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출애굽기공부5 2014년 08월 06일
작성자 김기석

 배상법, 도덕법

본문 / 출22:1-20


배상법

율법은 개인의 재산 보호를 위해 다양한 규정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은 자기 이익이 침해를 받았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쟁이나 갈등이 이념이나 세계관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도 자기 이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쑤 정치 이념과 무관하게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 가치를 누가 증대시켜 줄 것인지, 누가 세금을 줄여줄지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거의 인간의 본능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법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는 메타담론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재산 손실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규정한 율법 대목들은 낯설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으면 공동체의 균열을 막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법들은 아마도 공동체 내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던 관습법이 성문화된 것일 겁니다.


남의 소유물을 훔친 사람은 반드시 배상해야 했습니다. 배상 정도는 그 짐승이 죽었을 경우와 살아 있을 경우가 다르고, 또 그 짐승의 종류에 따라 달라집니다.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은 자기를 팔아서라도 훔친 물건의 값과 배상액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런 규정은 그러니까 아예 도둑질할 생각을 말라는 경고였을 겁니다. 이 경고는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경청되었을 거라고 볼 근거도 없습니다. 좋아서 하든, 절박해서 하든 도둑질은 어느 시대나 근절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주인이 그에게 폭력을 가했을 경우 낮과 밤의 책임이 달라집니다. 도둑이 밤에 들어가다가 맞아 죽은 경우 주인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받지만, 낮에 벌어진 일이라면 주인은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부득이 함을 인정하면서도 도둑의 살 권리를 보호해주려는 배려가 돋보입니다. 도둑이라 해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짐승을 놓아 먹이는 도중 그 짐승이 남의 밭에 들어가 곡식을 먹은 경우에도 배상해야 하고, 병충해 예방을 위해 놓았던 불이 남의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울 경우도 배상해야 했습니다. 잠시 이웃에게 맡겨두었던 돈이나 물품이 사라진 경우, 도둑을 잡으면 그에게 배상 책임을 물으면 되지만, 도둑이 잡히지 않은 경우에는 재판관 앞에 나아가 판단을 구해야 했습니다.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그것이 죽거나 상하거나 없어진 경우에도 여러 가지 경우를 따져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인지, 부주의로 일어난 인인지를 가려야 했습니다.


도덕법

앞에서 이야기한 규정들이 재산상의 문제를 다뤘다면 16절부터 나오는 규정들은 공동체 안에서 지켜져야 할 인간 관계와 도덕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 동침했을 경우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아야 하고, 처녀의 아버지가 그를 싫어하면 납폐금만 내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혼전 성관계에 대해 미풍양속을 깼다고 하여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듯 태연합니다. 


죽어야 할 죄도 열거되고 있습니다. 무당, 짐승과 행음하는 자,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드리는 자는 반드시 멸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야훼 신앙을 훼손시키는 부류에 속합니다. 무당은 혼령과 접신한 후 미래를 예언하거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혹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들은 엄격하게 배제되었습니다. 사울의 경우를 떠올려보십시오. 블레셋과의 일전을 앞두고 사울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뜻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엔돌의 무녀를 찾아가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부탁합니다(삼상28장). 그는 스스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멸절시켰으면서도 궁지에 몰리자 무당을 찾아간 겁니다.


수간獸姦은 물론 성도덕의 타락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이방 종교의 한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엄격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동물세계와 인간세계의 미분화는 고대세계의 한 특징입니다.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는 반인반수의 신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황소 머리를 가진 미노타우로스, 얼굴은 사람이고 몸통은 염소인 사티로스를 떠올리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운 원시적 혼돈을 그런 형상을 통해 나타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이 짐승의 모습으로 변해 눈여겨보던 대상과 관계를 맺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다른 신에게 제사드리는 행위는 제1계명을 어기는 일이었기에 엄격히 다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에 빠지면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요구하는 신들(신12:31)을 찾기도 했습니다. 희생이 클수록 신의 보응도 크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양태는 야훼신앙과 무관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런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라

