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출애굽기공부6 2014년 10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성물 만들기

본문/ 출30장


삶은 고르기우스의 매듭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풀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단칼에 그 매듭을 잘라버렸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뱀이었다는 메두사는 어쩌면 인간의 실존적 곤경을 가리키는 은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8). 전도서 기자의 이런 탄식이 조금도 낯설지 않습니다. 종교는 그처럼 복잡한 삶에 초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을 나누고, 본래적인 것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도와줍니다. 종교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소박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가 들려주는 성막 건설과 예배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는 과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굳이 그런 번거로운 절차를 다 거쳐야 하는가 회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대목을 건성으로 읽어치울 때가 많습니다.

유럽의 옛 예배당 건물을 찬찬히 둘러보면 곳곳에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무늬들이 과연 종교적 용도로 마련된 건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 까닭은 명확합니다. 건축가들은 그런 무늬 혹은 문양을 그림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복잡함과 정교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문양은 복잡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절차를 따르는 일이 어떤 때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조심스럽게 성물들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우리 삶을 조율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소의 여러 기물 만드는 이야기를 보면 그 제작 행위 하나하나가 이미 예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물 제작(30:1-10, 17-38) 

먼저 분향단(1-10)입니다. 성소 앞에 놓아둘 분향단은 조각목을 사용해 사방 1큐빗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아침 저녁으로 분향단에 향을 피워야 했고, 일 년에 한 번씩 속죄제물의 피를 발라 분향단을 정화해야 했습니다. 개신교 예배에서는 향을 사용하지 않지만 다른 종교 전통에서는 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된 일이었습니다. 국보 287호인 백제금동용봉봉래산대향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향을 피우는 것이 아주 중요한 종교 행위였음을 보여줍니다. 여러 종교 전통의 예배에서 향을 피운 것은 아마도 불유쾌한 냄새를 제거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몇 가지의 상징적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배에 사용되는 모든 물품은 하나님의 현존을 상기시키는 도구들입니다. 사람은 오감의 자극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자각하기도 합니다. 향은 후각과 관련됩니다. 타오르는 향은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징들을 잃어버린 것이 개신교 예배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물두멍(30:17-21)은 제사장이 만남의 장막에 들어갈 때 그리고 제단으로 나아갈 때에 정화의식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지름이 10큐빗, 둘레 30큐빗 규모의 이천 말 들이 ‘바다’와 지름 4큐빗 정도의 사십 말 들이 물두멍 열 개가 있었습니다(왕상7:23-26, 38-39). 그 크기와 숫자를 보면 물두멍에 담긴 물이 단순히 제사장들의 정화의식에만 사용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희생동물들을 씻거나 나중에 번제물로 태운 후 그 재를 치우는 데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향기름과 가루향을 만드는 법식도 아주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액체 몰약, 육계, 창포, 계피, 감람 기름을 정해진 분량대로 섞어 얻어진 향기름은 만남의 장막과 거기에 딸린 각종 물건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바름으로써 그것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용도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 향기름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용도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몸치장을 위해 사사로이 사용한다든지 똑같은 배합법으로 향유를 만들어 쓰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상징적 경계 만들기는 종교 의례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종교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물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에게는 물질을 넘어서는 성사의 도구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성소의 분향단에서 쓸 향은 호합향, 나감향, 풍자향의 향품을 각기 같은 분량으로 섞어서 만들되,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 후 그것을 빻아 순수하고 거룩한 가루향으로 만들어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어야 했습니다. 향이 좋다고 하여 그것을 사사로이 만드는 일은 향기름과 마찬가지로 금지되었습니다. 사적으로 전유되는 순간 그것은 거룩의 광휘를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목숨값(30:11-16)

성물 제작에 대한 이야기 한 복판에 인구조사 이야기가 뜬금없이 끼어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회막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할 비용 마련을 염출하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대개의 인구조사가 징집이나 세금 부과를 위해서였던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어떤 경우든 인구조사는 민중들의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 진노하여 내리는 징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인구를 조사할 때 조사받은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습니다.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했습니다. 나중에 이것은 성전세로 진화하게 됩니다. 















