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출애굽기 공부4 2014년 06월 07일
작성자 김기석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1)

본문 / 출19:1-25


출애굽기 19장은 '시내산 계약' 이야기의 서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과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탈출 공동체가 시내 광야에 이른 것은 애굽 땅을 떠난 지 삼개월이 되던 날입니다. 90일이 지났다는 말이 아니라 삼월 첫째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새번역은 아예 '셋째 달 초하룻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유대 전승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가 유월절 후 7주가 지난 오순절 날이라고 가르치고, 출애굽한 날이 첫째 달 십사일(12:18)이라는 보도로부터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르비딤을 지나 시내 광야를 통과한 후 산 아래 장막을 쳤습니다.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는 일찍이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그를 부르셨던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저하던 이전의 모습과는 아주 다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모세의 '오름'은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멋진 꿈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야 할 말씀을 일러주십니다. 주님은 애굽 사람에게 친히 행하신 일과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상기시킨 후, 그 백성을 향한 멋진 꿈을 들려주십니다. 그들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19:5)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계명을 부과하기보다는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이 대목이 참 감동적입니다.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노예노동에 시달리던 히브리인들은 삶의 자기 주도권을 향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지시를 받는 일에 익숙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에 동의할지 여부를 물으심으로써 그들을 자유인으로 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인격적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천대받던 사람들, 제국이라는 기계의 부품 취급을 받던 사람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려 하십니다. 이것은 강제노동과 폭력, 억압과 착취에 기반한 제국에 대한 부정입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유롭고, 다수는 부자유한 세상을 해체하려 하십니다.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별된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은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제의(祭儀)가 제정되면서 제사장이라는 특정 계급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이 되는 나라를 구상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만인제사장직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구별된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별되었다는 말일까요? 거룩한 백성은 이 지상의 현실을 넘어서는 세계가 있음을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창문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정녕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백성을 뜻하는 암('am)에는 '가족'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에까지 기꺼이 내려오신 하나님은 그들의 가족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이보다 큰 은혜가 또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처럼 새로운 역사에 대한 멋진 꿈을 제시하며 백성들이 그 꿈에 동참하겠는지 물으십니다.


언약 공동체

모세가 산에서 내려가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전하자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19:8) 하고 대답합니다. 아직 여호와의 명령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은 기꺼이 순종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은 맡김(trust)입니다. 광야 체험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근거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는 말을 입증하는 예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맺을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성경은 이 시내산 계약 이전에도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언약은 노아와 맺은 언약입니다. 폭력과 부패가 가득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창9:11)이라 하시면서 그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습니다. 이때 언약의 파트너는 노아이지만 언약의 대상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입니다. 두번째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유랑자가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땅과 후손'에 대해 약속해주셨습니다(창15:18). 하나님은 일찍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창12:3)이라며 아브라함에게 복의 매개자가 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언약이 바로 시내산에서 출애굽 공동체와 맺은 언약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2)

본문 / 출19:1-25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 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의 뜻을 전합니다. 그는 소통을 위한 '매개 존재', '경계인(境界人)'입니다. 경계인은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기에 외롭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쪽에 속한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는 사람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두려움과 떨림이 다시 모세를 사로잡았을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멋진 꿈에 동참하고 싶다는 백성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모세에게 임하여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말씀하십니다(19:9). 그것은 모세의 지도력을 강화해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광경을 백성들에게 개방하심으로써 모세가 전하는 말이 임의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지에서 나온 말임을 일깨우려 하셨습니다.


언약 준비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19:10-11)고 지시하십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려는 이들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하신 주님 앞에서 모세가 신을 벗었던 것처럼, 언약을 앞둔 이들은 몸에 밴 관습과 더러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목욕을 하고 옷을 빠는 일은 낡아빠진 일상, 경이가 사라진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일입니다. 일상과 비일상, 세속과 거룩의 경계를 예민하게 자각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그 경계선 앞에 선 사람은 경외심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셋째 날'을 기다리라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셋째 날'은 흔히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역사의 전환점을 암시하는 시간입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셋째 날에 눈을 들어 하나님이 지시한 산을 바라보았습니다(창22:4). 하나님의 명을 거스른 채 달아나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삼키운 채 삼일 삼야를 지나야 했습니다(욘1:17). 예수님은 어떤 바리새인들이 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하고 알렸을 때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13:32)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일은 어쩌면 어떤 사안 앞에서 자기의 감정과 태도를 성찰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삼일 동안 백성들은 산에 올라가도 안 되고, 모세가 설정해놓은 경계선을 넘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을 가까이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어쩌면 참 삶이란 자유의 한계를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싹터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위반하면서 시작됩니다. 자유의 한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리스 비극은 대개 '분노'와 '고집'에서 비롯되는 빗나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통이 오랫동안 죄의 가장 큰 뿌리 가운데 하나로 가르쳐온 휴브리스(hubris)는 한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만심을 뜻합니다. 모세는 그러한 금지 명령을 위반한 이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엄히 일렀습니다.