본문 / 출22:21-31


성경은 에덴 이후 사람들이 빚어내는 삶의 풍경을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 담아 들려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장남이면서 정착민입니다. 아벨은 차남이면서 유목민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가인은 강자이고 아벨은 약자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세심하게 돌보고 또 그의 살 권리를 인정해준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인의 후예로 살아갑니다. 가인은 자기 확장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타인은 자기 욕망 충족의 걸림돌일 뿐입니다. 걸림돌은 제거해야 합니다. 가인의 형제 살해는 그렇게 발생했습니다. 강자의 폭력이 일상이 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바뀝니다. 제국주의는 강자의 폭력이 제도화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를 잘 돌보라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들이 만들어가야 할 세상은 어떠해야 할까요? 사회적 약자들이 두려움이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22:21-23).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명령이 왕이나 관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백성 전체에게 부과된 의무라는 점입니다. 


'이방 나그네'는 다른 부족이나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언제든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고 사람들 사이에 폭력의 기운이 상승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희생양을 찾게 마련인데, 부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그들은 불리한 노동 조건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은 바로 그런 이들을 압제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출애굽은 바로 그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떨쳐 일어나신 사건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이 꺼려하는 힘겨운 직종에 종사합니다. 그들이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 하여 함부로 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단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입니다.


과부나 고아 역시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입니다. 율법은 그들을 해롭게 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남편이나 부모의 돌봄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일쑤 성이나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쉬웠습니다. 사실 '해롭게 하지 말라'는 번역은 너무 평범합니다. 새번역은 이것을 '괴롭히면 안 된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규정은 나중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하나님은 억압과 착취가 일상화된 세상을 전복시켜 돌봄과 사랑과 우애가 지배하는 곳으로 바꾸려 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민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도처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부르짖는 아벨의 핏소리에 귀를 기울이셨고, 애굽에서 압제당하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지침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일은 채권 채무 관계 속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 빚을 지게 된 사람들을 함부로 하대하거나 빚쟁이처럼 다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자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마련이어서 가난한 이들의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이웃의 옷을 저당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보로 잡은 겉옷은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옷을 저당잡힌다는 것에는 상징적 의미도 있습니다. 옛 사람들이 입는 옷에는 신분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겉옷을 담보로 맡긴다는 것은 자기의 사회적 신분조차 내려놓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일 것입니다. 율법은 채권자가 그런 절박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저녁마다 옷을 돌려주는 일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를 형제자매로 대하는 단초였습니다. 


율법은 한 사회의 맨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보장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공동체가 존속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유권은 물론 존중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또한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고,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합당한 권위가 존중되지 않을 때 사회 질서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은 성실하게 바쳐야 합니다. 봉헌 행위는 우리 삶을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공평한 세상을 향하여

본문 / 출23:1-19


송사가 벌어졌을 때

거짓 증언의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안정을 바라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 있는 이들의 편에 서곤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입장과 욕망이 충돌할 때 법은 그것을 조정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법이 편파적으로 적용된다면 법은 이미 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범죄자는 방송 카메라를 향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침으로써 자기들도 일종의 피해자임을 강변했습니다. 법의 정의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증인과 재판관이 모두 공정해야 합니다. 


율법은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 것과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23:1)고 엄격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2절에는 '다수를 따라'라는 어구가 두 번 반복됩니다.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몰주체적일 수 있는지를 잘 알기에 이런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의 조정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의견이 엇갈릴 때 부득이 취하는 게 다수결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판단은 소수보다는 다수 의견 혹은 유력자의 의견을 따르기 쉽습니다. 후대의 랍비 법정은 재판관들에게도 이 규정을 적용하여 가장 젊은 재판관부터 의견을 발표하게 했다고 합니다. 나이 든 재판관들의 의견에 휘둘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어서 가거라>, 성서와 함께, p. 327). 


3절에서 가난한 사람이 가엾다고 해서 증인이 편드는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과 같이, 6절에서는 재판관들이 가난한 자가 제기한 송사라고 해도 일방적으로 그를 두둔함으로 정의를 굽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법 적용을 달리하다 보면 결국 법에 대한 불신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 8절은 뇌물이 일으키는 어떤 변화를 아주 인상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9절은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하여 쉽게 폭력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출애굽 정신의 훼손이기 때문입니다. 