소명의 다양함

본문 /출 31장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다중지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비범한 한 사람의 생각보다는 평범한 이들의 통합된 지성이 더 올바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백성을 재판하는 일을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다른 이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뛰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 동시에,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잘 배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공자의 일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어느 날 제자인 자하가 스승인 공자에게 제자들의 됨됨이에 대해 물었습니다. 공자는 안회는 '덕이 많은 사람'이라 했고, 자공은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 했으며, 자로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 했고, 자장은 '점잖은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러자 자하가 "네 사람의 장점이 선생님보다 낫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왜 그들이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그에 대해 "안회는 덕이 있지만 상황에 따른 융통성이 없다. 자공은 말재주가 뛰어나지만 때로 침묵이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는 것을 모르지. 자로는 용기가 있지만 때로 남에게 굽히는 것이 진정한 용기임을 모른다. 그리고 자장은 점잖지 못한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지. 그러나 나는 이런 점에서 그들보다 낫다. 또한 나는 그들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받들어 주지. 이것이 바로 그들이 나를 스승으로 삼는 이유이다."


재능을 주신 까닭

회막 예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물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자세하게 이르신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브살렐입니다. 브살렐이라는 이름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 이름이 "하나님의 그늘 아래"라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은총 안에 살아가는 사람임을 넌지시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31:3-5)고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들은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들의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유래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시인의 능력은 뮈즈 여신이 주는 영감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브살렐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양식대로 회막의 기물들을 제작할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기능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상을 창조해내는 그의 상상력과 재능을 십분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동료를 보내주십니다. 단 지파에 속한 오홀리압와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홀리압은 '아버지의 천막'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어쩌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수종을 들었던 것처럼 브살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일을 돕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함께 일하게 될 지혜로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에 감화된 이들입니다. 출애굽기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영감이나 기술의 뿌리가 하나님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예술적 소양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에 바쳐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는데 활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른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과학 기술에 대해 맹목적 신뢰를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바야흐로 기술공학자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냉소적으로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 때문에 신앙의 위기를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학은 잘 활용하면 좋은 것이지만 잘못 활용되면 생명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안식일

회막과 거기에 사용되는 기구 제작에 관해 말하던 이야기의 흐름은 12절부터 등장하는 안식일 이야기로 인해 급격하게 단절됩니다. 왜 느닷없이 안식일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물론 회막과 기구를 제작하는 이들이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하나님의 리듬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금 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회막 이야기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25:1)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단락은 안식일 이야기가 끼어 들기 전에 총 여섯 개의 지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막 및 부속 기물에 대한 지시, 목숨값, 놋쇠 물두멍, 성별하는 향유, 가루향, 기술자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회막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와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출40:2절은 회막이 첫째 달 초하루에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첫째달 초하루는 혼돈이 끝나고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창8:13)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창조의 완성이 안식일임을 압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회막의 건설을 창조의 빛 속에서 바라보고 있기에 안식일 이야기를 이 대목에 추가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반영하거나 지향하지 않는 교회 건축은 자칫하면 사람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반영한 교회 건축은 어떤 걸까요?

금송아지 사건(1)

