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권력 사유화의 유혹 2014년 12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권력 사유화의 유혹

 

"내일 아침에 또 신문이 온다/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울고 싶어졌다". 일본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 '신문'의 첫 구절이다. 성급하게 공감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대목에 이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좀 이상하다. '그'는 잉크 냄새를 풍기며 자기에게 배달될 신문을 생각하면 마치 "어디 먼 높은 산에서/커다란 독수리가 날아와/그 날개로 안아줄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한다. 울고 싶었던 마음이 설레임 때문이었다고? 참 이상하지 않은가. 자기 글이 실린 것일까? 아니면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시적 반전이 일어난다. '그'는 매일 "살인 사건을 옛날이야기처럼 읽고/주가 상승을 낯간지러워하고/쿠데타에 얼굴 붉어지면서" 세계의 잔인함을 마음껏 맛본다. 변기에 앉아서. 그의 세계는 신문으로 축소되어 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잠시 그의 의식에 머물다 마치 변기 속으로 사라지듯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리고 또 다른 날을 기다린다. 일상의 반복이다. 세상은 결코 새로워지지 않는다.

 

매일 아침 신문을 여는 기분이 상쾌하지만은 않다. 아니, 불쾌하기로 작정하고 본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정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문을 보면서 우리가 거듭 확인하는 것은 세상이 참 팍팍하다는 사실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질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갈등과 혼란과 폭력. 대중들의 시선을 끌만한 이야기를 골라싣는 신문의 속성을 감안한다 해도 신문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일 때가 많다. 신문은 우리를 냉소와 허탈감 그리고 분노의 세계로 인도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살림살이는 점점 힘들어지고, 힘있는 이들의 오만한 작태는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고 권력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사람들은 아연한 표정을 짓는다. '회전문 인사'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더니 이제는 '십상시'니 '비선'이니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마치 구중궁궐 속에서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흥미진진하지 않다. 불쾌할 뿐이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요즘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정윤회 씨의 딸 승마 특혜 의혹을 다루던 중 문체부 국장이 차관에게 보낸 쪽지가 또 다른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여야 싸움으로 몰고가야." 조직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진실을 은폐하는 것을 성실함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어리석은 일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민중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는 '하늘도 땅도 공公'이라고 말했다. 공은 모두에게 속해 있으나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공을 침범하면 전체의 질서가 깨진다. 나라도 권력도 인권도 종교도 더 나아가 하나님도 공에 속한다.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 오늘 이 나라를 뒤덮고 있는 어둠과 혼돈은 권력과 물신의 망령에 사로잡힌 이들, 공을 사유화하는 일에 발밭은 사람들이 빚어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청백리라는 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벌건 욕망을 부끄러움조차 없이 드러내는 이들이 많아졌다.

 

옛 사람은 공功을 세운 후에는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가르쳤다. '내가 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보상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사로잡히는 순간 정신은 물크러지고 가량없는 불평의 세계에 빠져든다. 맑음은 머묾 속에 깃들 수 없다. 자기에게 제공되는 특권에 익숙해지는 순간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맑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비릿한 욕망이 그를 확고하게 틀어쥔다. 권력은 속성상 독점욕이 강하다. 권력에 맛들인 이들은 이런저런 구실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한다. 그것은 세상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염증이 도를 넘었다. 권력 다툼 속에서 죽어가는 것은 뒤뿔치기나 하면서 살아가는 착하고 가련한 국민들이다. 이제는 더 이상 심호흡을 하면서 신문을 보고 싶지 않다. 착하게 사는 것이 더 쉬운 세상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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