증인과 재판관들이 명심해야 할 내용을 기술하는 중에 본문은 원수의 가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4-5). 이것은 뜬금없는 끼어듦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체가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하나의 정교한 장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율법은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려야 하고, 적대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이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진 것을 보면 '그것'을 도와 짐을 부리라고 권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인간 관계 때문에 고통에 처한 동물을 외면하지 말라는 단순한 권고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권고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신 일이 있을 겁니다. 용서하기도 쉽지 않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원수의 짐승을 돕는 것은 증오를 넘어설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는 없지만 도울 수는 있으니 말입니다. 원수와 나 사이에 있는 짐승, 즉 곤경에 처한 짐승은 일종의 중립지대를 형성합니다. 혼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을 함께 처리하다보면 상대에 대한 악한 감정은 숙어들게 마련입니다. 랍비 전통은 원수를 친구로 바꾸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안식년과 안식일, 절기 규정

칠년 째 되는 해에는 파종을 하지 말고, 땅을 묵혀두라는 규정이 어떻게 제도화되었을까요? 휴경을 하는 것이 지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일까요? 정확한 실상은 알기 어렵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관습을 신학화하는 데 탁월합니다. 땅을 묵혀두는 것은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고, 안식년에 땅에서 돋아나는 것들은 가난한 이들과 들짐승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들짐승의 살 권리까지도 배려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확장된 신명기 법전은 안식년을 빚을 삭쳐주는 해로 소개합니다. 안식일 규정도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숨을 돌리다'라는 단어 속에 담겨있습니다. 그 날은 주인만 쉬는 날이 아니라 '소와 나귀'가 숨을 돌리는 날이고,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는 날입니다. 모든 생명이 제 숨을 쉬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매년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등 세 차례 순례의 절기를 지키라는 규정도 의미심장합니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순례를 한다는 것은 일상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일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끊음과 이음의 리듬 속에 있을 때라야 하나님을 생의 중심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런 축제를 통해 다른 구성원들과 일체감을 느끼고, 자기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이 든 빵과 같이 드리지 말라는 규정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학자들은 빵이 상하면서 생명의 상징인 피가 더렵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봉헌한 제물의 기름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는 것은 그것으로 친교의 식탁을 나누라는 권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토지의 첫 열매 중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규정은 생명의 매개인 어미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약속의 재확인

본문 / 출23:20-33


계약체결을 앞두고

서양의 결혼식 순서 가운데는 '결혼의사확인'이 있습니다. 주례는 신랑신부에게 상대방을 남편과 아내로 맞아들이기를 진심으로 원하냐고 묻습니다. 그들의 부모에게도 그 결혼을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결혼의 증인으로 참석한 하객들에게도 이들의 결혼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느냐고 묻습니다. 모두가 긍정적인 대답을 한 후에야 당사자들의 서약문이 낭독되고, 성혼선포가 이어집니다. 요식행위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절차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은 길고도 상세했던 계약법전의 내용이 낭독된 후 정말 그 법전의 내용대로 살겠느냐고 묻는 일종의 '의사확인' 절차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최종적인 계약을 체결하기 전, 하나님은 백성들과 함께 만들어 갈 구원 이야기에 꼭 필요한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충성스러움입니다. 하나님은 계약을 신실하게 이행할 것을 다짐하시면서 백성들의 의사를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백성의 충성스러움이 만날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백성들이 지켜야 할 것이 '내가 ~ 하리니, 너희는 ~ 하라/하지 말라'는 식의 교차 서술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20),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21a). 사실 20절부터 33절까지는 이런 형태의 문장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계약은 상호윤리를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 사건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이들의 해방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그 종착지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건설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약속의 땅'은 지중해변에 있는 저 팔레스타인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향하고 새로운 질서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백성들을 이끌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자는 물론 하나님의 대리자이지만 하나님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둘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고, 또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원수들과 싸우는 등의 다양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출애굽 사건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던 모세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이 인간 지도자의 탁월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라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약속과 순종