본문 / 출32:1-14


우상없이 기다리라(32:1-6)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는 무려 사십일을 그곳에 머물렀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에게 친히 쓰신 돌판 곧 증거판을 주셨습니다. 이제 언약을 맺을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32장은 시내산 발치에서 벌어진 참담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백성들은 불안에 사로잡혀 아론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의 요구를 하나님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할 까닭은 없습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가시적인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둑한 산길에서는 어린아이 하나만 곁에 있어도 마음이 적이 안정되는 법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불안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아론이 야훼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단호하고도 확고한 태도로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론의 마음 또한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금붙이를 모아 오라고 지시한 후에 그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만들다'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회막과 거기 딸린 기물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자의적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보며 그들은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32:4) 하고 외쳤습니다. 인간이 바야흐로 신의 창조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은 인간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 신은 인간의 욕망에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만든 신을 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신의 모습으로 선택한 것이 왜 하필이면 송아지였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려면 고대인들이 황소에 대해 갖고 있었던 각별한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기던 신들인 아피스나 므네비스를 황소로 형상화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도 황소 숭배가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황소는 힘과 활력 그리고 풍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황소는 그러니까 출애굽 공동체에도 매우 익숙한 신의 모습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아론은 자기들이 만든 금송아지가 하나님의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신과 동일시했습니다. 우매한 종교는 이렇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신학자인 가브리엘 바하니안은 '우상 없이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서 기자는 그들이 만든 것이 '황소'가 아니라 '송아지'라고 말합니다. 사실 '송아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활력이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이지만, '애송이' 혹은 '저속한 정열'이라는 경멸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송아지 앞에서 치른 백성들의 제의와 축제를 보면 그 숨겨진 뜻이 드러납니다. 아론이 단을 쌓은 다음날을 '여호와의 절기'로 선포하자, 백성들은 송아지 상 앞에 모여 번제와 화목제를 바친 후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먹고 마시다', '뛰어놀다'라는 단어는 잔치의 흥겨움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방종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의도적 표현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주신제(酒神祭)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주신제는 성적인 방종을 내포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다(32:7-14)

산 아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시고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내려보내십니다.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7) 매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출애굽의 주체가 모세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 없는 백성에 대한 염오(厭惡)의 감정이 그렇게 노출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상 없이 기다리지 못한 백성을 일러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하십니다. '목이 곧다'는 평가가 적절한 것일까요? 목이 곧다는 것이 교만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실패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목이 곧은 것은 자아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자기 이외의 것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진멸한 후에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 모세와 그 백성을 짐짓 분리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런 분리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도 백성들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지만 차마 그들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뜻을 돌이켜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두 가지 논거를 가지고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첫째,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낸 백성을 버린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무능 혹은 실패의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어 모세의 청을 받아들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말 없이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란 이렇게 백성들의 약함까지도 자기 어깨로 버텨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금송아지 사건(2)

본문 / 출32:15-35


분노하는 모세(32:15-20)

모세는 하나님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증거 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글자 또한 하나님이 손수 새기신 것이라고 몇 번씩 명토박아 말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인간의 고안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니 신성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산 중턱에서 모세를 영접한 여호수아는 산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런 소리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는 그 소리를 전투가 벌어진 증거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 소리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모세는 진을 향해 곧장 나아갑니다. 금송아지를 가운데 두고 춤을 추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이자 모세는 신적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증거 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리고 맙니다. 그것은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알리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던 모세의 모습과는 판이합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후 그것을 물에 타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합니다. 이 이상한 행동은 백성들의 불신에 대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중층적인 상징 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금송아지의 흔적 지우기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금송아지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우상을 만드는 행위에 대한 모세의 단호한 입장은 넉넉히 드러났을 것입니다. 둘째, 우상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에 녹고, 가루가 되고, 사람들에게 삼켜지는 우상이 누구를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셋째, 백성들이 그 참담한 기억을 몸에 새기는 행위입니다. 과거에 글을 겨루던 선비들은 자기 차례가 되어도 글을 짓지 못하는 이들에게 먹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먹통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먹물을 마신 사람은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며 절치부심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가루가 된 우상을 물에 타 마신 이들은 평생 그 날의 부끄러움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변명과 형벌(21-29)

우상을 없애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을 미혹된 길로 인도한 사람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책임은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권한의 위임은 책임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형 아론을 준엄하게 문책합니다. 아론의 변명은 구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하와에게 돌렸던 아담의 판박이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내게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24b). 변명이 길어질수록 더욱 누추해지기만 합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25) 모세는 백성들이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방자하게 된 책임이 아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입참마속泣斬馬謖을 단행하지는 못합니다. 차마 자기와 동고동락해온 친형을 단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이들을 부릅니다. 오직 레위 자손만 그의 앞으로 나왔습니다. 다른 이들은 마치 술객의 피리소리에도 귀를 막은 독사들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는 레위 사람들에게 형제와 찬구들과 이웃들을 도륙하라 명하고 그들은 그 명령을 주저없이 수행합니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요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택했던 '기원적 폭력'(르네 지라르)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통해 혼란에 빠졌던 한 공동체는 기원적 폭력을 통해 정화된다는 고대세계의 사고가 이 이야기 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29).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는 말은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제사장은 이처럼 폭력을 다루는 이들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일종의 제의화된 폭력입니다. 그런 폭력을 통해 사회를 위협하는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 제사장들의 일입니다.


