는 건물이 서 있다. 하늘은 온통 구름이 끼어 잿빛이다. 그런데 구름 사이로 손바닥만한 푸른 하늘이 드러난다. 이 그림은 그대로 고흐의 마음일 것이다. 기형도는 <病>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주어를 잃고 헤매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라니? 이 도저한 비애를 어찌해야 할까.

 

장황하게 나무 이야기를 한 까닭은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를 떠나 교회 밖을 떠돌고 있는 세칭 '가나안 신자들'('안 나가'를 뒤집은 말)의 아픔이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공들여 맺어왔던 관계 밖으로 퉁겨져 나온 사연은 제각각이겠지만, 그들 내면에 드리운 상처의 그림자는 쉽게 스러지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는 목회자들의 권위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인지도 모른다. 교회는 이런 이들의 존재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랜 동안 교회 밖을 떠돌다가 아예 예배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이들도 있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그래도 정착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가만히 안착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편이 되었든 그들은 늦가을에 이식된 나무처럼 쓸쓸하다. 로마 제국의 가혹한 지배를 받으며 어디에도 희망을 정초할 수 없던 상황에서 예수는 겨자풀같이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연대하여 이루는 새 세상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섬김, 나눔, 돌봄, 긍휼히 여김을 통해 이 땅에 지며리 스며든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름받았다.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다. 가나안 신자들은 교회의 본래성에 대한 물음표로 우리 앞에 있다.

 

오래 전 강원도의 한적한 마을에서 목회를 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는 주일이면 집에서 입고 있던 운동복 위에 슬쩍 두루마기를 걸치고 강대상 앞에 서곤 했다. 그가 섬기던 교회 예배당 전면에 있는 십자가는 보잘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연을 알고 나니 그 십자가가 참 귀했다.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그는 버팀목으로 쓰였던 나무가 자기 역할을 다한 후 거리에 방치된 것을 보았다. 버림받은 처지가 마치 자신의 모습 같기도 했고, 예수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그 나무를 가져다가 조촐하고 툽상스러운 십자가를 만들었다. 연약하고 어린 나무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나무, 그러나 쓸모 없다 하여 버림받았던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십자가가 걸려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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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혜(15 01-17 09:01)
믿음으로 -이 도저한 비애-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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