백성들이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사자가 전하는 말을 '청종'(listen carefully)하는 것입니다(21, 22절). 새번역은 '청종'이라는 단어를 '절대 순종'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경청하는 것과 순종은 분리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앞지르지 않으려는 겸허함이 없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명하시는 바대로 행하는 것입니다(22절). 신앙은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봉헌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뒤집힌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탈출 공동체가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25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을 경배하거나 섬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행위도 본받지 않는 것까지를 내포합니다. 24절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상과 돌기둥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매우 폭력적인 지시입니다. 지금도 이런 성경구절을 근거로 해서 다른 종교의 상징물을 훼손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탈레반 민병대는 '거짓 우상숭배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15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바미얀 석불을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했습니다. 출애굽기에 이런 지시가 내려진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신에게 매혹되어 하나님과의 계약을 저버릴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33절은 그런 우려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33절). 그러나 이런 지시를 무시간적인 진리로 받아들여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섬길 때 백성들에게 주어질 복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구체적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25-26절).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비근한 일상과 동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이 신비에 눈을 뜰 때 일상은 돌연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합니다. 





















계약 체결

본문 / 출24:1-18


마침내 계약을 체결하다

계약 체결을 위한 긴 학습과 동의 과정을 거친 후 이제 드디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계약이 맺어집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답과 아비후를 비롯한 이스라엘 장로 70명을 데리고 올라오라 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은 그분의 허락하심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19장에서 모세는 산 위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홀로 산을 오릅니다. 그리고는 다시 산을 내려와 백성들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하고는 다시 올라갑니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무용해 보이는 '오름'과 '내림'은 거룩함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약 체결의 주체인 백성의 대표자들을 산 위로 소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멀리서' 주님을 경배해야 했습니다(1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모세 뿐이었습니다(2절). 백성의 대표자들과 하나님 사이에 모세가 있습니다. 이런 공간적 배치는 탈출 공동체를 이끄는 자의 영적 권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계약 체결 의식을 집행합니다. 그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의례적입니다. 그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과 율례를 전함

  · 말씀대로 준행하겠다는 백성들의 응답 

  ·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함

  ·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열두 기둥을 세움

  · 청년들을 보내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함

  · 모세가 그 피를 받아 반을 제단에 뿌림

  · 앞서 기록한 언약서를 낭독

  · 말씀대로 준행하겠다는 백성들의 재다짐

  · 모세가 남은 피를 백성에게 뿌림

  · 계약이 맺어진 것을 경축하는 공동식사


이 과정이 자아내는 감정은 번거로움이 아니라 장엄함입니다. 번다해 보이는 이런 절차는 사실은 언약 체결을 공감각적으로 기억에 새기는 과정이었습니다. 제단과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것은 그 언약이 피의 맹세, 즉 생명을 걸고 하는 맹세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무한한 하나님은 이 언약을 통해 당신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십니다. 이것보다 큰 사랑이 또 있을까요? 상대적이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역사를 넘어서는 의미의 세계로 돌입합니다. 


계약/언약 체결의 마침표는 '친교의 식탁'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들은 이제 비로소 하나님을 뵙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계약의 봉인으로서의 먹고 마심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한 가족이 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6장에 나오는 이삭과 아비멜렉이 맺은 계약 이야기를 압니다. 그랄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이삭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는 곳마다 복을 받았습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랄 사람들은 떠돌이 이삭의 행운을 좋게 보아줄 수가 없었고, 그를 자꾸만 압박해서 결국 궁벽진 곳으로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이삭은 복을 누렸습니다. 그것을 본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상호 불가침 계약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이삭은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식탁 공동체가 벌어졌던 것을 아름답게 기억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 이후 실의에 잠긴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시기도 했습니다(요21:9).


모세, 다시 시내산에 오르다

제의적인 식사를 통해 계약 체결은 완료되었지만 아직 후속조치가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산 위로 부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이미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모세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동의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고 기록하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록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율법과 계명의 권위는 말씀을 수용하는 자의 삶을 통해서만 입증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욕망에 이끌리는 우리 삶과 불화를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욕망의 길과 하나님의 길 사이에서 바장이다가 단호하게 하나님의 길을 택할 수 있을 때 율법과 계명은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그를 대동하고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갑니다. 마치 그가 모세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훌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 백성들을 치리할 권한을 위임합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자 엿새 동안이나 구름이 산을 가렸고,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물렀습니다. 마침내 일곱째 되는 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자 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섰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십 일 사십 야를 보냈습니다. 



















