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묵상20 2014년 08월 06일
작성자 김기석

 그 때에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으로 쳤다. 병정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뒤에, 예수 앞으로 나와서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소리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19:1-3)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다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적개심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예수에게 채찍질을 가하도록 한다. 거기에 가시나무 왕관, 자색 옷, 조롱, 모욕이 가해졌다. 예수는 조롱거리로 변했다. 그의 인간적 존엄은 박탈되었다. 그는 인격이 아니라 사물이다. 병정들은 예수를 조롱하면서 가학적 쾌감을 느꼈을까? 이 병정들의 모습과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포로로 잡힌 이들을 조롱하고 학대하던 미국 군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들은 왜 이리 무력한 사람에게 적대감을 보일까? 그들은 어찌 보면 제국이라는 거대한 체제의 한 부품이다. 그들은 제국의 폭력을 대행하는 기계들이다. 처음부터 그들이 악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은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가 되기를 포기했다. 생각 혹은 반성이 없어야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법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무사유(thoughtlessness)야말로 전체주의의 뿌리라고 말했다. 겉으로 드러난 그들보다는 뒤에 숨어서 폭력을 사주하고 또 격려하는 자들의 죄가 더 크다.


빌라도는 기다리고 있던 유대 사람들 앞에 조리돌림당한 예수를 끌어냈다. "보시오, 이 사람이오." 상처입은 예수, 무력한 예수, 조롱당하는 예수가 그들 앞에 있었다. 이 장면은 15-17세기 서양의 많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그림들은 상처받은 예수를 통해 참 사람과 참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동원된 사람들은 이면의 진실을 볼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은 자동인형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고 외친다. 십자가는 로마가 정치범들을 처형하던 도구이다. 예수는 정말 정치적인 위험인물이었나? 불연기연不然其然이다. 그른 말이기도 하고 맞는 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예수가 폭력을 선동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아니다'라고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과 실천이 제국의 토대를 흔들수도 있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맞다'고 할 수 있다. 군중들의 소요 속에서도 빌라도는 미심쩍은 눈을 거두지 못한다. 이윽고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을 참칭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외친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이오."(19:8-11)

 

"당신은 어디서 왔소?" 빌라도의 내면의 동요가 엿보인다. 하지만 예수의 침묵은 깨지지 않는다. 들을 생각이 없는 자에게 하는 말의 부질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죽이고 살릴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고 말한다. 빌라도는 그 권한이 효력을 갖는 것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칠 때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시절이 변하면 언제든 올무로 변할 수 있는 권력의 속성을 노회한 정치가인 그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에게 예수는 너무나 낯선 존재였다. 증오의 태풍이 몰아치는 곳에서 홀로 고요한 예수. 이윽고 그의 권한이라는 것이 잠시 동안 위임된 것임을 일깨우시기 위해 예수께서 입을 여셨다. 이것 또한 사랑일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하고 외쳤다.(19:12)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는 말은 아마도 역사적 진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예수의 처형 책임은 제국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더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상대방의 어디를 건드려야 자기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지 너무나 잘 안다. "이 사람을 놓아 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조차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19:15)라고 말한다. 타락한 종교의 전형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자기들의 밥줄을 쥐고 있는 이들만 바라본다. 하나님의 왕권은 유대교를 대표하는 이들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 이로써 유대교는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다. 권력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는 종교는 이미 참 종교가 아니다.


이리하여 이제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를 넘겨받았다.(19:16)


마침내 빌라도가 항복했다. 예수는 철저히 물화物化되었다. '넘겨주었다'와 '넘겨받았다'는 말이 그러하다. 철저한 수동이다. 하지만 구원사의 흐름은 그 수동성을 통해 이어진다. 패망 이후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져서 강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이삭의 결박'을 뜻하는 '아케다(akedah)'라는 단어를 묵상했다. 예수야말로 '아케다'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19:17-18)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라는 말은 당연한 듯 싶지만 의도적이다. 초대교회는 영지주의 이단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예수가 아닌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요한복음은 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다. 골고다 위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하였으나, 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 하고 대답하였다.(19:19-22)


사법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따라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는 유대 지도층의 압박에 굴복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괴로웠던 것일까? 그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를 붙임으로 유대 민족 전체를 조롱한다. 유대인의 왕이 얼마나 무력한지 보라는 것이다. 지도자연하는 이들은 언어에 민감하다. 그들은 그 명패 속에 담긴 조롱의 뜻을 읽지 못했을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명패 앞에 '자칭'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요구한다. 빌라도도 풍자를 웃음거리로 바꾸려는 그들의 꼼수를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단호히 그 청을 거절한다. 압박받은 이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았을까? 조롱을 위해 부착한 그 명패가 실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적절한 증언이었다는 사실을.


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19:23-24)


예수는 알몸이다. 십자가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과 장시간 대면하도록 고안된 잔혹한 형벌도구인 동시에 처형당하는 이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로마는 희생자들의 옷을 사형 집행인의 몫으로 정해두었다. 병정들은 지금 죽어가는 이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의 제국에 의해 고용된 처형 기계일 뿐이다. 그 일을 시작할 때는 저어하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철저히 기계로 변했을 것이다. 기계가 마음 쓰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아올 몫뿐이다. 끔찍한 소외 아닌가? 예수의 겉옷을 나눈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통째로 짠 속옷은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19:25-27)


