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묵상21 2014년 10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20:19-20)


제자들을 사로잡았던 하나님 나라의 꿈은 백일몽처럼 허망하게 변했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무채색 세상이었다. 마음의 기둥이 무너지자 세상이 다 위험한 곳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문을 닫아걸었던 것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고통스런 현실과의 대면을 연기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공포와 혼란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오셨다. 물 위를 즈려밟던 그 발걸음으로, 마치 안개처럼, 꿈처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얼마나 적절한 인사인가. 이 말을 하실 때 주님의 어조는 어떠했을까?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그런 게 궁금하다. 병든 이들을 위로하던 그 음성, 귀신을 꾸짖던 그 음성, 가련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만가만 들려주던 그 음성, 그 낯익은 음성을 듣는 순간 제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두려움은 사라졌다. 두려움을 기쁨으로 전환시키는 그 음성과 만나고 싶다. 그 음성을 닮고 싶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1-23)


다시 한번 평화의 인사를 건네신 주님은 제자들을 소명의 자리로 부르신다. 첫 번째 부름이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소명은 그들이 세상을 위한 선물이 되는 것이었다. 여전히 혼돈 가운데 있고, 독립적 신앙인으로 우뚝 서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깊은 신뢰를 보내신다. 자책과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을 주님은 어떻게 신뢰하실 수 있었을까? 믿어준다는 것, 그보다 더 큰 은총이 또 있을까? 하나님의 일은 내가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분을 신뢰할 때 할 수 있는 법이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 속에 숨을 불어넣으신다. 마치 흙으로 빚어진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처럼.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고 있다. 

새롭게 빚어진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용서였다. 세상의 무도한 폭력을 경험하셨던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초석이 용서임을 일깨우고 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용서의 시작이다. ‘惡’은 亞와 心이 결합된 단어이다. 亞는 무덤의 외형을 그린 그림 글자라 한다. 그러니까 악이란 결국 남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인 셈이다. ‘惡’이라는 글자는 또 흉한 일, 재난, 더러움, 병 등의 뜻도 가리킨다고 한다(우석영, <<낱말의 우주>>, 292쪽). 악이란 결국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일을 누군가에게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문제는 악은 남도 파괴하지만 자기도 파괴한다는 사실이다. 반면 용서는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살린다. 그래서 용서는 평화의 문이다. 누가 용서할 수 있나? 자신이 더 큰 존재에게 속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20:24-25) 


도마는 늘 믿음 없는 이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진다. 하지만 도마 덕분에 우리는 의심 혹은 회의라는 것조차 신앙의 일부임을 깨닫고 있다. 회의를 거치지 않은 신앙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 회의를 모르는 신앙에는 다름을 용납할 여백이 없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자기들의 생각에 동화시키려 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폭력적으로 배제하려 한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가 위험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유한한 인간이 의심 혹은 회의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마는 자기 경험 세계에 통합되지 않는 현실을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도마>는 충격적이다. 다른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마는 예수의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고는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가 활동했던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의 시대 분위기가 고스란히 그림에 반영되어 있다. 회의야말로 진정한 인식에 이르는 길이다. 합당한 회의에 불신이라는 찌지를 붙여 차단하는 순간 믿음은 깊이를 잃고 피상적으로 변한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20:26-27)


왜 하필이면 '여드레'일까? 이것은 객관적 시간의 추이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숫자는 대개 뭔가를 상징하지 않던가? 예컨대 3은 신적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이고, 4는 온땅을 나타내는 수이다. 이 둘이 결합한 수인 7과 12는 완전수라고 일컬어진다. 그렇다면 '여드레'라는 말은 무얼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일상의 시간인 이레를 넘어선 초월의 시간,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수를 나타낸다. 서양에서는 예로부터 커다란 교회 옆에 세례당을 따로 건축하곤 했는데 대부분의 세례당이 8각형 구조인 것은 그 때문이다. 세례는 옛 삶, 곧 옛 시간의 죽음인 동시에 새로운 삶 혹은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상징한다.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신 주님은 도마에게 말을 건네신다. 의심을 딛고 믿음의 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그것은 책망도 비난도 아니다.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0:28-29)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요한복음에서는 도마의 고백으로 대체되고 있다. 의심의 안개 걷히고 도마는 마침내 실상과 대면하게 되었다. 의심이 없었다면 이처럼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었을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은 부활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다.


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두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21:1-2)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 혹은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렀던 이 담수호가 지금은 디베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다. 지배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땅의 이름이 그리고 바다의 이름이 바뀌기도 한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헤롯 안티파스는 주후 25년, 갈릴리 서안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당시의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려 그 도시를 디베랴라 불렀다. 어떻게든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신흥 도시 디베랴는 갈릴리 어부들과 농부들의 한이 밴 도시였다. 그 도시 건설에 필요한 재원은 바로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디베랴는 절망의 바다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일곱 명의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에서 일곱(일곱 교회, 일곱 가지 재앙)은 언제나 전체를 뜻하는 상징 수이다. 다른 제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요한복음 저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21:3)


언제나 그러하듯 침묵을 깨거나 장면을 전환하는 인물은 베드로이다. 그는 모두가 하고 싶었지만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마음 속의 말을 끄집어낸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꿈결처럼 다가왔던 희망이 속절없이 스러졌음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드러낼 수가 있을까. 제국의 폭력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꿈은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베드로가 말을 꺼내자 너나할 것 없이 동조한다. "우리도 함께 가겠소." 예수와 더불어 시작됐던 역사 실험이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상하다. 우리는 이미 20장 19절 이하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세상에 나가 용서의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마치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풀이 죽어 있다. 어찌된 일일까? 학자들은 요한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을 돋을새김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 다른 전승에서 가져온 자료를 가지고 21장을 재구성했다고 설명한다. 