성막 건설 준비

본문 / 출25:1-39


출애굽기 25-31장은 모세가 시내산에 머무는 40일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막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과 거룩한 백성을 이끌 제사장들의 임직 절차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탈출 공동체와 맺은 언약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 가운데 머무르려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만남의 장소인 성막이었고, 매개 존재인 제사장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상의 한 장소에 갇히실 분은 아닙니다. 나중에 성전을 지은 솔로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다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8:27). 


성막을 위한 예물

하나님은 성막 건설을 위해 필요한 물품을 어떻게 조달해야 할지를 모세에게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예물을 가져오게 하라 하십니다. 예물은 '터루마'의 번역인데,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들어올려진 헌물을 뜻합니다. 예물이 예물인 것은 그 안에 기쁨과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감격,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감격이야말로 성막의 내적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중요한 것은 '자발성'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너희는 받을지니라"(2절). 아름다운 일과 강제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거룩한 일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다 해도 동참한 이들의 마음 속에 원망과 꺼림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거룩한 일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그의 최대 치적으로 꼽곤 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성전건축은 강제 노역과 무거운 세금 부담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성전 건축은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 분단의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막 건설을 위해 필요한 물품은 다양했습니다. 금, 은, 놋, 청색 자색 홍색 실, 가는 베실과 염소 털,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 호마노와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 등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이 물품 목록을 열거한 까닭이 있습니다. 이 목록을 보면 부유한 사람만 낼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가난한 이들이 낼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성막은 특정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일방적 기여로 건설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모든 이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여의 경중'은 가려져서도 안 되고, 가려질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을 낸 사람도 위축되어서는 안 되고, 귀금속을 냈다 하여 우쭐거려서도 안 됩니다. 어느 건물에 들어갔다가 로비에 그 건물을 세우는데 기여금을 낸 이들의 명패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기여금의 차이에 따라 명패의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차등 혹은 차별이 있는 곳에 거룩함이 깃들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공동생활이 빚어낸 차별을 지우기 위해 이 땅의 현실에 개입하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더욱 그럴 수 없습니다. 


성막은 함부로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식양대로 지어야 합니다. 기능적·미학적 고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막은 언제든 해체하고 이동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공간이 아니라 그 백성과 만나시는 장소일 뿐입니다.


언약궤, 진설병 상, 등대

하나님은 조각목(아카시아과의 나무)으로 언약궤를 만들라 하십니다. 언약궤는 앞으로 주실 증거판을 모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궤는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심을 보여주는 가시적 징표입니다. 언약궤 위에는 덮개 형태의 속죄소(속죄소를 뜻하는 히브리 말은 본래 '덮개'를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시은소施恩所라고도 번역했습니다)를 정금으로 만들고, 속죄소의 양끝에는 날개를 잇댄 채 마주보는 형태의 그룹(Cherup)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속죄소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전하는 곳으로 삼으셨기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진설병 상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진설병은 본래 '얼굴의 빵'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의 지파 수에 맞춰 12개의 빵을 상 위에 두 줄로 늘어놓아야 했습니다. 진설병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 앞에 있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그 백성을 먹이시는 하나님 곧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설병 상을 지성소를 가린 휘장 앞에 두었던 것도 그런 뜻일 겁니다.  


일곱 가지가 달린 등대(Menorah) 곧 등잔 받침 역시 정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등잔은 세상에 빛을 발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명을 암시하는 동시에, 백성 가운데 빛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등잔대의 밑판과 줄기와 등잔과 꽃받침과 꽃은 하나로 이어놓아야 했는데, 그것은 기능적 혹은 미학적 고려인 동시에 나뉘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성막과 제단

본문 / 출26-27장


지시에 순종해야 하는 까닭

성경을 통독하다가 이 대목에 이를 즈음 많은 이들이 망설이기 시작합니다. 어찌 보면 낯설기만한, 옛 제사전통에 속한 일들을 굳이 읽어야 하나 회의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제사장 겸 제물이 되셔서 모든 희생제의가 종결되었다고 믿기에 성막 건설과 또 거기에 사용할 여러 기물을 만드는 이야기는 건너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제사규정이나 족보 등은 뜻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쪽수를 채우기 위해 끼어넣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성막 건설과 제단 제작에 대한 규정이 매우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까닭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에 속한 것은 함부로, 적당히, 아무렇게나 만들어서는 안 되고 정확한 지침에 따라 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25:9). 