여호와의 강림

마침내 셋째 날 아침이 밝아왔고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시내 산에는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들이 참 다양합니다. 성서는 표현하거나 포착할 수 없는 신적 임재의 신비를 나타내기 위해 시적인 은유들을 종종 동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장 귀히 여기던 온갖 보석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계21:18-21). 시적 은유를 실재로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은유들은 우리를 신적 장엄함 앞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 거하시는 분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런 통념을 여지없이 부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강림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머무시는 공간은 없습니다. 성전을 지어 바쳤던 솔로몬조차 그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고착된 분이 아니라, 그 백성들의 삶의 자리에 언제든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시내산 꼭대기로 강림하신 여호와는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신 후에, 다시 한번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볼 욕심에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이르라 말씀하십니다. 23절에 나오는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는 구절도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산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산기슭에 머물게 하고 아론과 함께 산으로 올라 오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몇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경계를 지키라'는 명령은 어쩌면 이제부터 주어질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들이라는 권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1)

본문 / 출20:1-17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은 택함받은 백성들, 압제에서 해방된 백성들이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제1계명은 십계명 전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이 계명은 일쑤 타종교에 대한 배척의 근거로 동원되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유일한 분이라고 믿고 고백하지만 사실 고대 세계는 다신의 시대였습니다. 신들이 많았다는 말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다면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출애굽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을 타종교나 민속 문화에 대한 배척의 근거로 삼는 것은 이 계명의 삶의 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계명은 출애굽의 맥락과 분리시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계명에서 대조되고 있는 '나'와 '다른 신'이라는 기표 속에 담긴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나' 곧 '야훼'는 세상에서 짓밟힌 사람들,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 내일에 대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억울해도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 남에게 무시당하고 박해를 받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키고, 그들의 가슴에 자유에 대한 꿈을 심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그런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다른 신'은 제국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던 신들입니다. 가진 자들·힘 있는 이들이 누리고 있는 현상질서를 추인해주는 신들 말입니다. 그 신들은 사람들을 숙명론에 묶어둡니다. 노예로 살아가는 것도 신이 품부하신 것이니 수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신들은 언제나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서 박탈당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킵니다. 그 신들은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 약속의 수혜자들은 늘 강자들일 뿐입니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은 그런 애굽의 신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우상’ 하면 떠오르는 것은 돌, 나무, 금 등으로 만든 신상입니다. 그 신들을 믿는 이들이 이미 사라져 신들도 사라져버렸지만 돌로 만든 신상들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 도처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우상을 만드는 것일까요? 삶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우리의 경험과 이성으로 파악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처리할 수 없는 생의 어둠 혹은 한계상황 앞에서 사람은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력감과 불안을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객관적 대상물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의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신을 만들곤 합니다. 누군가를 섬기지 않고는 자기 속에 스멀스멀 기어드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섬길 뭔가를 필요로 합니다. 연예계 스타나 스포츠 스타에 열광하는 이들이나, 돈이나 출세 혹은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나 내면의 풍경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 공간화하고 싶은 열망이 곧 우상을 만드는 마음입니다. 자기 이름을 딴 기념관을 짓거나 웅장한 예배당을 지으려는 것도 어찌 보면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보려는 허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20:4)고 엄히 이르십니다. ‘만들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새기다’ 혹은 ‘쪼다’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이들에게는 평범한 말일 수 없습니다. 여러 해 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와 거대한 신상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채석장에서 거대한 돌이 선택되면 일꾼들이 양옆으로 나란히 앉아 정으로 돌을 쪼는 광경이었습니다.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정과 망치를 잡을 수 있는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채석장에 앉아 뙤약볕을 견디며 돌을 쪼는 이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죽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인들 모두가 채석장에서 일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국의 위계질서의 맨 밑바닥에 처해있던 이들의 삶은 대체로 유사하지 않았을까요? 지금은 관광지로 변한 옛 신전 건물을 볼 때마다, 거대한 신상들을 볼 때마다 그곳에 묻은 노예들의 땀과 피가 보이는 듯하고, 그들의 눌린 함성이 들리는 듯하지 않던가요? 종교를 빌미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적 삶에 묶어두는 종교는 악마화된 종교, 무너져야 마땅한 종교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에는 피의 기억이 배어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당을 짓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야훼의 이름으로 야훼를 부정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부정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십계명(2)