모세의 간청(30-35)

모세는 이튿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백성들을 대신하여 참회하며 중보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 모세는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꼭 이렇게 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는 백성들과 자기를 구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기와 백성들을 동일시할 뿐 아니라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책임적 주체입니다. 누군가가 강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이들의 책임까지 수납하려는 모세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백성들을 포기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유보하시면서 모세에게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 명하십니다. 34절에 나오는 '내가 보응할 날'을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듯이 우리 또한 유예된 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유예된 시간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본문 / 출33장


장신구를 떼다(1-6)

33장 첫머리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라.' 이 명령은 당신의 사자들을 앞서 보내 길을 예비하게 하겠다는 말씀과 잇대어 있습니다. 둘째, '나는 너희와 동행하지 않겠다.' 목이 곧은 백성들인지라 길 위에서 그들을 진멸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돕기는 하겠지만 그들과 깊이 연루되는 일은 피하고 싶다는 말씀에 백성들은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슬픔은 자칫하면 부정적 감정이 되기 쉽지만, 슬픔은 우리 속에 깃든 무정함을 녹이는 용매가 되기도 하고, 비본래적인 것에서 돌이켜 본래적인 것을 향하도록 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슬픔을 느낀 백성들은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4). 하나님은 백성들의 몸에서 '장신구를 떼어내라'(5) 이르십니다. 장신구는 자기 강화 혹은 확장의 욕망이 외화된 것이 아닐까요? 장신구를 떼어내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통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릴 때 삶이 맑아집니다. 장신구를 떼어낸다는 것은 옛 삶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거룩함 앞에 서다(7-11)

7절부터 11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단절시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단절일 뿐 내적인 단절은 아닙니다.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회막 이야기는 중보자인 모세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진 밖에 장막을 치고 그것을 회막이라 이릅니다. 이것은 제사를 위해 구별된 성막과는 몇 가지 차이를 보입니다. 우선 진 한복판이 아니라 진 바깥에 친다는 점이 그렇고, 회막을 돌보는 것도 레위인들이 아니라 여호수아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면 각자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인 구름기둥이 회막에 임하면 백성들은 자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를 올렸습니다.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며 춤추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모세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모세도 아무 때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라야 그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임의로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11).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깊은 친밀함을 일컫는 말입니다. 죄가 '마주 봄'의 관계를 파괴하면 '등 돌림'이 시작됩니다. 죄는 소외시키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모세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이 구절은 동시에 모세의 중보기도가 응답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11절까지의 이야기가 괜히 끼어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간청과 응답(12-23)

모세는 주님의 계획을 가르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우리는 소돔을 향해 가시던 여호와께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자문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나눈 사람입니다. 모세는 과감하게 자기 청을 아룁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13). 구문이 복잡한듯 보여도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달라는 것과 출애굽 공동체를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 '고집이 센 백성'이라는 말로 거리를 두던 이들을 일러 '주의 백성'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관계의 양태는 사뭇 달라집니다. 14절과 15절에 나오는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도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동행할 것을 약속하면서 '너'를 편케 하겠다 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길을 떠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야말로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징표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은총을 약속하신 주님께 하나님의 영광(kabod)을 보여달라 청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표징 요구입니다. 표징을 요구한다는 것은 마음 한 구석에 미심쩍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신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십니다. 하지만 '보여달라'는 모세의 요구는 절반만 응답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선포를 먼저 들어야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19)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거룩함'이 '긍휼히 여김'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거룩은 형용모순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인식을 가진 후에라야 하나님을 보는 일이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위 틈에 집어 넣으시고 당신이 다 지나가실 때까지 그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가 손바닥을 거두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등 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각으로 파악불가능한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을 알 뿐입니다.



















