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진노의 팔을 붙잡는 손 2014년 09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진노의 팔을 붙잡는 손


프랑스 리옹에 간 것은 떼제 공동체를 방문하기 전 며칠 숨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리옹은 12세기의 종교개혁가였던 왈도와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고향이었기에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떼제로 떠나기 전날 리옹 박물관에 들렀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박물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한산한 덕에 아주 여유롭게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 두 작품이 오래도록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하나는 오귀스트 로댕(August Rodin, 1840-1917)의 조각작품 <안토니우스 성인의 유혹>(1889)이었다. 안토니우스 성인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간 교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수도원주의를 정초한 인물로 그를 소개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수많은 유혹에 맞서 싸운 인물로도 유명하다. 로댕은 그런 성인의 내면에서 벌어진 고투를 대리석을 이용해 표현했다. 수도자 복장을 한 성인은 몸을 잔뜩 움추린 채 고개를 바닥에 쳐박고는 필사적으로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 그런 수도자의 등 위로 벌거벗은 여인이 아주 개방된 자세로 누워 있다. 여인의 눈은 초점을 잃은 것처럼 공허하다. 여인은 물론 거룩의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온갖 유혹의 은유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성인의 움추린 몸과 여인의 개방된 몸은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다. 여인의 몸은 매끈하여 광택이 난다. 그에 비해 성인의 옷자락과 몸은 마치 미완성 작품인양 거칠다. 로댕은 안토니우스를 성인이 진리를 향한 여정 가운데 있음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진리의 길은 여전히 더 깊은 곳을 향해 열려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로댕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신적 성숙의 징표일 때가 많다. '지당한 말씀'은 사람들에게 경청되지 않는다. '여백이 없는 말씀'은 사람들을 변화로 이끌지 못한다. 설교자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지 로댕의 작품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다른 하나의 작품은 루벤스(Pierre-Paul Rubens, 1577-1640)의 <그리스도의 진노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성 도미니크와 성 프란체스코>였다. 대작인데 화면의 상단에는 죄악에 가득 찬 세상을 보고 진노하여 손에 갈대로 만든 채찍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몸에 두른 붉은 망토는 그분의 신성을 나타낸다. 그의 왼편에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마치 그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다가서고 있는 성모의 모습이 보인다. 성모의 옷은 푸른색이고 거기에는 영롱한 별들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영광의 색이다. 오른편에는 근심스런 표정의 성부와 비둘기로 형상화된 성령이 있다. 화면의 하단에는 뱀이 휘감고 있는 지구본 위에 걸터앉아 있는 도미니크 성인과 그 위에 손을 얹은 프란체스코 성인이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맨발에 누더기 차림이다. 그들의 한 팔은 마치 내려치는 그리스도의 팔을 막으려는 듯 위로 치켜올려져 있다. 두 성인의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 루벤스가 이 작품에 착수한 것은 1602년부터라고 한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일으키는 격랑 속에서 유럽이 표류하고 있던 때이다. 종교가 폭력의 뿌리가 되고 있던 시대, 루벤스는 그런 시대를 향해 도미니크와 프란체스코 두 성인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두 성인 모두 탁발 수도원 운동을 벌였던 이들이다. 프란체스코는 '가난 부인'과 결혼한 사람이었고, 도미니크 역시 그러했다. 도미니크는 세상을 떠날 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 보화를 만들어 가라." 


오늘의 교회는 과연 그리스도의 진노의 팔을 막고 있는가?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이미 부유해진 교회, 부유해지고 싶은 교회에는 그리스도가 머물 자리가 없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문으로 개신교회의 위기가 가속화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는 길은 '십자가'를 꼭 붙드는 수밖에 없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교회는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 세속적인 성공의 유혹에 저항하고, 스스로 가난해지려는 노력 없이 교회는 새로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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