본문 / 출20:1-17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종교의 타락은 종교적 언어가 본래의 뜻을 상실하면서 시작됩니다. 기호로서의 언어와 그 내포하는 뜻이 분리되는 것이야말로 불신사회의 뿌리입니다. ‘망령되이’라는 말은 그 극단적 분리를 지시하는 말입니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차마 발음할 수 없었기에 네 개의 자음으로만 표기했습니다. 이름이 곧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와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김춘수의 시 <꽃>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호명 행위를 통하여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던 것이 ‘꽃’이 됩니다. 호명행위는 그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현현하신 하나님께 모세는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름을 알지 못하면 관계도 시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그 존재 전체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감추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그분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신비의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할 때, ‘망령되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공허하게, 헛되이, 불성실하게, 경솔하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관습적으로, 공허하게 발설하는 것처럼 큰 불경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고,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또 우상을 섬겨 땅을 더럽히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욕망의 씨앗을 심어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종교 상인들, 말씀의 해석권을 독점하려는 종교 권력,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인들의 군복에는 ‘Gott mit Uns'(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합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두렵고 떨림으로, 그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발설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에덴의 동쪽에서 가인의 후예로 살아가는 인간은 불안을 숙명처럼 떠안고 삽니다. 불안하기에 불안의 대용물을 찾으려고 달리고 또 달립니다. 하지만 돈, 명예, 권세를 향한 열정은 허망의 열정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근본적 불안을 해결해 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안', '뿌리 뽑힘', '안식 없음', 이것이 적나라한 우리 실존의 표상입니다. 불안을 숙명으로 알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우리에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물론 이 명령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몸이 천근만근으로 느껴지고, 욱신거리는 육체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낼 때에도 노동을 그칠 수 없었던 이들에게 주어진 이 계명은 그야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일을 멈추고 쉬라는 계명을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쉼에서 예외인 존재는 없습니다. 나와 가족은 물론, 종들과 가축들과 나그네까지도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을 떠나 다른 거주지에 체류하게 된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만, 만해 한용운의 시를 빌어 말하자면 '민적이 없어 인권도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언급된 대상의 순서가 암시하듯 가축보다도 낮게 취급을 받던 이들입니다. 안식일법은 그들조차 안식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안식일이란 샤바트라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아카드어로 '신의 심장이 쉬는 날'이라는 뜻의 '샤파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용어는 '쉼'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신의 리듬 속에 잠기는 날임을 암시합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계명은 '해야 한다'(미츠봇 아세이)와 '하면 안 된다''(미츠봇 로타아세)는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무엇보다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삶을 경축하는 것이 안식일 계명의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하지만 안식일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 또한 많습니다. 하지 않음의 핵심은 뭔가를 변형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번거로운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일주일 중 하루는 일체의 인위적인 일들을 그치고 온전히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은 겸허해집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안식이란 말 그대로 숨을 가지런히 하는 것입니다. 숨이 가지런해 질 때 밖으로 향했던 시선은 내면을 향하게 되고, 비로소 성찰이 시작됩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그 길을 바로 걷고 있는가?' 안식일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평가에 전전긍긍하며 살던 삶을 근원 앞에 세우라는 요구입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이라야 타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쉴 줄 모르는 이들일수록 자신과 타인들에게 폭력적입니다. '해야 할 일'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일이 중심이 될 때 사람은 수단이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폭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칫하면 타자를 수단으로 삼기 쉽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그런 마음의 습성을 끊어내는 일입니다.

























십계명(3)

본문 / 출20:1-17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안식일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살라는 뜻이었다면, 부모 공경 계명은 우리의 존재가 선물임을 자각하고 살라는 초대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미묘한 이중감정으로 얽혀 있습니다. 부모는 때로는 삶에 지칠 때마다 돌아가 안기고 싶은 고향인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훨훨 자유롭게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잡아채는 질곡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연장된 청소년기를 강요당하는 젊은이들, '정규직이 꿈'이라고 힘없이 말하는 젊은이들에게 부모는 어떤 존재일까요? 