다시 원점에서

본문 / 출34장


하나님의 속성(1-9)

신앙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성숙해집니다. 넘어짐이 없으면 일어섬도 없고, 무너짐이 없으면 일으켜 세움도 없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다시 시작하는 용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 역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지 못한 그 백성들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써가려 하십니다. 모세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이것은 돌판을 깨뜨린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를 파트너로 여겨 그가 구원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백성들이 산에 오르지 않도록 엄격하게 단속한 후에 하나님의 산에 올라갔습니다. 


구름 가운데서 강림하신 하나님은 먼저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진리란 '비은폐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신 것은 그 백성과 계약관계 속에 들어가시겠다는 확고한 의지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6). 여호와에 대한 이 다섯 가지 성격묘사는 성경 도처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하나의 제의적 고백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지만 '악'와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악'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거나 거스르는 죄를 가리킨다면, '과실'은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뜻합니다. 그에 비해 '죄'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는 용서하지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연좌 책임을 묻겠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죄의 결과가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오늘의 임상사회학자들도 지적하고 있는 바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은총을 베추시어 목이 뻣뻣한 백성들과 동행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는 모세에게서 우리는 참된 지도자상을 봅니다. 


다시 주신 계명(10-28)

언약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해 놀라운 이적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삼가 지키는 것입니다. 12절부터 26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백성들이 지켜야 할 계명이 12가지 언급되고 있습니다. 12가지로 정리한 것은 아마도 그것이 그들에게 의미있는 숫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을 지키라/하라'는 긍정적인 명령과 '~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이 혼재되어 있는 이 명령들은 종교생활의 규범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 땅의 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명령은 종교혼합주의의 위험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뜻도 있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엄연한 그들의 사회 체제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조치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나 그들의 제의에 동참하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안식일이나 순례의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제물에 대한 규정은 이방 제의와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26절에 나오는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는 명령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땅에서 나는 처음 익은 것을 여호와께 바치라는 것은 그것이 바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알라는 것이고,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는 것은 가나안의 풍요 제의와 관련되기에 금지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들을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도 기록의 의무를 진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였습니다.


광채(29-35)

하나님과 오랜 시간 대면한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그 광채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광채를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모세가 주저하는 그들을 '부르자' 비로소 그들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모세도 백성들을 부릅니다. '광채'와 '부름'은 중재자로서의 모세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표현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르신 모든 말씀을 다 들려주었습니다. 특정한 엘리트가 하나님의 뜻을 독점하는 것은 성서 종교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들입니다.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피에타'·'다비드상'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입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이 특별히 유명한 것은 모세의 머리 위에 솟아 있는 '뿔' 때문입니다. 성경 번역 과정 중에 모세의 살결을 나타내는 단어인 카란(qaran)을 뿔을 가리키는 카르누(qarnu)로 잘못 옮긴 탓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뿔은 권위와 위엄의 상징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뿔과 수염을 통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모세의 권위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회막 건설

본문 / 출35-39장


안식일로부터 시작하다(35:1-3)

이 단락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식양대로 회막을 세우는 과정을 세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25장부터 31장까지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이고, 35장부터 40장까지는 그 지시에 따른 인간의 수행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두 단락은 내용적으로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시와 수행의 긴밀한 연속성은 마치 상관의 명령을 복창하는 병사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함부로/임의로 다룰 수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막 건설 이야기는 안식일 준수 명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31:12-17, 35:1-2).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지시 부분에서는 회막 건설 이야기 끝에 나오는 데 비해 인간의 수행 부분에서는 회막 건설 작업을 개시하기 전에 나온다는 점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회막 건설 이야기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지요?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 작업을 마치시고 이레 째 되는 날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안식일은 창조의 마침표인 셈입니다. 하지만 엿새 째 창조된 인간은 안식일로부터 역사를 시작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안식을 누릴 줄 알아야 창조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사람들은 일쑤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삽니다. 목표 지향적인 삶은 역동적이지만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회막을 만드는 가장 거룩한 직무조차 안식일의 한계 안에서 수행되지 않으면 그것은 '소외된 노동'이 되기 쉽습니다. 소외된 노동에는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는 노동은 창조적일 수 없습니다.