번다해 보이는 규정을 세세히 따르는 일은 고역일 수도 있지만, 고역을 견디며 지침에 따라 성실하게 일을 진행하다보면 어느 순간 마음은 고요해지고, 의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도 합니다. 추상화를 그리기 전에 형태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익혀야 하듯이, 노래를 잘 부르려면 호흡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음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응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성막 건설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영연방 최고 랍비인 조너선 색스는 "개인들의 무리를 언약의 사회로 탈바꿈"하는 데 필요한 일은 "함께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유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보장될 수 없다. 하나님의 힘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는 오로지 국민들 스스로의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여기에 성막 건설의 참된 의미가 있다. 국민은 형성에의 노력을 통해 형성된다."(조너선 색스, <사회의 재창조>, 말·글빛냄, 2009, p.289) 하나님의 지시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언약 공동체 구성원들의 정체성이 새롭게 빚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막

26장은 성막의 골격과 그 골격을 덮는 휘장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먼저 성막의 지붕을 덮기 위해 가늘게 꼰 베 실로 천을 짜고 거기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은 열 폭 휘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그것을 다섯 폭씩 연결해서 한 벌이 되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마련된 두 벌 폭 가장자리에 쉰 개의 청색 고(loop, [옷고름이나 끈 따위를 서로 잡아맬 때] 매듭이 풀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한 가닥을 고리 모양으로 잡아 뺀 것)를 만들어 서로 맞물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휘장의 규격 역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길이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입니다. 1규빗을 대략 50cm 정도라고 보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 휘장을 덮을 천막은 휘장을 만들 때 사용한 베 실보다는 값싼 염소털로 만들되, 길이 서른 규빗, 너비 네 규빗으로 다소 여유를 두어야 했습니다. 이때 천막용 휘장은 열 한 폭을 만들어야 했는데, 다섯 폭을 연결해 한 벌을 만들고 나머니 여섯 폭을 연결해 다른 한 벌을 만든 후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앞쪽으로 반을 접어 올려야 했습니다. 이 두 벌은 놋쇠 갈고리로 연결되었습니다. 천의 남은 부분은 성막의 좌우편으로 늘어뜨려 성막을 덮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 위에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어 씌웠습니다. 성막 안에는 기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막을 지탱하기 위한 지지대가 필요했습니다. 본문은 그 지지대와 성막 바닥을 만들어 연결하는 방법,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을 만드는 방법과 설치법, 증거궤와 속죄소 그리고 상과 등잔대를 배치하는 방법 등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단

27장은 제단을 제작하는 방법과 성막 뜰을 만드는 법식을 보여줍니다. 제단은 물론 희생제물을 태우는 번제단입니다. 제단은 사방 5규빗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제작해야 했는데 그 재료는 조각목이었습니다. 조각목이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놋으로 제단을 둘렀습니다. 놋으로 만든 그물을 가운데 두어 타고 남은 재가 아래로 떨어지도록 했습니다. 제단에서 사용될 부삽, 대야,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등도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성막 뜰은 세마포 휘장으로 둘러야 했고 그 규모는 길이 100규빗, 너비 50규빗, 높이 5규빗이었습니다. 휘장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기둥과 밑받침을 각각 스무 개씩 놋으로 만들었고, 기둥에 달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기타 다른 규정도 상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성막을 밝힐 등불은 꺼뜨리지 말아야 했기에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백성들에게 헌납받았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 안 곧 지성소의 휘장 밖에서 등불을 보살피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빛은 창조 첫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빛을 연상시킵니다.





