어느 신학자는 어머니를 일러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라 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창조행위라는 뜻일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부모는 생명의 전달자인 동시에 신앙적 기억의 전달자이기도 합니다. 부모는 유랑자로 살았던 조상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가르치는 책임을 진 자입니다. 기억의 지속이야말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유지의 관건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부모에게 잘해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 생명과 정체성의 뿌리로서 존경하라는 뜻일 겁니다. 오늘 이 땅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부모 세대의 삶의 이야기가 자식 세대에게 전달되지 않아 장기지속으로서의 정신적 유산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다른 맥락에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모로 지칭되고 있는 이들은 일차적으로는 육친을 뜻하지만, 그 맥락을 넓히면 늙어가고 있는 이들 혹은 사회적 약자를 지칭하는 말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젊은 날의 기력을 잃고 서서히 생의 황혼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모든 생명의 운명이지만, 그런 연약함을 자기 삶으로 수용하고 통합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입니다. 생의 절정에서 물러나 자기 뜻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사태를 지켜본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일 것입니다. 특히 모든 것을 효율성과 쓸모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 혹은 노인들은 깊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속에는 그들의 살 권리를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20세기를 거쳐 21세기 초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도처에서 들려오는 분쟁과 테러의 소식을 덤덤하게 듣습니다. 일상화된 폭력과 테러가 우리의 지각을 마비시킨 탓입니다. 매스컴은 테러로 죽어간 사람들을 재빨리 숫자로 환원해버립니다. 숫자로 기호화된 사람들은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폭력은 그렇게 해서 일상에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아이들이 즐기는 전자오락 게임에서도 생명은 속절없이 유린당합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총을 쏘아 쓰러뜨리면서 쾌감을 느낍니다. 전자오락 뿐인가요?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도 피가 흥건히 흐릅니다. 가상현실로서의 피 흘림에 익숙해진 이들은 현실 속의 피 흘림에 대해서도 낯설어 하지 않습니다. 무감각해지는 것이지요.


모든 유기체는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 경외를 설파했던 앨버트 슈바이처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모든 유기체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등을 맞대고 있는 절친입니다. 문제는 주어진 생명을 한껏 살아내지 못하고 중도에 폭력적으로 차단당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생명의 뿌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의 세계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이유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기에 최소한의 폭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다른 생명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첫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창조 세계를 잘 돌보라는 위임을 주셨습니다. '돌본다'는 것은 북돋고, 어루만지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늘 목숨의 위협을 받던 이들에게 들려온 이 계명은 하늘의 명령이지만, 동시에 땅의 사람들의 외침입니다. 바로 앞에 선 모세는 나일강 물을 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것은 이적이 아니라 가면을 벗기는 행위였습니다. 애굽의 힘과 풍요로움의 상징인 나일강이 사실은 히브리들이 흘린 땀과 피라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우리도 사람이다.' 가슴 절절한 고통이 있었기에 이 계명은 하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계명은 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사사로운 피의 보복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생명을 살리라"는 말이 됩니다. 그 생명은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피조 세계를 다 포괄합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있는 피조 세계를 돌보는 것 역시 이 계명을 지키는 길일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을 역전시키기 위해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십계명(4)