자발적 헌신(35:20-29, 36:2-7)

모세는 회막에 쓸 자재들을 헌납해 줄 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합니다. 억지 징발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예물을 가져왔고(35:21), 재능이 있는 여인들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습니다. 성경은 몇 번씩이나 그것을 '자원하여 드린 예물'(35:29, 36:3)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극단적으로 대비됩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기획한 후 거기에 필요한 자재와 일꾼들을 징발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애굽의 탄생이었습니다. 영연방 유대교 최고 지도자인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는 <사회의 재창조>에서 회막 건설과 성전 건축을 비교한 후, 우리가 함께 살아갈 세계가 어떻게 세워지는 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국가는 요구가 아니라 헌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권리가 아니라 적극적인 시민의식에 의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의해 창조된다. 국가적 정체성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믿음의 기여를 통해 형성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혼자서는 불가능한 어떤 것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p.295)


사람들은 각자 자기 능력껏 헌신했습니다. 기여의 경중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크든 작든 기여하는 행위 자체가 소중하게 여겨졌습니다. 출애굽 공동체에게 있어 회막을 짓는 일은 자기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인 동시에 '고향'을 짓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여퉈두었던 소중한 것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책임적 주체가 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가져온 예물이 너무 많아 성소의 일을 맡아하는 이들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회막 건설은 다양한 이해 관계를 가진 집단(kehilla)을 신앙 공동체(edah)로 만들었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중심으로 하여 직인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39:1, 5, 7, 21, 26, 29, 31/32, 42, 43절은 앞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내용) 모든 것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동일한 구절이 7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7일 동안의 창조와 그 결과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창세기의 첫 장에는 날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루어신 세상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경탄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인간이 수행한 일은 지속적인 창조 사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꾼은 바둑 기사들이 복기하는 것처럼 회막과 그 기물들을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를 세세히 서술합니다. 그것은 마치 거룩한 의례처럼 보입니다. 복잡한 종교 의식은 일상적 삶의 리듬에 젖어든 이들에게는 번잡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과 절차를 따르는 동안 새로운 시간이 우리에게 유입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간이 유입되는 순간 지금까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것들의 인력이 느슨해집니다. 지루한 반복이 우리에게는 무의미하게 보여도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거룩의 문을 여는 행위인 것입니다.


39장의 마지막 단락은 회막을 세우기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말합니다. 직인들은 성막과 거기 딸린 성물들을 모세에게로 가져갑니다. 모세는 모든 것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되었는지 세심히 살핀 후, 수고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회막 건설 이야기는 이처럼 '명령'과 '수행'과 '축복'이 한 축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

본문 / 출40장


새로운 역사의 여명

이제 회막/성막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재가 마련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세우고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이 임의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루에 모세는 성막을 세웠습니다. 첫째 달 초하루는 물론 역사가 갱신되고 있음을 뜻하는 상징적 날짜입니다. 성막/회막을 세우고, 증거궤를 들여놓고 휘장으로 그것을 가리고, 상을 들여놓고 그 위에 진설병을 배열하고, 등잔대에 불을 켜고, 분향단과 번제단과 물두멍을 질서 있게 배열하는 일을 비롯해서, 기름을 발라 성막 기물들을 성별하는 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분하여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게 하라는 명령을 모세는 그대로 수행했습니다. 1절부터 15절까지가 하나님의 지시였다면, 16절부터 33절까지는 모세가 그 지시를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25장에서 40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았던 '지시'와 '수행' 도식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보여주는 16절부터 33절 사이에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40:16, 19, 21, 23, 25, 27, 29)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대체 왜 이런 반복이 필요한 것일까요? 성경의 원역사(창1-11장)는 혼돈 가운데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과, 질서 있는 세상에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혼돈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긋남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인간의 불순종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혼돈을 만드는 인간의 죄된 습성이 제도화된 것이 애굽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제국의 반명제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열리게 마련입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새로운 사람과 역사가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막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

모든 일이 지시에 따라 완수되었습니다. 그러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상치 못한 구절과 만납니다. '모세는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이것이 충분한 설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보낸 시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성막이 세워지기 전 모세가 진 밖에 임시로 세웠던 회막에 임했던 구름 기둥 이야기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모세가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막을 세우기까지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모세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모세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넘깁니다. 사제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사회를 더욱 강고하게 결속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종교의 중요한 기능은 사회 통합입니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은 '다시 묶는다'는 뜻의 라틴어 're-ligare'에서 나왔습니다. 신학적으로는 흩어진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다시 연결한다는 뜻이겠지만 종교사회학적으로 보면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엮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성막과 함께 움직이다