자기 몫 챙기기에 발밭은 네 명의 병사 곁에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는 네 여인이 있다. 제국의 기계로 변한 사람들과 제국에 의해 사랑하는 이를 박탈당한 이들이 기묘하게 대조되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병사들은 강자이고, 여인들은 약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렇다. 사랑은 무능하지 않다. 세상은 누군가를 끝내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로는 지켜내지 못해 아파하는 이들을 통해 조금씩 정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말씀하신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어머니'라 번역된 단어는 사실은 '여인'이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어머니를 '여인'이라 부르셨다. 당신의 사역을 가족간의 친밀함으로 해소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혈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영적인 가족이 탄생하는 법이다. 열 두 제자를 불러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려 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핏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을 창조하신다. '십자가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는 말은 이런 뜻일 것이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19:28-30)


이제 거의 다 왔다. 예수님은 보내신 분의 뜻을 다 행하셨다.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목마르다'는 외침은 육신의 목마름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잔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겠다는(18:11)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해면에 듬뿍 적셔 우슬초 대에 꿰어 예수의 입에 댔다. '우슬초'가 등장하는 것은 이 때가 유월절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 이루었다'. 장엄한 말이다. 생을 마치는 날, 이 말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일을 완전하게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온전히 비워 하나님께 바쳤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숨을 거두셨다'는 말의 원문은 '영혼을 하나님께 넘겨드렸다'고 번역될 수 있다. 주인에게 바치는 것이다. 인생의 완성이란 무엇일까? 우리 영혼을 잘 간수했다가 하늘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19:34)


어둠이 내리기 전에 그 상황을 종료하기 위해 병정들은 예수의 좌우편 십자가에 달렸던 죄수들의 다리를 꺾었다. 그런데 예수의 숨은 이미 멎어 있었다. 병정 하나가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예수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예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물과 피는 우리에게 스가랴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그 날이 오면, 샘 하나가 터져서,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 줄 것이다."(슥13:1)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 요한은 그들을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한다. 그는 유대인들의 시선이 두려워 그 사실을 드러내지를 못하고 지내왔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의 무고한 죽음은 그를 더 이상 익명성의 그늘 아래 숨어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앙 양심의 소환장을 받고 그는 두려움을 돌파해버린 것이다. 드러난 제자들은 숨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나타난다. 고난의 현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니고데모는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후 복음서에서 사라졌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등장하여 아리마대 요셉과 더불어 예수를 새 무덤에 모셨다.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 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20:1-2)


여기서 말하는 '주간의 첫 날'은 역사의 위대한 변곡점이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날이라는 말이다. '이른 새벽'은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역사의 새벽이 저절로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온 몸으로 어둠에 맞선 이들이 일으킨 섬광들이 모일 때 기적처럼 새벽은 밝아온다. 물론 지극한 어둠을 물리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 그런데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옮겨져 있었다. 요한의 서술이 담담하기 이를 데 없다. 큰 지진, 번개 같은 모습의 천사, 돌을 굴려내는 드라마틱한 동작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당황한 마리아의 슬픔만이 도드라진다. 마리아는 달려가서 베드로와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전한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20:3-5)


남보다 빨리 달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마음이 급했던 젊은 제자는 빨리 달려가 무덤 앞에 이르지만, 그는 그 앞에서 멈칫한다. 몸을 굽혀 열린 무덤 안을 들여다 볼 뿐이다. 그는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전에는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를 비판할 이유는 없다. 사람마다 역할이 다르니 말이다.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20:6-10)


뒤늦게 무덤 앞에 당도한 베드로는 서슴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시체와 접촉함으로써 부정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그에게는 아예 없다.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스승을 따랐던 그가 아닌가. '오라'는 스승의 부름에 안전한 배를 벗어나 물 위를 걸었던 그가 아닌가. 베드로가 앞장서자 다른 제자도 따라 들어갔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삼베'와 '수건'이 개켜진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들은 비로소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아직은 주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은 깨닫지 못하였다. '깨달음'은 경계선이 무너지는 경험이다. 그것은 다른 세계 혹은 현실에의 눈뜸이다. 부활은 그들에게 아직 현실이 아니었다. 둘은 그래서 가슴 가득 의혹만 품은 채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20:11, 13-14).


두 제자는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을 떠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은 어디나 다 유배지일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저 우는 것 밖에는. 때로 눈물은 우리 눈을 맑게 만들어준다. 눈물로 맑아진 그의 눈이 천사를 본다. 사라에게 쫓겨나 어린 아들과 함께 광야를 배회하던 하갈도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울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지 않았던가? 마리아는 그 천사들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그저 자기 속에 있는 말만 내뱉을 뿐이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그 말 한마디 말고 다른 말은 천리 만리 밖으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기척을 느껴 뒤로 돌아섰을 때 그는 또 다른 낯선 사람을 본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주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한다. '보았지만, 알지 못한다'. 아직 그의 눈이 온전히 열리지 않은 탓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20:15-16)


예수께서 "여자여"라고 불렀을 때 마리아는 다시금 자기 속에 넘치는 말을 쏟아낸다. 오로지 사랑하는 그 님을 모셔가는 것만이 절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즉각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의 그 어감과 어조, 그 호명행위 속에 담긴 친밀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사람이 주님이신 줄 몰랐다. 그분이 떡을 떼어 축사하신 후 나누어주시기 전까지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아니 온몸에 새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쁜 의도를 지닌 권력자들은 사람들에게 번호를 매김으로 그들을 개별적인 인격으로 대해야 하는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난다. 번호로 환원된 이들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된다. 아, 주님이 우리 이름을 다정하게 호명하여 주기만 하신다면 어떤 어려움인들 극복하지 못할까.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20:17-18)


이제 예수님은 무덤으로의 하강을 넘어 하늘로 오르셔야 한다.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보내신 분의 품으로 가는 것이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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