본문 / 출20:1-17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참 낯설고도 불편합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성 담론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급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모든 계명은 보편적인 윤리를 가르치지만, 그 탄생의 자리는 구체적 현실임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살았던 여성들은 강제노역은 물론이고 주인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라". 이 노래가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힘 있는 이들의 욕망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는 경험을 다반사로 했을 터이니 그들의 한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들이 이루어 살게 될 새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이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계명은 남녀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상호윤리를 넘어, 강자들(권세자든 남성이든)의 폭력을 금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강자들에 의해 가정이 유린되고 성이 유린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노골적인 거역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성적 담론은 더 이상 사생활의 은밀한 영역에 머물지 않습니다. 각종 사진과 영상자료들은 사람들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고스란히 반영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정은 더 이상 서약에 근거한 항구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 결합하고, 필요가 해소되면 쉽게 헤어질 수도 있는 잠정적인 공동체일 뿐입니다. 물론 이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인 경향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제로 여기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그렇다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자연스런' 혹은 '아름다운'이라는 말로 포장된 성적 담론은 뭔가를 은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벌거벗은 욕망입니다. 통제되지 않은 욕망은 넘치게 마련이고, 그런 넘침은 주변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마음에서 작동하고 있는 과도한 욕망이 이미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해석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라캉이나 프로이트 혹은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빌리지 않고도 욕망이 인간의 이성과 행동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욕망이 활성화되는 순간 이성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충족을 지향하는 욕망은 타자를 도구화하는 일도 서슴치 않습니다. 물론 욕망 그 자체가 문제라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과도함입니다. 출애굽의 맥락에서든 오늘 우리 삶의 맥락에서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타자를 물화시키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요? 과도한 욕망은 자칫 하나님의 형상인 이웃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니 말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여덟번째 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은 막연히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지 말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이 계명의 삶의 자리는 '사람 도둑질'이 일상화된 현실이었습니다. 성경이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로 내세우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처럼 의지가지없는 신세의 사람들은 강자들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빚에 몰려 종으로 전락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요?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일체의 행위는 제8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변형된 형태의 도둑질은 우리의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납니다. 물건을 사고팔 때 속임수를 쓰거나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나, 마땅히 줘야 할 품삯을 미루거나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아르바이트생들의 임금을 떼먹는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의 불안한 신분을 이용하여 임금을 착취하는 사람들, 제3세계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이윤을 불리는 다국적 기업들도 실상은 제8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재벌들이 하도급업체에게 비용 부담을 떠넘기는 행위, 피라미드식으로 물건을 대리점에 떠넘기는 행위, 큰 자본을 가진 이들이 영세상인들의 상권까지 파고들어오는 행위는 모두 변형된 도둑질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일러 합법화된 절도체계라고 말했습니다. 외경의 집회서는 궁핍한 이들을 더욱 힘겹게 만드는 행위를 살인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궁핍한 이들의 빵,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목숨이니 그것을 빼앗는 자는 살인자다. 이웃의 밥줄을 끊는 자는 그를 죽이는 자고 일꾼의 품값을 빼앗는 자는 그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다.”(집회34:25-27)


상호부조 체계가 무너진 사회일수록 도둑질이 성행합니다. 돈이 인간의 욕망을 과잉대표하는 세상일수록 도둑질은 일상화되게 마련입니다. 삶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가르치는 세상은 도둑질을 권하는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눔과 돌봄이 사회의 저변에 깊이 뿌리 내리고, 절제와 자족의 삶을 즐거이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도둑질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도둑질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십계명(5)

본문 / 출20:1-17


거짓 증거하지 말라

아홉번째 계명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입니다. 거짓 증거는 법정에서 자주 벌어집니다. 송사가 벌어지면 이해 당사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사람을 찾게 마련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명백할 때는 굳이 증인을 세우지 않아도 되지만, 양측의 증언이 모순되거나 충돌할 때는 증인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증인은 참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법정은 증인들에게 '사실만을 증언하겠다'는 선서를 하게 합니다. 사실에 입각할 때 그 증언은 참되지만, 이해관계를 반영할 때는 참되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거짓 증거가 신뢰 사회의 토대를 허무는 작은 여우임을 알기에 거짓 증거를 엄중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중상모략과 무고(誣告)가 범람하는 사회, 말의 진실성이 의심받는 사회는 기초부터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는 공감과 연대의식이 사라진 사회입니다. 말이 무너지면 세상도 무너집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거짓증언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왕상21장)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도 종교 귀족들의 거짓증언이 초래한 사건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극적으로 바꾸면 '참된 말을 하라'가 될 것입니다. 무엇이 참된 말일까요? 살리는 말과 세우는 말이 아닐까요?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살리는 말이 아니라 죽이는 말이 넘치고, 세우는 말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말이 넘치지 않습니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제멋대로 찌지를 붙이는 일이 많습니다. '좌파'니 '종북'이니, '우파'니 '수구'니 하면서 우리는 반대 진영에 속한 이들과의 소통을 거부합니다.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아니라 그들을 갈라놓는 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마치 맨발로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를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채찍에 맞은 자국은 피부에 남지만 혀에 맞은 자국은 골수에 남는 법입니다. 말에 맞은 상처는 잘 아물지도 않습니다. 말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말을 다루는 이들의 책임이 큽니다. 언론과 교육과 종교의 언어가 타락했습니다. 진실과 애린의 체에 걸러내지 않은 말은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현인들은 말의 위험을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말을 즐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비록 경탄할 만한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내부는 비어 있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사랑하라. 침묵은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열매를 너희들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토마스 머튼)