36절 이하에 나오는 구절은 마치 애굽 탈출 이후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았던 때를 다시금 연상시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36-37). 성막은 언제든 해체되어 운송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면 성막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먼저 떠올라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나아감과 멈춤을 결정하는 것은 구름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그곳이 좋다 하여 한곳에 오래 머물 수도 없었고, 싫다 하여 빨리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길 위에 선 존재입니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은 임시 처소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가리켜 '본향 찾는 자'(히11:14)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머무는 분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과 함께 여행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아감과 멈춤의 리듬 속에서 우리 삶을 성숙의 길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앞지르려는 성급함도 문제이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는 나태함도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여정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구름과 불을 보았습니다(38).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출애굽은 아직 진행중

본문 / 출애굽기 전체


정의로운 세상을 향하여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이가 혹은 역사가 만들어놓은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자기 삶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들이 듣는 이야기, 아니 우리가 귀를 기울이는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써내려가는 삶의 이야기의 재료가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출애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가요?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예속에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임을 깨닫고 살아간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기획하고 또 인도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마음 깊이 확신한다는 뜻일 겁니다. 바로로 상징되는 애굽은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불의한 사회 체제의 전형입니다. 그런 사회는 '강제 노동'과 '할당량' 부과를 통해 유지됩니다. 종교는 지배자의 편에 서서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불의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나님은 짓눌린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높아가는 세상을 가만히 두고 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몸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자신을 '히브리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매우 당파적인 표현입니다. 히브리는 제국의 질서 속에서 수단으로 변해버린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통해 불의한 사회체제를 심판하심으로 출애굽의 문을 여셨습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홍해를 건너 시내산 앞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질서의 초석으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예민하신 분들은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십계명은 애굽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에 대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십계명이야말로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였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란 약자가 굴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 삶을 존엄하게 살아낼 수 있는 사회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22:21). 새로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이 한 마디 속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광야 학교를 거쳐

출애굽기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인간을 강제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들의 가슴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심어주시고, 애굽을 벗어나 홍해를 건널 때까지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새끼를 보호하듯이 백성을 지켜주셨지만, 언제까지나 그들을 의존 상태에 버려두시지는 않았습니다. 광야라는 학교를 통과하는 동안 그들은 자기 운명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주체가 되어야 했습니다. 믿음의 산마루와 불신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동안 그들은 조금씩 단단해졌습니다. 마침내 출애굽 공동체가 시내산 앞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물론 그 언약은 백성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참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제한하시기로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회막/성막 건설을 지시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백성들과 소통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언약을 맺게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백성들 한 복판으로 들어오려 하십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세심하게 가르치시는 단락(24-31장)과 백성들이 그것을 수행하는 단락(35-40장) 사이에 '금송아지'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달라며 아론을 겁박하던 백성들의 요구는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바벨탑을 만들던 이들의 모습과 공명합니다. 존재의 기반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은 가시적인 것을 만들어 거기에 신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숭배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 공동체가 직면한 신뢰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가까스로 신뢰의 위기를 타개한 백성들은 회막/성막을 세우기 위해 진력합니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헌물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각자의 재능을 바칩니다. 애굽에 사는 동안 비주체적으로 살던 이들이 처음으로 함께 하는 창조적인 일이었습니다. 성막 세우기는 단순한 구조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잡다한 집단으로 구성되었던 출애굽 공동체는 이스라엘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성막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와 구조적 유사성을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과거에 완료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우리는 어느덧 '탐욕의 제국' 신민이 되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자유인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모두가 다 예속되어 있습니다. 탐욕의 제국에 사는 이들은 이웃을 함께 살아야 할 대상으로 보지 못합니다. 전쟁과 테러, 분쟁과 불화의 소식이 끊이질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신발을 벗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다가오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나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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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15 01-22 01:01)
"품부"라는 단어 목사님을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감사.감사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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