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한 사람이 눈을 뜨면 2014년 10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한 사람이 눈을 뜨면


알베르 카뮈가 1948년에 쓴 희곡 <계엄령>은 페스트가 창궐해 도시 전체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익명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속절없이 죽어간다. 페스트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이웃을 환대할 수 없다. 그가 언제라도 죽음의 매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한다. 공포와 두려움이 안개처럼 도시에 번지자 저항에의 의지도 스러진다. 삶은 치욕일 뿐이다. 암담한 상황이다. 탈출의 길조차 막혀 있다. 길은 없는 것일까?


카뮈는 빅토리아와 디에고를 등장시킨다. 둘은 약혼한 사이이다. 공포에 질린 디에고는 스스로에게 실망한 나머지 자꾸만 빅토리아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디에고에게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 그의 의무임을 자꾸만 일깨우려 한다. 상처를 함께 아파하며 한 목소리로 외칠 수 있다면 열병에 걸려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빅토리아는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이들의 시도에 함께 저항하자고 말한다. 빅토리아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허무와 대결할 힘을 얻은 그는 페스트(의인화된 존재로 등장)의 여비서에게 끝없어 보이는 권력도 땅 위에 던져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만사를 숫자와 서류로 보면 된다고 믿었어! 그러나 너희의 잘난 사전에는 들장미와 하늘의 징조와 여름의 표정, 바다의 우렁찬 목소리와 고뇌의 순간, 그리고 인간들의 분노 같은 것은 다 빠져 있단 말이야!"


현실의 고통에만 붙박혀 있던 디에고의 시선이 확장되자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디에고는 인간에게는 아무리 해도 때려부술 수 없는 힘이 있다면서, 그 힘이 막 솟아오르려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여비서는 자기들의 체제에 한 가지 결함이 있다고 인정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단 한 사람의 인간이 공포를 극복하고 반항하기만 해도 기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한 사람이 눈을 뜨면 모두가 눈을 뜨게 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골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낮은 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실감나던 시절이었다. 여름에는 멍석이 깔린 마당에서, 겨울에는 따끈따끈한 안방에서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졌다. 위인들의 이야기, 민담, 그리고 도깨비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아이들을 매혹시킨 것은 언제나 도깨비 이야기였다. 산길을 가다가 도깨비와 만나 죽기살기로 씨름을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은 늘 허망했다. 새벽 닭울음소리와 함께 도깨비가 떠난 후, 지쳐 쓰러졌다가 일어나보니 옆에 피 묻은 싸리 빗자루 한 자루가 있더라는 것이다. 뒤늦게 그 이야기에 담긴 지혜를 깨달았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 지금 죽기살기로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것들이 밝은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것일 때가 많다는 것 말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우리 삶을 장악한 이후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의 주체로 살지 못한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페스트처럼 우리 영혼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성공의 사다리 윗단을 차지하기 위해 버둥거리는 이들에게 타자는 일종의 지옥이다. 치열한 경쟁에 시달린 이들은 자기들 속에 폐기물처럼 차오른 어둠을 자기보다 약한 이들에게 퍼붓는다. 자기가 받았던 폭력적 경험을 더 약한 이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카뮈가 1948년에 경험했던 페스트는 지금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길들여진 사람, 쇼핑 센터를 신전인양 순례하는 이들은 이웃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짐을 함께 나누어 질 수도 없다. 공감의 능력이 퇴화된 이들만 사는 세상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던 빅토리아, 그리고 죽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공포를 해체한 디에고적인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가?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