“내 생의 순간마다 나는 침묵이 최대의 웅변임을 인식한다. 부득이 말해야 한다면 가능한 한 적게 하라.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하라.”(마하트마 간디)

“사람은 태어날 때에 그 입 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숫타니파타, 65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열번째 계명은 '탐내지 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탐내다'의 사전적 정의는 '몹시 가지고 싶은 욕심을 내다'입니다. 이것은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의 문제입니다. 계명은 이웃의 집, 이웃의 아내, 남종, 여종, 소나 나귀 등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절로 일어나는 욕망을 어찌하란 말입니까?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욕망의 죽음은 어쩌면 의욕 상실과 유사합니다. 문제는 과도함입니다. 과도한 욕망은 자기 파괴적인 동시에 타자에 대한 부정으로 작동하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영의 전시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욕망은 전염성이 매우 강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나의 욕망은 내 속에서 나오는 경우보다 다른 이들(매개자)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일쑤 이웃이 소유한 것을 나도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소유하지 못할 때 자존심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럴 때면 폭력적인 방식으로라도 그것을 획득하려 합니다. 


탐심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동료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게 됩니다. 비인간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탐심이라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벗어날 길은 무엇일까요?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을 따라다니기보다는,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헤아리기보다는 이미 있는 것을 한껏 누리려 할 때 욕망의 죔쇠는 풀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망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이들의 공동체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돈으로 매개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덜 가지고도 더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욕망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삶이 구현된 자리여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가 됩니다.






















종의 인권도 존중하라

본문 / 출21:1-11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꼭 지켜야 할 내용이 담긴 법전들이 여러 개 등장합니다. 계약법전 혹은 언약법전(출21:1-23:19)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모세가 그 내용을 기록하고 백성들 앞에서 '낭독'한 것입니다. 성결법전(레17-26장)은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신명기법전(신12-26장)은 계약법전을 재해석한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살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 관계 법령집이 있습니다. 성막에 관한 내용(출25-31, 35-40), 각종 제사규정과 레위 지파의 책무를 다룬 것으로 토라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계약법전입니다. 사실 그 법령은 광야생활이 아니라 정착생활을 이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직 왕정체제나 도시 국가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농경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수공업자나 상인 혹은 직공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나오지 않는 반면 소나 나귀, 양에 관한 문제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계약법전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고아, 과부, 나그네, 종 등 사회의 밑바닥 계층을 형성하고 있던 이들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애굽에서의 경험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이들을 배려하는 것을 해도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종에 대한 규범

계약법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종에 대한 규정은 왠지 낯설게 느껴집니다. 출애굽 사건은 종살이를 떨쳐버리고 자유인이 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는데, 종이 언급된다는 사실은 출애굽 정신에 대한 위배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규범은 훨씬 후대의 정착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계약법전은 종의 존재나 그들을 사고 파는 문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종은 신분질서에 의해 고착된 계급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 때문에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종이 되었을까요? 우선은 전쟁포로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빚에 몰려 종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열왕기하에는 예언자 수련생의 부인이 엘리사를 찾아와 아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다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왕하4:1). 문제는 가난이었습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아모스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암2:6) 파는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종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출애굽 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는 추문거리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또한 현실이었습니다. 계약법전은 역사의 이상을 지향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도외시하지는 않습니다. 종에 대한 규정은 이중적입니다.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삼았을 경우에는 여섯 해 동안만 주인을 섬기게 하고 일곱 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아도 자유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성결법전은 외국인 중에서 취한 종은 영원히 종으로 삼아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25:44-46). 계약법전은 종을 내보낼 때 지불해야 할 보상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면, 신명기 법전은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후히 주어서 생활 밑천을 삼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5:12-14).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그들도 애굽 땅에서 종으로 살다가 여호와의 속량하심으로 자유인이 되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자유를 얻은 종은 들어올 때의 가족상태 그대로 나가야 합니다. 단신으로 들어왔으면 단신으로 나가고, 장가 들었으면 아내도 함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인 집에 들어와서 아내와 자식을 얻은 경우, 그 아내와 자식들은 주인의 소유로 간주되었습니다. 종이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종신토록 주인을 섬기겠다고 말하면 중재자를 통해 그 사실을 확증받아야 했습니다. 그 의례는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다가 송곳으로 귀를 뚫는 것이었습니다. 귀를 뚫는다는 것은 귀의 완전성을 제거하는 일이었고, 들을 수 있는 원래적인 자유를 제거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마르틴 노트, <출애굽기>, 한국신학연구소, 1981년, p.213 참조).