제사장의 옷과 임직식

본문 / 출28-29장


제사장의 옷

성막 건설에 대한 지침을 주신 후 하나님은 제사장으로 섬길 사람들을 세우라 하십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선택되었습니다. 이어 제사장들이 입을 옷에 관한 상세한 지침을 주십니다. 제사장들이 입을 옷은 위엄이 있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 옷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이 만들어야 했습니다. 옷과 부착물의 종류가 참 많습니다. 흉패(가슴받이)·에봇·겉옷·반포 속옷(줄무늬 속옷)·관·띠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금실과 청색·자색·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에봇은 겉옷 위에 걸쳐 입는 것으로 제사장 복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에봇 위에는 어깨받이(일종의 멜빵)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이어지게 해야 했고, 허리띠도 만들어 붙였습니다. 에봇의 어깨받이에는 각각 여섯 지파의 이름을 새긴 두 개의 호마노를 좌우편에 달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제사장들의 무거운 책임을 상기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사장들은 민족의 운명이 그들에게 달린 듯 조심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위엄있고 아름다운 복장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의 무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판결 흉패는 길이 한 뼘 너비 한 뼘의 사각형 형태의 천을 두 겹으로 겹쳐서 만들고, 그 위에는 네 줄 보석을 박되 매 줄마다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새긴 세 개의 보석을 박아 넣었습니다. 그 외에도 금 고리, 금 사슬, 흉패 고리, 에봇 고리도 만들었습니다. 판결 흉패 안에는 빛과 완전함을 뜻하는 '우림'과 '둠밈'을 넣었습니다. 아론은 백성들간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이 흉배를 부착함으로 자기의 판단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경계했습니다. 


에봇에 딸린 겉옷의 가장자리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 놓고 그 사이 사이에 금방울을 달았습니다. 석류는 생명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석류의 말>이라는 시에서 석류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감추려고/감추려고/애를 쓰는 데도//어느새/살짝 삐져나오는/이 붉은 그리움은/제 탓이 아니에요". '붉은 그리움'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바가 참 많습니다. 제사장의 겉옷 가장자리에 금방울을 단 까닭은 뭘까요? 그것은 아론이 일 년에 한 차례 거룩하신 분 앞에 나아갈 때 지성소 밖의 사람들에게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은 마음을 살피고 경거망동한 행동을 삼가기 위해 옷에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달았다고 합니다. 의미는 다르지만 옷조차 마음 공부의 도구로 사용하는 지혜로움이 놀랍습니다.


제사장이 쓰는 관에 부착해야 할 순금패에는 '여호와께 성결'(원문은 '야훼께 속한 거룩함')이라고 썼습니다.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관련된 모든 책임을 제사장이 진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무한 책임을 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베로 만든 속바지가 허리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라(28:42)는 규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성적 에너지를 감추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이러한 조처는 성적 에너지의 방출을 통해 신을 섬기는 가나안 종교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 임직식

29장은 일주일 동안 지속되는 제사장들의 성별의식과 임직 규정을 다룹니다. 제사장들 역시 허물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자신들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 문으로 나아가 물로 몸을 씻은 후 제사장의 옷을 갖춰 입었습니다. 아론이 관까지 다 갖춰 입은 후 모세는 기름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부었습니다. 그 후에 아론의 아들들도 같은 절차를 밟았습니다. 착의식이 끝난 후에는 수송아지를 끌어다가 그 머리에 안수한 후에 그 소를 잡아 속죄제를 바쳤습니다. 안수한다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자와 제물의 운명이 동일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스스로 제물로 바쳐지는 존재입니다. 이어 숫양을 잡아 번제로 바친 후, 다른 숫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제물로 바쳤는데 이것이야말로 제사장 위임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피를 제사장들의 오른손 귓부리,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들의 옷에 뿌린 것(29:20-21)은 그들이 생명을 다루는 직분을 맡았음을 상기시키는 것인 동시에, 백성들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이어 숫양과 고운 밀가루로 만든 무교병과 기름 섞인 과자와 기름 바른 전병도 바쳤습니다. 요제, 화제, 거제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이레 동안 계속되는 제사장 위임식을 통해 제단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 거룩한 제단과 접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됩니다(29:37). 이후에는 제사장들의 일상 업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침과 저녁에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리기 위해 제사를 바쳐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등장하면서 모세의 역할은 줄어들고 아론의 역할이 커집니다. 제국의 지배를 거절하면서 애굽을 탈출했던 공동체가 예배 공동체로 전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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