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다시 한번 벼랑 끝에 서고 싶어라 2014년 10월 29일
작성자 김기석

 다시 한번 벼랑 끝에 서고 싶어라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회에 나섰을 때는 어떤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조차 없었다.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는 <파우스트>의 한 대목을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허무와 대결하는 데 골몰했을 따름이다. 매 순간 요구받은 것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버둥거렸다. 그렇게 걸어온 길이 벌써 30년이 넘었다. 많은 것을 얻었고, 또 많은 것을 잃었다. 잃어버린 것 가운데 제일 쓰리게 느껴지는 것은 '불온함'이다. 젊음의 특권은 불온함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이 명증한 진리로 여기는 것에 의문부호를 붙이기 일쑤였던 나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제는 사람들과 대립하기보다는 두루 원만하게 지낸다. 가끔 각을 잃어버린 사각형의 비애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다가오는 나라 조지아(옛 이름은 그루지야)를 찾은 것은 길을 잃은 채 비틀거리고 있는 기독교의 원형적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덤으로 아직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이들의 소박한 미소와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차에서 젊은 기사가 혼잣소리처럼 한 뜬금없는 말이 그런 나의 기대를 무참하게 무지르고 말았다. "나는 미국을 사랑해요." 무슨 말이냐고 묻자 그는 가난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떠난 후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미래의 전망조차 보이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탈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의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수도 트빌리시 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그의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피곤하고 활기없어 보이는 얼굴들, 특히 중년 여성들의 얼굴에 깃든 수심의 그늘이 깊었다. 타율적인 삶에 길들여진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조지아는 역시 정교회의 나라였다. 택시 운전을 하는 욕쟁이 기사도, 재래식 시장 골목에서 과일 행상을 하는 아주머니도 정교회 신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어디서든 십자가가 보이면 성호를 긋는 일이 일상이었다. 심지어는 대로를 무단으로 횡단하던 이들도 길 한복판에 서서 십자가를 향해 거듭해서 십자 성호를 긋곤 했다. 자기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조지아 총대주교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존경심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지아로 나를 잡아당긴 것은 어디선가 본 한 장의 사진이었다. 설산을 배경으로 언덕 끝에 서있는 츠민다 사메바 수도원(게르게티 삼위일체 교회)의 전경이었다. 그 설산은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이 서린 캅카스 산맥에 속한 산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었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캅카스 산정의 어느 바위에 사슬로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혀야 했던 비운의 사나이이다. 잔인한 것은 그 간이 밤 사이에 다시 회복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 프로메테우스는 나의 영웅이었다. 나는 상황은 묻고 신학은 대답한다는 신학적 공리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방법론적 회의 너머로 나를 빨아들이는 허무의 물결 앞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길벗들이 예수가 답이라고 말할 때 나는 차라리 답 없는 삶에 정직하게 직면했던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더 성실해보였다. 그러니 주체적 판단으로 신의 뜻을 거역한 사나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사나이, 그런데도 눈빛이 흐려지지 않은 사나이 프로메테우스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탄생한 산에 오를 수는 없지만 그 산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트빌리시를 떠난 차는 구불구불한 밀리터리 하이웨이를 3시간여 달려 마침내 '거룩한 산'이라는 뜻의 므타쯔민다 산 아래 마을 스테판츠민다에 이르렀다. 험준한 산의 품에 안긴 마을은 고요했다. 산 허리에 걸린 구름은 시시각각 모양을 바꿨고, 얼굴빛 붉은 사나이들은 노동에 여념이 없었다. 오후 2시, 숙소를 정한 후 바로 므타쯔민다로 향했다. 어떤 그리움이 그곳으로 나를 부른 것일까? 알 수 없는 끌림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시간은 지나간지 이미 오래다. 어쩌면 그냥 허허로운 풍경 속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홀로 있음의 욕구가 얼마나 간절했기에 옛 수도사들은 안락한 산 아래 마을을 버리고 이곳에 올랐을까? 지천으로 피어난 크고 작은 들꽃들이 가파르고 황량한 산길을 오르는 나를 위로했다. 어느 결에 앞서 이 산을 올랐던 수많은 이들의 숨과 나의 숨이 하나가 되었다.


허위단심으로 산마루에 올라선 순간 너른 평원 저편에 츠민다 사메바가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산을 배경으로 마치 절벽 위에 걸린 듯 아스라이 서 있는 교회. 왜 '간척간두진일보'라는 말이 떠올랐을까? 신앙이란 아스라한 장대 끝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이 아니던가? 츠민다 사메바는 마치 그런 사실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작고 소박한 예배당,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성화벽(이코노스타시스)조차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할 만큼 비좁았다. 하지만 그 공간에는 신성한 기운이 가득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콘들 앞에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환하게 빛을 밝히다가 스르륵 꺼져버리는 촛불을 지켜보다가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고단한 삶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졌다. 유난히 촛불이 많이 밝혀진 곳에는 성모자상이 있었다. 그런데 성모와 아기 예수의 얼굴이 검게 변색되어 거의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아마도 오랜 세월 촛불 그을음으로 인해 생긴 변형일 것이다. 그 검은 얼굴의 성모자상이 내게는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다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곳에 와서 촛불을 밝힌 수많은 이들의 염원이 환한 빛으로 바뀔 날은 언제일까? 


한 젊은 남자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는 예배당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돌며 모든 성화 앞에서 십자성호를 긋고 또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기 위해 다가서는 그 몸 동작은 경외심의 발로 그 자체였다. 그 거구의 사나이는 한 이콘 앞에 서서 십자 성호를 긋기 위해 오른손을 이마로 가져가다가 '어흑' 소리를 냈다. 흐느낌이었다. 한 동안 그의 손은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한참 후 그는 손을 거두어 마치 방점을 찍듯 가슴과 오른쪽 왼쪽 어깨를 짚었다. 대체 어떤 사정이 있길래 그는 이 높은 산에 올라 울가망한 마음을 저렇게 풀어내고 있는 것일까? 그 간절함 앞에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예리함이나 반항심이 아니라 저런 간절함이 아닐까 싶었다.


밖으로 나가 한참 동안을 예배당 밖 바위턱에 걸터앉아 마음을 식혔다. 구름이 설산을 휘감고 있었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 순간 정채봉 선생의 <나의 기도>가 찾아왔다. "아직도 태초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바다를 내게 허락하소서/짙푸른 순수가 얼굴인 바다의/단순성을 본받게 하시고/파도의 노래밖에는 들어 있는 것이 없는/바다의 가슴을 닮게 하소서". '태초', '바다', 짙푸른 순수', '단순성'. 30여년의 목회 여정 가운데서 가뭇없이 사라졌던 원시 언어이다. 익숙해졌기에 더 이상 묻지 않고, 불편하기에 대립하지 않으면서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벼랑에 버티고 서서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드티며 들어앉은 앙증맞은 집들, 그 속에 아옹다옹 다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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