여종의 경우는 좀 달랐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종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아버지에 의해 팔린 딸의 경우입니다. 종이라 했지만 첩으로 들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종은 일곱 째 해가 되어도 자유를 얻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여종의 권리에 대해 율법은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이 그 종을 첩으로 데리고 살다가 내치는 경우 여종을 외국인에게 파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여종을 며느리로 맞아 들인 경우에는 딸과 같이 대우해야 했고, 주인이 다른 여인을 첩으로 삼을 경우에도 여종은 부부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주인이 음식, 의복, 동침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는 돈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해야 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종의 존재가 기정사실로 변한 현실 속에서 계약법전은 종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최대한 확보해주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행위들

본문 / 출21:12-36


심각한 범죄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무엇이라고 이해할까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 뿌리는 과거로 뻗어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소명을 중심으로 보자면 그 뿌리는 미래로 뻗어있습니다. 과거가 되었건 미래가 되었건 그들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공동체를 뜻하는 라틴어 'communis'는 '함께'를 뜻하는 'com'과 '선물'을 뜻하는 'munis'가 결합된 말입니다. 공동체란 서로가 선물이 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공동체를 뜻하는 헬라어 'kommein'은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공동체의 존립 근거는 '너'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기꺼이 '나'를 선물로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상호성을 전제로 합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공동체를 깨뜨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계약법전 안에는 공동체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이 결의론적(決疑論的)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결의론이란 사회적 관습에 따라 도덕적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을 말합니다. 그것은 대개 삶의 구체적인 상황이 전제된 후에('~한 경우에는') 그에 따른 법률적 적용('~ 해야 한다')이 도출되는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크게 위협하는 행위는 살인입니다. 계약법전은 살인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기본적 전제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의 고의성 여부가 가려져야 합니다. 13절에 나오는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이라는 구절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소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 같이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두고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신의 뜻 앞에 맡기려 했습니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그런 살인의 경우 살인자 또한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 됩니다. 죽임당한 이의 가족들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서 나중에 '도피성'으로 명명된 한 장소가 마련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의로 살인를 범한 자는 제단으로 피했다 해도 반드시 끌어내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리거나(15) 저주하는 자(17)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폭행이나 저주가 죽음을 초래하지 않았다 해도 그러한 자식은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부모의 권위에 대한 거역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거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유괴한 사람 역시 죽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존립 기반인 서로에 대한 신뢰를 허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투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만든 경우에는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종들을 때려 상해를 입힌 경우에는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주어야 했습니다. 이쯤되면 주인들은 과도한 폭력을 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24절과 25절에 나오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lex talionis),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라는 구절은 비문명화된 사회에서 자행된 잔인한 형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도한 피의 악순환을 막으려는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


태만한 죄

황소가 사람을 받아 죽였을 경우는 그 황소를 돌로 쳐 죽임으로써 공동체를 위협하는 행위를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 고기의 취식도 금지되었습니다. 소는 사람을 받아 죽임으로써 이미 터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금기의 대상이 된 고기를 먹는 것은 부정한 행위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주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받는 버릇이 있는 황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 황소는 물론이고 관리를 잘못한 주인까지도 죽여야 했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그 주인에 대한 처벌보다 적절한 보상을 원할 경우에는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고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황소가 종을 받아 죽일 경우에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하지만, 황소 주인에게는 은 삼십 세겔을 종의 주인에게 주는 배상의 책임만 물었습니다. 종의 인권을 존중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종을 소유물로 여기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구덩이를 덮지 않아서 남의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 구덩이 주인은 반드시 보상을 해야 했습니다. 죽은 짐승은 구덩이 주인의 몫이 되었습니다. 소가 다른 소를 받아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나누고, 죽은 소도 반으로 나눠야 했습니다.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경우는 소를 소로 갚아야 했습니다. 계약법전은 이처럼 농경문화 혹은 유목문화권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할 때 공동체는 갈등이나 분열 혹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인애와 사랑을 기본으로 삼아야 하지만,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공동체로 부름받은 이들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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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청자(14 06-07 02:06)
기다렸던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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