여하튼 제자들은 부름을 받았던 원점으로 돌아갔다. 절망의 어둠이 짙다. 이어지는 장면은 간결하지만 강력하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지만 그 밤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아무런 설명도 없지만 이 대목은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5)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배경이 되고 있다.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21:4-6)


'어둔 밤'이 지나고 동틀 무렵이 되었다. 절망의 밤, 공허만 건져올릴 수 밖에 없었던 밤이 지나고 희끄무레한 빛이 서린다. 그때 해변에 선 낯선 이가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 "무얼 좀 잡았느냐?" 제자들은 즉각 자기들이 빈 손임을 시인한다. "못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 낯선 이가 그물을 배의 오른쪽에 던지라 했고, 그들은 그대로 했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이 오는 방향이다. 방위로서의 오른쪽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징하는 언어가 '오른쪽'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이 던진 그물에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걸려서 끌어올릴 수조차 없었다.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 )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21:7, 9-10)


해변에 서 계신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한다. 늘 깨달음보다 몸이 앞서곤 하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든다. 마음이 급한 것이다. 뒤이어 해변에 당도한 제자들이 본 것은 숯불과 생선과 빵이었다. 빨갛게 달궈진 '숯불'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가야바의 법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의 목전에 선 스승을 보면서도 숯불을 쬐던 자신의 비루한 모습 말이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법이다. 숨기는 것만으로는 부끄러움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프지만 대면해야 한다. 그의 상처를 드러내는 숯불은 그렇기에 은총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잡아온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오라 이르신다. 그들을 영적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했던 것이 그 물고기 아니던가?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21:11-13)


그물에 들어 있던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구절을 통해 신앙 공동체의 깊은 결속음 짐작할 따름이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이 말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일까? 등 돌려 배반하고, 절망의 심연을 넘나들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너희를 나의 가족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알기에 그들은 유구무언이다.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까지도 넉넉한 사랑으로 부둥켜 안으신다. 제자들은 '받아들여졌다'. 구원의 새벽이 다시 밝아온 것이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 (21:15-17) 


그들의 공동식사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벌어진 성찬식이었다. 제자들이 먹은 것은 단순한 빵과 물고기가 아니었다. 예수의 살과 피였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신다.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부인한다 해도 자기는 결코 그러지 않겠노라 맹세했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 두려움에 굴복했던 사람 아닌가. 시몬은 아직 '반석'이라는 말 뜻 그대로의 베드로가 아니다. 주님은 그의 연약함에서 출발하신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속에 담긴 온기가 느껴지는가? 질문이지만 그 말 속에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듯이 내포되어 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객관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다가가지 않으신다. 기쁨과 슬픔, 아픔과 시련의 시간을 함께 겪어낸 사랑하는 동료로 다가가신다. '우리 관계가 끝난 것 아니지?' 이제는 베드로가 실존 전체를 걸고 대답할 차례다. 물론 주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믿을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가 아닌 주님의 사랑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는 옳게 대답했다. 

그러자 마침내 주님의 명령이 주어진다. "내 어린 양떼를 먹여라."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자라야 연약함에 휩싸인 이들을 도울 수 있다. 넘어짐의 쓰라림을 아는 자라야 속절없이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자기 불화 때문에 울어본 사람이라야 자괴감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5:2) 우리의 연약함 위에 하늘의 빛이 비춰질 때 그 연약함은 이웃 사랑으로 난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유사한 질문이 세 번 반복되고 베드로의 답도 세 번 반복된다. 이것 역시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부끄러운 모습을 상기시키는 문학적 장치이다. 부끄러움에 직면함을 통해 그는 은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무슬림들의 다섯 가지 의무 가운데 하나는 '순례'이다. 수많은 무슬림들이 성지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찾아가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신전을 돈다. 그것은 살아오는 동안 몸과 마음에 깃든 죄의 습성을 풀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시간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는 있다. 시간은 새로운 자기 인식을 통해 새로워진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21:18-19)


어린 양떼를 베드로에게 위임하신 주님은 이제 그가 맞이하게 될 운명을 예고하신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부인이 아니던가. 의지와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 없다. 출애굽 공동체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 때에 비로소 진을 이동시켰다. 그들이 먼저 움직이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목회는 고역으로 변한다. 바라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마침내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라!" 뒤를 돌아보지도 말고, 중뿔나게 앞장 서려 하지 말라는 말이다.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20-22)  


'나를 따라라'라는 명령이 아직 스러지기도 전에 베드로는 뒤를 돌아본다. 은혜 속에 있으나 몸과 마음에 밴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름'과 '돌아봄' 사이가 이처럼 찰나이다. 자기 소명에 충실하면 될 터인데 베드로는 여전히 흔들린다. 그는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를 보면서 그가 맞이하게 될 미래에 대해 묻는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교하는 마음이야말로 영혼의 올무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흔들리는 마음을 무지르며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은사와 소명을 견줘보는 마음 깊은 곳에는 교만과 불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에는 경중이 없다.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면 된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21:24-25)


증언자요 기록자인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직 드러나야 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증언은 더욱 참 되다. 그는 기록자로서 자기가 한 일이 미미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한다. 이로써 이 책은 더 큰 증언을 향해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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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나(14 12-28 01:12)
돈들이지않고 이리 좋은글 맘껏 읽을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목사님의 보물창고를 거닐면서 ... 목사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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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민(20 09-27 10:09)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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